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삑삐약.”
반짝 눈을 뜨니 반겨 주는 병아리의 몸. 이젠 익숙하다.
창문 쪽에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포롱 날아가 보니 메디프가 보낸 종이학이었다.
부리 부분으로 창문을 두드린 종이학은 힘을 잃은 것처럼 그 자리에 툭 쓰러졌다.
살짝 열린 틈으로 나가서 종이학을 물어 왔다.
[점심 먹고 제 궁의 탑에서 만나요.]
저절로 펼쳐진 편지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점심 이후라면 아직 시간이 많았다.
“삑 삐빅.(사람이 되고 싶다!)”
…….
“삑! 삣찌잇!(나는 간절하다!)”
…….
“삐꺄!(200크로나!)”
파삭-.
“후우우…….”
역시 무한 경쟁 자본주의 시대에 사람을 가장 진심으로 각성시키는 건…….
200크로나를 벌기 위해 백작 저택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렌과 카렌에겐 아침부터 갈 데가 있다고 해 두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도서관이었다.
아침 햇살이 하얀 돔 위로 아름답게 부서져 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와 같은 정경이 펼쳐졌다.
장관이고요. 절경이네요.
벽을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책들. 서가 사이사이 밝혀진 마력 조명. 우미하게 마감된 건물. 아름다운 곳이었다.
넋 나간 채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는 꼴이 독서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었기에, 재빨리 진정하고 목적지로 걸어갔다.
물론 목적지란 저번에 못 갔던 로맨스소설 코너였다.
“흐어억.”
가까이서 보니 더 아름답다. 미처 갈무리 못 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나의 로망이 눈앞에 실현돼 있었다.
고전으로 정평 난 명작들과 연도별 히트작들의 적절한 조화.
재탕을 부르는 작품들을 마구잡이로 뽑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절제해야 했다. 대출은 1인당 3권까지만 가능했다.
내 눈은 더 기민하게 코너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있었다. ‘괴물 백작의 욕망’ 완전판이.
7년의 세월과 뭇사람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너덜너덜해진 모습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나는 꿈의 책을 펼쳤다. 그리고 빠져들듯 책 속에 녹아들었다…….
…….
“후우…….”
앉은 자리에서 독파한 책을 덮은 나는 여운에 허덕였다. 표지 상단의 붉은 딱지가 세월의 풍파에도 선명함을 자랑했다.
혹독한 삶의 고통과 치밀어 오르는 욕정 속에 싹튼 이것은 끈적이는 집착인가, 아니면 눈부신 사랑인가? 확실한 건 그 정체 모를 감정에 얻어맞은 내 머리가 이다지도 얼얼하다는 것…….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이마를 감싸 쥔 내 상태가 심상찮았는지, 책 수레를 밀고 가던 사서가 말을 붙였다.
나는 뺨을 적신 눈물을 쓱 훔치며 멋있게 덧붙였다.
“그냥……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를 읽어서요.”
“아, 네.”
사서의 눈이 책 표지에 닿았다. 이내 그는 흐린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나는 뽑을 때만큼이나 경건히 ‘괴물 백작의 욕망’을 꽂아 넣었다. 얼마 뒤면 점심시간이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꼭 야한 책 읽으러 온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메디프를 만나기 전, 저번에 보지 못했던 책을 미리 읽어 가고 싶었다.
말하자면 예습이랄까? 절대로 야한 소설을 읽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아, 여기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금세 ‘혼우드 - 마성, 저주, 수호의 땅’을 찾을 수 있었다.
메디프 덕에 어제는 내가 어떤 새로 변신하는 건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신수라니 아직 얼떨떨하고 말도 안 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벨라와 내가 받은 저주에 대해 좀 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먼 옛날 우리들의 세상은 요동치는 마력과 마계의 불청객들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혼우드는 특히나 더 엉망진창이었다.]
인상적인 도입부로군.
[비록 마계와 너무 가까워 위험하지만, 혼우드부터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다. 안개의 숲 안쪽부터 곡식이 자랐고, 시냇물이 흘렀고, 마계의 독기가 아닌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여기까진 아는 얘기였다. 책장을 하나둘 넘기던 난 한 부분에서 멈추었다.
[……그런 고로 일부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특질을 타고난다. (중략) ……오래전, 한 귀족 가문은 목소리에 깃든 파마(破魔)의 마력으로 위험을 경고하고 사람들을 마족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냈다.]
그 부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경우 외에 목소리에 깃든 마력에 대한 이야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문양이 새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드레스와 맞춘 초커 감 아래로 미약한 요철이 느껴졌다.
정확히 클레멘츠가 입 맞춘 자리였다.
“뭔가 알고 그런 걸까……?”
달아오른 얼굴을 살살 흔들었다.
이 책에 언급된 옛 귀족 가문이 레오라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피는 모계로도 섞이니까.
예전에는 이 능력이 사람을 지키는 데 쓰였다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느꼈던 과거가 왠지 부끄러웠다.
