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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96)화 (96/218)

96화

반면 나는 멍했다. 뭐라 할 말도 없어서 두 눈만 깜박였다.

예? 신수요? 제가요?

“극단적인 경우, 정말 아다만티스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오필리어.”

“그, 그러니까…… 그건 극단적인 경우죠?”

왠지 모르게 성대 부근의 문양이 가려웠다. 드레스와 감을 맞춘 연녹색 목걸이 너머로 괜히 그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내 손가락으로 메디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성장하고 싶나요, 오필리어? 날개를 얻어 황궁을 벗어나고 싶기라도 한 걸까?”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싶어요. 어차피 저주는 풀릴 거고…… 앞으로 딱히 극적인 심경 변화도 없을 것 같고.”

클레멘츠는 내 저주를 온전히 풀어 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난 지금까지처럼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몰아치는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건 창작물을 통해 접하는 남의 이야기로 충분했다.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메디프는 태도가 달라졌다. 분명 종전까진 가볍고 유했는데, 어딘가 집요하게 날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친절하고 매력적인 미소는 잃지 않은 채였다.

“건국 신화 속에서 현왕 유스티온은 신조의 선택을 받아 황제가 되었어요. 만약 당신이 정말 아다만티스라면, 당신이 누굴 선택할지가 중요한 쟁점이 될 것 같은데.”

주변엔 이미 방음 마법이 걸려 있지만,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달콤하고 크나큰 비밀을 전하는 듯했다.

“좀…… 진정하실래요? 황자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메디프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없긴 왜 없어요.”

청보라 색 눈이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누굴 선택하겠어요? 상상 속에선 뭔들 못 하나요.”

“아, 아무도 선택 안 해요.”

혼자 즐거워 보이는 메디프를 보니 갑자기 반감이 생겼다. 꼭 자기와 클레멘츠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 같잖아. 형제가 쌍으로 날 곤란하게 하던 무도회 때가 생각났다.

“……혼우드의 모나한 백작 영애를 선택하겠어요.”

그래서 영 엉뚱한 사람을 불렀다.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메디프의 하늘색 눈썹이 훅 올라갔다.

“그게 누구죠?”

“제 주군이에요. 아니, 이젠 아니지……. 그래도 친구예요.”

“그것도 재미있는 선택이군요. 하지만 심경의 변화 없이는 그 친구에게도 신조가 아닌 병아리의 선택만을 줄 수 있을 뿐이겠죠.”

“그…… 심경의 변화.”

그 부분이 제일 억울했다.

“저는 이미 다 자랐어요.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뿐인가. 저번 생에도 이미 성인이었고, 빙의하고도 8년이나 지났다.

“그런데 굳이 무슨 심리의 변화를 꾀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하는 거죠, 왜?”

“진정해요. 의외로 답은 쉬울 수도 있어요. 경험해 보지 않은 걸 하나씩 해 보는 거죠.”

유려한 말투에 내 마음은 또 혹했다. 그게 어떤 거냐고 바라보는 나를, 그는 또 한 번 씩 웃으며 도발했다.

“사랑은 어때요?”

“예?”

“아무라도 좋으니 사랑해 봤어요? 인간을 변화시키는 건 인간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백작 영애를 사랑하겠다고 대답할 순 없겠지.”

내가 모태 솔로라는 점을 이런 식으로 공격해 들어오다니.

안 해 봤던 연애를 한다면 확실한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되기야 할 것이다. 그게 성장으로 이어질진 알 수 없지만.

문제는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이는 이 남자였다.

“이왕이면 잘생기고, 유쾌하고, 마법도 잘 쓰는 사람이 좋지 않을까요?”

나는 첫째로 깨달았다. 메디프는 본인이 잘생겼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깨달았다. 지금 이거 무슨 뜻이지? 역시 나를 유혹하는 것인가?

‘사양할래요. 그냥 벨라를 사랑하는 게 낫겠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입이 안 벌어졌다. 세 번째로 깨달았다. 나 당황했구나.

하지만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음산한 기운이 스멀거렸다. 고개를 돌리니 클레멘츠가 있었다.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방해꾼이 왔네요. 메디프가 작게 속삭였다.

뭔 소리래. 형 보고 방해꾼이라니 아주 버릇이 없었다. 전생의 남동생이 생각나서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메디프 황자님께 마법 상담을 받고 있었어요!”

“그런 것 같군.”

클레멘츠는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훑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끝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곤 내 쪽을 향해 필요 이상으로 허리를 기울인 메디프 쪽을 보았다. 과연 눈치는 빠르다. 슬슬 본론이 끝난 메디프가 제 버릇 못 버리고 치근덕대고 있었다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근데 왜 저렇게 화났지?

“안녕하세요, 황태자 전하.”

메디프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며 빙글거렸다.

“한가한 모양이구나, 메디프.”

“그럴 리가요. 오필리어에게 못 들으셨습니까? 제 개인 업무 외에 시간을 내서 마법 상담을 해 드리고 있었는데요. 애먼 남작 영애의 돈을 떼먹지 말라고 하신 분은 전하 아니십니까?”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돌아가는 혀였다. ‘오필리어’라는 말을 들을 때 클레멘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점점 표정이 안 좋아졌다. 형제 사이가 많이 안 좋구나.

