98화
‘당연히 알려 주죠. 그분이라면 분명…….’
-이 아니었다. 내가 클레멘츠에게 뭐라고 그런 민감한 비밀을 알려 주겠는가.
“그러니 그런 위험한 사람보단, 평범하지만 유능한 청마법사가 낫지 않아요?”
“네?”
“제가 저번에 말한 건 생각해 봤어요?”
언제 은밀한 이야길 꺼냈냐는 듯, 다시 넉살 좋은 표정이었다. ‘저번에 말한 건’은 이 헛소리를 뜻했다.
“사랑은 어때요? 아무라도 좋으니 사랑해 봤어요?”
“저기요…… 메디프 황자 전하.”
원래 이런 캐릭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캐릭터에 충실한 거 아냐?
메디프의 마법 실력은 높이 평가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역시 그가 가볍게 만나는 수많은 귀족 영애들 중 하나가 되는 건 사양하겠다.
이럴 땐 묘책이 있었다.
소설 속의 메디프는 많은 여성들에게 호감을 드러냈지만, 누군가에게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은 건들지 않았다.
“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래요?”
“네. 저는 그 사람의 진중하고 조금은 냉정하기까지 한 면에 반했어요.”
아예 메디프의 성격과는 상반되는 특징까지 대충 늘어놨다. 이걸로 더는 내게 미련 두지 않을 것이다.
“……차마, 감히 이 마음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지만 제 마음 속엔 언제나 그 사람뿐이에요.”
그러곤 아련한 짝사랑의 추억을 곱씹는 듯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해 두면 눈치 없이 캐묻지도 않겠지.
“……그렇군요. 당신 마음이 그렇다니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후훗, 역시.
어쩐지 메디프의 목소리가 약간 어둡게 들리는 것 같은데……. 돌아보니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응원할게요, 오필리어 양.”
“고마워요!”
역시 착각이었겠지!
우리는 다시 저주 이야기로 돌아갔다.
꿈속에서 마녀들이 손톱으로 내게 균열을 낼 때마다 하던 말이 열쇠였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손톱을 뽑아 제 가슴에 박을 때, 이상한 말을 해요. 고대어 같았는데. 크뤼소…… 마니타르?”
“χρυσό μανιτάρι.”
“오! 그거요. 그거예요!”
메디프는 듣자마자 정확히 발음해 냈다. 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합체 마녀가 읊조렸던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거 대체 무슨 뜻이에요?”
“황금색 송이버섯.”
“네?”
“황금색 송이버섯이요.”
앉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 있었으면 황당해서 다리가 풀릴 뻔했다.
“마물처럼 온전한 직관으로 마법을 거는 정신체들에겐 주문 자체의 말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일종의 기합 같은 거죠.”
“그래도 왜 하필 버섯일까요…….”
게다가 황금빛이라니 신경 쓰인다. 내가 버섯처럼 생겼나? 머리 때문에 왠지 신빙성 있어서 더 신경 쓰인다. 그 합체 마녀 진짜……!
“숲에 기거하는 마물들이니 친숙한 물체를 주문으로 삼은 거겠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메디프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바짝 약 오른 게 다 티 났나 보다.
“아무튼 그게 주문으로 좋겠어요.”
“네?”
“미리 균열을 여는 주문이 설정되어 있으니, 거기에 편승하기만 하면 원할 때마다 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될 거예요.”
시간의 힘을 지닌 메라와 닉타가 직접 저주에 균열을 내면서 사용한 어구였다. 그러니까…… ‘황금색 송이버섯’이.
말에는 의지와 힘이 담기고, 강한 의지를 담은 말은 주문이 된다고 하던가.
“균열을 통해 당신을 둘러싼 저주 안으로 들어가면 인간에서 병아리로, 균열을 뚫고 바깥으로 나가면 병아리에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거죠.”
억지로 ‘지금 당장 내가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10가지 간절한 이유!!’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니 간편했다.
“하지만 저는 고대어를 모르는데요.”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말할 수 없다면 소용없다. 자연령을 소환하려다 실수로 마수를 부르며 깨우친 바였다.
“그래도 가능합니다, 손님.”
그는 청보랏빛 눈을 찡긋거렸다.
“목소리에 마력이 있으시잖아요.”
“아…… 알고 계셨나요?”
“저도 마력을 다루는 사람인데, 모를 수가 없죠. 당신이 천막에 들어와 첫 입술을 떼는 순간에 알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걸로 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요. 너무 미약하잖아요?”
메디프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 전체에게 마법을 걸어 놓고 그런 말이 나오나요?”
“……네? 자, 잠깐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단 저건 칼로카이리 축제 날 이야기였다. 메디프와 나 둘 다 광장에 있었던 건 그날뿐이니까.
그가 내 노래를 들었단 건 둘째 치고라도…….
“제가 언제 마법을 걸었어요?”
“어휴.”
못 말리겠단 반응은 뒤로하고 생각해 봐도,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희한할 만큼 반응이 좋았다.
3위인 나와 1, 2위는 점수 격차가 컸다. 그만큼 딱히 압도적인 실력이 아니었는데도, 우승자마저 ‘당신이 1등일 줄 알았다.’란 말을 했다.