[그들은 돌연변이였다. 마성의 땅이기에 살아가기 힘들었고, 마력을 가진 돌연변이가 태어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능력은 개인 혹은 무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나는 이것을 시미크의 안배라고 칭하고 싶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간혹 마력을 품고 태어나는 이유도, 이 책에 따르면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어쩌면…… 마수의 목소리를 듣는 벨라의 능력도, 대마녀의 환생이라서만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해 변이된 혼우드 사람의 특징이었던 건 아닐까?
너무 새로운 관점이라 조금 얼떨떨했다. 메디프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왔기에 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점심을 먹고 곧장 메디프의 탑으로 갔다. 2황자궁 입구의 경비병들은 교대를 마쳤는지 저번과 얼굴이 달랐다.
안내를 받아 탑 꼭대기로 올라가자 탁 트인 연구 공간이 나왔다.
마법서가 한가득 꽂힌 책꽂이가 둥근 벽면을 3분의 2 정도 둘러쌌다. 복잡한 도형이 그려진 종이, 깃펜과 잉크, 펼쳐진 책들과 약병이 굴러다니는 책상도 있었다.
그러나 산드라 팔라스 총장의 연구실을 생각해 보면 전체적으로 깨끗한 편이었다.
“왔어요?”
양피지에 수식을 끼적이던 메디프가 인사했다.
오늘은 내가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메디프는 필기도구를 들고 나와 마주 앉았다.
저주를 다루려면 그 저주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메디프의 요청에 따라, 그동안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시작은 혼우드의 숲. 약초를 캐러 들어갔다가 나의 주인이자 친구인 벨라 아가씨와 같은 저주에 걸려 버렸다. 바로 낮에 병아리가 되는 저주.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이코 마법사가 내 병아리 모습이 보기 좋다며 마물에게 명령해 밤 시간에까지 그 저주를 연장해 버렸다. 지금은 아예 그 마법사와 계약으로 묶이기까지 한 상황.
“다행히도! 마침 혼우드를 지나던 황태자 전하께서 제 사정을 불쌍히 여기셨답니다. 시녀 일을 하다 생계가 끊기게 생긴 저를 데려와 보호해 주신 거예요.”
클레멘츠가 왜 남들 앞에선 마법을 못 쓰는 척하는지 생각해 보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시미크 교가 국교인 이 나라에서, 황태자가 마물은 물론 대악마까지 소환해 사술을 부린다고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놈이 바로 그놈이라고 폭로할 수가 없다.
차선책으로, 나는 클레멘츠의 인격을 분리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 일이 이렇게 커져 버리긴 했지만요-.”
그러나 메디프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연기할 필요 없어요. 그 미친 마법사가 황태자 전하라는 것쯤은 저도 아니까.”
“…….”
“왜요.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래도 제 형이잖아요.”
“아니, 그게 저…….”
클레멘츠의 인격은 다시 합쳐졌다.
“마물을 사역할 수 있는 데다, 그 즈음에 서부에 있었고, 성격마저 이상한 사람이 달리 있나요?”
“그야 그런데요…….”
뭔가 이상했다. 나는 우물거리다가 걸리는 점을 이야기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소환술을 쓸 줄 아시는 거, 다들 모르시는 줄 알았어요.”
“글쎄? 적어도 황족들은 다 알아요.”
“네……?”
그렇지만 저번 가족 식사를 함께했을 때, 클레멘츠는 분명 마법을 쓸 줄 모른다고 얘기했었다.
애당초 그래서 흡수 보존 마법 같은 간단한 걸 부탁하러 아카데미 총장에게까지 찾아간 거였고.
그래서 마법을 쓸 줄 아는 건 가족들에게도 모두 비밀인 줄 알았는데?
의문 가득한 내 표정을 본 메디프는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체할 뿐이지.”
“……왜요?”
“황실의 비밀과 관련된 문제예요. 당신 생각보다 이 황가에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어요.”
황실의 비밀이라는데 외부인인 내게 대뜸 알려 줄 것 같진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라니. 그런 내용은 소설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한 2부에 나올 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레멘츠의 죽은 모후 셀레네. 무덤이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여전히 황제의 역린인 그 여자.
확실하진 않으나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황태자 전하는 위험한 사람이에요, 오필리어.”
그건 또 웬 뜬금없는 소릴까.
하지만 내심 그게 맞다는 걸 알았다. 하도 클레멘츠가 만만해져서 잊고 있었지만, 그에겐 도저히 인간이라곤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칼로 피를 낸다고 마물을 소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낮은 목소리가 은근하게 속삭이자 음험하게까지 느껴졌다.
최근 수 대의 황제들이 소환술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클레멘츠는 능숙하게 대악마를 불러냈다. 게다가 그날 밤…… 내가 실수로 불러낸 마수를 끝장내던 힘. 늘 목을 가리는 옷에 감춰진 붉은 문신. 달이 뜨는 밤이면 기승을 부리는 요요하고 위험한 분위기.
“……모르겠어요, 2황자님. 이런 건 황태자 전하께 직접 묻고 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묻는다고 알려 줄까?”
왠지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