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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94)화 (94/218)

94화

하지만 용감하게 펜촉을 갖다 대기 전에 눈이 떠졌다.

“헉.”

뭐 이런 개꿈을? 많이 피곤했나 싶어 다급히 일어났다.

“어?”

본모습을 되찾은 육신이 느껴졌다. 멍하니 내려다본 손은 개꿈이었다는 걸 증명하듯 희멀끔했다. 적막 속에서 햇살이 내려앉았다.

“지금이 몇 시지?”

내가 꾸벅꾸벅 조는 바람에, 메이드들이 클레멘츠의 집무실로 데려가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눕혀 둔 모양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클레멘츠는 아침 업무를 끝내고 황태자궁 밖으로 나가 있을 시간. 답 없이 늦잠을 자 버렸다.

갑자기 인간이 된 건, 아마 꿈속에서 클레멘츠의 얼굴에 매직으로 낙서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원해서’인 것 같다.

꿈속의 바람까지도 해당되는 거였다니. 도대체 기준을 알 수 없다. 불과 그저께, 카렌이 가져다 두었던 책에 손이 닿지 않아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발!’ 하고 간절히 빌었을 땐 안 됐으면서.

역시 하루 빨리 메디프의 저주 해제 솔루션을 받아야만 해.

생각난 김에 창문 밖을 확인해 보니 메디프의 쪽지가 와 있었다.

오전에 2황자궁으로 만나러 오라는 간결한 메시지였다. 다행히 아직 아슬아슬하게 오전이니, 그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2황자궁은 황태자궁보다는 한적하고 아담했다. 황궁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높다란 탑이 눈에 띄었다.

“레이디께서는?”

초행인 티를 팍팍 내는 내가 수상해 보였는지, 정문의 경비병이 날 불러 세웠다.

게다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까지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잘만 문을 통과하고 있는데, 나만 도중에 붙잡혔다.

다시 보니 다른 이들은 나보다 훨씬 번듯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꼭 파티에 가는 것처럼.

설마 지금 나 무시당한 건가?

프릴과 리본이 잔뜩 달린 것을 들어 보이는 유렌을 말리고, 대신 장식이 적은 연녹색 드레스를 고른 게 실수였다. 여긴 황궁인데. 세상의 온갖 공작새들이 모여드는 곳.

대치가 길어지자 문의 다른 쪽 옆에 있던 경비병도 재미있다는 듯 이쪽을 응시했다.

“실례지만 어느 분을 뵈러 오셨는지요?”

그들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지나가던 이들도 이쪽을 흘깃거렸다.

원작의 벨라도 황궁에서 무시당하긴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황태자가 데려온 여자로 얼굴이 알려졌고, 적어도 백작 영애다운 드레스를 입고 다녔으므로.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핸드폰을 꺼내서 2황자궁 평점 테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누군지 여기서 밝힐 의무는 없고요. 지금 당장 2황자 전하와 약속이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당신들이 붙잡아서 늦을 것 같네요.”

나는 무려 너희의 고용주를 고용하신 몸이다. 설마 여기서 버티다가 황자를 기다리게 만들진 않겠지?

“그,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뭐여?

행색이 소박해서 무시하던 참에 ‘황자와 직접 약속을 잡았다.’라고 하면 퍽이나 믿어 주겠다 싶었다. 어느 정도 비웃음 당할 것도 각오했는데 너무 순순히 물러난다.

말 한마디에 태도 고칠 거면 애당초 뭐 하러 무례하게 굴었지?

의문이 남지만, 고개 숙이는 그들을 최대한 야멸차게 째려보며 들어섰다.

2황자궁의 정원은 황태자궁보다는 작았지만 그만큼 우아한 맛이 있었다.

저 이질적인 탑에서 연구를 하고 있거나 지나다니는 레이디들에게 추근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메디프는 홀로 산책 중이었다.

“잘 잤어요?”

오전 햇살을 받으며 잘 잤냐고 인사하는 하늘색 머리의 미남이라…….

참 좋기야 한데, 인사말이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나. 물론 헤어진 시점이 어젯밤이긴 했지만.

“제 얼굴을 보면 조금 감이 오실 텐데요. 한숨도 못 잤답니다.”

“와, 저와 헤어진 뒤에 밤잠을 설칠 만한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괜히 찔린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보단 이제부터 200크로나의 본전 이야길 해 볼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고객님.”

일단 메디프와 함께 가볍게 정원을 돌았다.

“그런데요.”

천막 속 마법사의 정체가 메디프란 걸 알자 걸리는 점이 생겼다.

“저주는 적마법에 속하지 않나요? 2황자님은 청마법사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주를 푸시겠다는 거죠?”

“지금 마탑도 인정한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메디프는 쿡쿡 웃더니 대답했다.

“좋은 지적이네요. 물론 저주와 소환은 적마법에 속해요. 원래라면 적마도사가 푸는 게 이상적이죠. 이를테면 당신에게 저주를 건 술자라든가.”

클레멘츠. 그리고 적마도사. 두 단어를 한데 놓으니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마법이라면 일단 흥미를 가지고 배웠기 때문이에요. 마법 생물학도 마찬가지.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실력이 있다고 자신할 분야는 청마법뿐이네요.”