눈치를 보다가 일어났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도서관엔 자주 오세요?”

“자주 오지 않는다. 널 찾으러 왔어.”

잉? 저요?

당연히 도서관엔 책을 찾으러 오는 거 아닌가?

“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기에 와 봤다.”

“아…… 그러시구나?”

물론 병아리가 이 시간이 흐르도록 실종이라면 그거 큰일이지만, 애당초 사람 모습으로 황태자궁을 나섰는데? 잘못 듣고 왔나?

“……하.”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가지.”

클레멘츠의 눈에는 사람을 복종시키는 힘이 있었다. 당연했다. 평생 지배자로 살아온 데다, 마물과 악마들마저 그에게 순종했으니.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꾸준히 깐족대어 온 병아리는 고압적인 눈빛에도 내성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말해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어디로요?”

“황태자궁.”

“갑자기요? 황태자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유렌과 카렌이 저를 찾나요? 아니면 글로리나 부인이?”

“…….”

“조금 더 있고 싶은데…….”

클레멘츠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얌전히 따라가도 되지만 이렇게 뻗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메디프와 마법 세션이 끝나고 나면 1층으로 내려가 로맨스소설 코너를 반드시 스캔해야 했다.

하지만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고 있는 메디프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왜 저러는진 모르겠지만 장단 맞춰 주기 싫군.

“2황자님, 어쩌죠? 가 봐야겠어요. 아무래도 황태자궁에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크흡…….”

그는 애먼 책 대신 제 소맷자락을 구기며 웃음을 참았다. 클레멘츠의 차가운 눈길이 내리꽂혔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이만할까요? 나머지는 다음에 하면 되니까.”

메디프는 예의 능청스런 웃음을 지었다.

“다음엔 오붓하게 집중할 공간이 필요하니까, 제 탑으로 초대할게요. 우리만 아는 연락 수단으로. 알겠죠?”

종이학 편지지를 말하는 거였다.

그걸 뭘 그렇게 비밀 얘기하듯이 해?

잘은 모르겠지만 클레멘츠를 도발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래 봤자 그를 이런 걸로 도발할 수는…… 있구나. 클레멘츠의 주변만 온도가 뚝 떨어진 것 같았다.

“하하, 네. 가요, 전하.”

일단 그를 떠밀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클레멘츠는 이미 내가 메디프에게 저주 해제를 의뢰했단 걸 알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걸까?

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클레멘츠는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병아리 지킴이. 병아리인 나를 너무도 좋아했다.

그런데 마성의 병아리인 나는 툭하면 위험에 휩쓸렸다. 여기 납치되랴, 저기 끌려가랴.

그때마다 부리나케 달려가 날 구해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가.

여태껏 그 습관이 남아서, 그만 내가 인간인 상태로 어딘가에 오래 붙잡혀 있어도 똑같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구하러 오는 거다. 말하자면 몸이 익숙해져 버린 거지.

고작 병아리를 갖고 너무 과하긴 했지만, 그만큼 책임감을 다해 날 지켜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젠 나에 대한 과도한 걱정을 한 짐 내려놓을 때였다. 다 큰 인간을 아직 병아리인 것처럼 염려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지.

“전하.”

바짝 따라붙은 나는 어른스러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아마 굉장히 든든해 보일 것이다.

“걱정 말아요. 저는 어디 가지 않아요. 이렇게 가까이에 꼭 붙어 있을게요.”

“……!”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동요하는 눈빛이 선연했다. 역시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암, 내가 클레멘츠는 잘 알지. 소설 속에서부터 얼마나 지켜봤는데.

“너 그게, 무슨…… 지금.”

드물게도 그는 말을 더듬었다. 백옥같이 매끄러운 피부에 옅은 홍조까지 보였다.

바로 웃으면서 기뻐할 줄 알았는데, 왜……? 아.

아무래도 내가 지금 여자로서 들이대고 있다고 오해한 것 같다.

그야 날 향한 호감은 병아리 상태에 국한될 뿐이니, 그의 입장에선 곤란하다 못해 뜨악스러울 것이다. 클레멘츠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잘 알지.

말을 더듬고 얼굴까지 붉어지는 걸 보면 그 정도로 수치스럽고 싫은 모양이다.

“전하의 계약 병아리로서 책임을 다해야죠!”

병아리 얘깁니다, 병아리요! 자존심 상하니까 그렇게 질색하지 말아 주세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게 아닌 것 같은데…….’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음 소거해 버렸다. 자의식 과잉 상자의 말을 들었다간 나중에 나 혼자 부끄러울 뿐이다.

“…….”

“다른 곳에서 병아리 스카우트 제의가 와도 거들떠도 보지 않을게요. 저를 사육할 수 있는 사람은 전하뿐이에요.”

베일리스에게 가지 않을 거냐고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클레멘츠는 혼이 털린 듯한 모습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 그럼 그렇지.”

왜 저러냐? 기껏 저 생각해서 잘해 주고 있는데.

역시 남자들은 너무 예민하다. 맞춰 주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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