그게 내 목소리에 세뇌된 거였다고?
“당연한 거지만 당신은 목소리 자체가 마력이니까 증폭되는 만큼 커지고, 말할 때보다 노래할 때 더 효율적이에요.”
대회 심사 기준이 달라져서 다행이었다. 예년처럼 거수 투표로 결정했다면 결과 조작이 될 뻔했다.
혹시…….
황자궁 경비병들이 날 무시하다가도 말 한마디에 태도가 바뀐 것도 이것 때문인가?
평생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대에는 마물을 상대하는 데 쓰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내 생각보단 강한 힘이었나 보다.
“흠…… 게다가 전보다 더 강해지신 듯한데. 이 정도면 고대어로 말하지 않아도 균열에 시동을 걸기엔 충분해요.”
메디프의 시선이 내 성대 부근에 와 닿았다. 문양이 있던 자리는 검은 끈의 초커로 감싸여 있었다.
클레멘츠에게 말을 들어 두었는지, 유렌과 카렌은 무도회 이후로 늘 드레스에 맞는 초커를 함께 코디해 주었다.
분명 문양 안에 들어찬 반짝이는 보라색을 보았는데, 둘 다 은근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뭐라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젠장…….
“혹시, 이런 마법 주문도 해석할 수 있나요?”
“갑자기요? 말해 봐요.”
나는 클레멘츠가 내 목을 보며 읊조렸던 고대어를 최대한 떠올렸다. 야릇한 울림의,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던.
“글뤼키아포니…….”
“γλυκιά φωνή σου.”
아. 이번에도 즉시 나왔다. 마법사라면 이 정도 고대어는 다 하는 건가? 경이로움에 메디프를 보니 그 역시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맞아요! 그런데 그 뒤로도 조금 더 있어요.”
“알아요.”
“……어떻게? 그 자리에는 안 계셨는데……. 혹시 고대어에서 유명한 문장인가요?”
메디프는 피식 웃었다.
“맞아요. 시에서 나온 구절이죠. 아주 길고, 아주 오래된.”
역시.
고대어를 배웠다 하면 모를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시인가 보다. 그래서 첫 구절만 들어도 저렇게 척 하면 척인 거고.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관동별곡’을 외우는 거랑 비슷한 모양이었다. 강호에 병이 깊어……크흠.
그런데 대체 왜 관동별곡을 내 목에 대고 읊었데?
“연애 시예요.”
“…….”
하마터면 저주고 뭐고 다 내팽개쳐 두고 도망갈 뻔했다. 이러면 관동별곡일 때보다도 더 알 수 없어져 버렸다. 클레멘츠는 왜 그런 일을 했지?
“흐음.”
메디프는 가까스로 진정하는 나를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책상에 쌓여 있던 책 중 하나를 펴더니 죽죽 줄을 그었다.
“시의 내용이 궁금하면 나중에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펴 봐요.”
“아, 고맙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읊어 준다면 재밌겠지만…….”
뭘 또, 재미? 계속 보다 보니 정말 짓궂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그가 또 유유히 빠져나가듯 웃었다.
“당신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고 싶네.”
비교적 얇은 책을 건네받은 후.
메디프는 나를 말 그대로 속성 훈련시켰다.
그는 천막에서 해 줬던 것과 똑같이, 물약을 쓰고 주문을 외워 나를 둘러싼 저주가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여태껏 충분히 변신 과정을 겪었으니, 당신은 이미 균열이 벌어지는 감각에 대해 알고 있을 거예요.”
사람에서 병아리로, 병아리에서 사람으로 변할 때 어디선가 파삭- 소리가 나는 듯한 그 느낌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연습하면서 감을 잡기엔 눈에 보이는 게 쉽겠죠?”
물약에서 나온 황금빛 입자들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한편에 길게 그어져 있는 균열의 입구를 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낮이지만 약간 어둑한 탑의 방. 고즈넉한 책과 잉크의 냄새가 나는 곳. 메디프의 낮은 목소리가 달래듯 부드럽게 울렸다.
“그 느낌을 다시 되살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반드시 모습을 바꾸겠다는 의지와 함께 주문을 외쳐야 합니다.”
주문은 다름 아닌 ‘황금색 송이버섯’이었다. 쪽팔렸다.
“화, 황금색…… 흑…… 송이…….”
합체 마녀 이 자식들, 가만 안 둬! 뭐 이런 누추한 주문이 다 있냐고. 정말!
“자아, 오필리어.”
몇 십 분간 낑낑대며 진전이 없자, 메디프 2황자께서는 사악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여셨다.
“기억하죠? 당신 마력은 노래로 부르면 증폭된다고.”
“……!”
“영 힘들면, 그 주문에 멜로디를 붙이게 할 거예요.”
사악해.
클레멘츠만큼이나 저 동생도 악마잖아!
이보다 수치스러운 꼴을 보일 순 없다는 마음이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조금 뒤, 나는 정말로 해냈다.
“과연 귀엽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첫눈에 반했을 만해요.”
메디프는 쿡쿡 웃었다.
“삣삑.(됐고요. 황금색 송이버섯!)”
익숙해지니 번쩍- 두둥실- 파삭! 의 과정도 다소 빨라진 듯했다. 거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인간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