천막 안에 있던 사랑의 묘약이나 탈모 약은 적마법의 비법서대로 만든 거였다.

적마법은 구도와 깨달음을 통해 다가갈 수 있는 힘. 비법서의 방법을 모두 지켰어도 효과를 보장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런 모호한 것에 의지하는 마법이기에 이 시대에 이르러선 쇠퇴했고.

“하지만 저주는 당신이 천막에서 보았듯, 분명한 마력의 형태가 잡혀 있죠. 그러니 기술적으로 마력을 다루는 청마법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거예요.”

메디프는 청보라 색 눈을 찡긋거리며 덧붙였다.

“일종의 편법이죠.”

“그렇군요.”

과연 마탑이 인정한 마법사 메디프. 청마법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마법의 분야를 넘나드는 유연함까지 갖추었다.

그야말로 날 위한 맞춤 마법 서비스 같달까. 갑자기 200크로나가 아깝지 않았다.

메디프는 흡족해하는 나를 에스코트하여 정원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제 저주에 균열이 나 있다고 하셨죠. 그럼 그 균열을 통해서 우선, 원할 때마다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처음 닉타와 메라에게 저주를 받은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꿈에 나타나 ‘간절히 염원하라.’라고 말한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니 폭 한숨이 나왔다.

“간절히 원하면 된다는데, 이게 또 어쩔 땐 그냥 되고 어쩔 땐 원해도 안 된단 말이에요. 자유자재로 변할 수만 있다면 이 저주도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을 텐데.”

내 이야기를 듣는 메디프는 과하다 싶을 만큼 눈을 반짝였다.

“그럼요.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듯하군요.”

그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댔다. 달콤하게 날 향하던 초점이 갑자기 탈출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안개의 숲에서 마주친 마물들이고, 이름은 밤과 낮이라…….”

뭐야. 왜 저래. 무서워.

갑자기 학자다운 광기로 가득했던 아카데미의 산드라 총장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메디프를 탐내던데. 스승과 제자가 이런 식으로 닮게 되나?

“또,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이왕 200크로나나 냈으니 당신의 전속 마법 컨설턴트라고 생각하세요.”

“정말요? 그러면!”

마침 그 산드라 총장이 날 보며 제기했던 의문도 같이 떠오른 차였다.

“단순한 새가 아니라, 어쩌면 새끼 마수가 아닐까요?”

“제가 변신한 모습이…… 어떤 종(種)의 새끼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메디프의 천막에는 분명 ‘마법 생물’이란 종목도 붙어 있었다. 방금 자기 입으로 마법 생물 공부를 했다고 하기도 했고.

“산드라 총장님이 그러셨거든요. 제가 혹시 마수는 아닐지 싶다고.”

“…아, 모르시나 보군요.”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메디프가 뜻 모를 대답을 하고 미소 지었다.

무슨 뜻이지, 이거?

원작에서도 메디프는 대체로 친절하고 유했지만, 때때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클레멘츠 지지자들은 과연 흑막 황비의 아들답게 속이 시커멓다며 그를 몰아갔다.

클레멘츠 지지자.

그렇다.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

하지만 직접 보고 판단해 보니 그런 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니었다.

메디프는 오히려… 마법 장사를 해 보고 싶었다며 바가지 씌운 물건들을 팔다가 온종일 공치는 노점 마법사.

5분 만에 들통날 거짓말로 자신을 ‘메디프 페리윙클’이라고 소개하는 황자.

그리고 아카데미 마법학장이 호시탐탐 노리는 예비 노예였다.

천 년 묵은 뱀처럼 음흉한 클라우디아를 따라가기엔 아직 멀었지.

“뭐, 좋아요. 무려 마탑의 선택까지 받은 저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죠.”

한껏 뻐기는 말투 탓에 풉 웃음이 나왔다. 팔짱을 끼며 마주 서는 그의 재킷에서 마탑의 마법사 배지가 보란 듯이 반짝였다.

저 배지는 거의 그와 한 몸이었다.

“마법 분석엔 풍부한 자료가 중요한 법이죠. 황궁 도서관에 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원래 도서관엔 동물 못 들어가잖아.

“잘됐네요. 거기서 나머지 얘길 진행하도록 할까요? 방해꾼 등장도 사전에 차단할 겸.”

“방해꾼이요?”

“황태자궁엔 2황자궁으로 온다고 하고 나왔겠죠?”

“그렇죠.”

유렌에게 말해 뒀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클레멘츠에게도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메디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날 이끌었다.

황자궁 입구엔 방금 전 마주쳤던 근위병들이 보였다. 그들은 메디프와 함께 지나가는 날 보고 얼어붙어 있었다. 애매하게 고개를 숙이고 눈조차 못 마주치는 모습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무시하지 마세요.

“저들이 혹시 오필리어, 당신에게 무례한 짓을 했나요?”

입구를 벗어나 조금 걷자마자 메디프가 물었다.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 덮어 놓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음, 그 정돈 아니에요. 아주 작은 실랑이가 있었을 뿐. 사소한 일이에요.”

“그랬군요. 알았어요.”

다행히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길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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