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적어도 이 문양을 본 사람은 오늘 밤에는 그밖에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작고 절박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문양 근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가 또 무섭게 봤나?”
“……전, 전하.”
목소리가 나오자 그의 손에까지 간지러운 진동이 전해졌다.
“너도 알게 되겠지. 결국은 누가 더 네게 나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그는 몸을 굽혀 속삭였다. 시처럼 우아하고 나직한 소리였다. 깊은 목 울림으로 전해지는 운율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γλυκιά φωνή σου το γέλιο.”
창틀에 놓은 랜턴의 불빛이 내리깐 은빛 속눈썹을 따스한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내려 쌓인 눈을 깎은 듯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저 뺨을 만지면 눈 녹은 물이 배어 나올까. 오필리어는 비현실적으로 고운 얼굴에 손을 대고 싶다가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진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η φωτιά καίει κάτω από το δέρμα μου.”
클레멘츠의 코끝은 그녀의 턱에 닿을 듯했다. 뒤로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클레멘츠의 손이 이미 먼저 그녀의 등을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δεν μπορώ να δω τίποτα.”
마지막 주문을 외는 숨결이 오필리어의 목을 간질였다. 그는 끝으로 머리를 살짝 틀어, 그녀의 문양에 입을 맞추었다.
“아……!”
가만있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파득거리며 급히 밀었지만 클레멘츠는 느긋하게도 밀려났다.
“뭐 하신 거예요?”
속삭이는 그녀는 눈에 띄게 숨이 흐트러졌다. 사랑스러운 얼굴은 랜턴의 흔들리는 불빛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조차 없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뭐라고 생각했는지 되돌아보았다.
사랑스러운 얼굴.
오필리어는 사랑스러웠다. 그의 침대 위에서 인간이 되었을 때부터, 언제나.
한때는 병아리일 때와 인간일 때를 일부러 구분 지으려 한 때도 있었다. 귀엽게 파닥거리는 솜뭉치이다가, 갑자기 인간으로 돌아와 올곧은 눈빛을 보낼 때면 왠지 시선을 마주치기조차도 곤란했다. 평소대로 천연덕스럽게 귀여워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는 병아리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병아리일 때보다도 더.
손뿐이 아니라 모든 부분이 작고 사랑스러웠다. 얼굴을 붉히며 속삭이는 모습은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을 하고, 계약만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날 것이다. 어디든 자유롭게 오갈 것이다.
그건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다.
클레멘츠는 엄지손가락으로 다시금 문양을 쓸었다.
“곧 알게 될 거다.”
양각 도장으로 누른 듯, 불그스름히 패어 있던 선 안쪽으로 자수정 빛이 선명히 채워졌다. 채워진 색은 별을 품은 밤하늘처럼 은빛을 머금고 천천히 생동했다.
오필리어의 목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남긴 흔적이었다. 그제야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초커를 다시 채워 주었다.
“목걸이는 계속 하고 다니도록 해라. 그래야 할 테니까.”
* * *
무도회는 이른 새벽에야 끝났다.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아오자 마치 발끝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어머, 오필리어 님!”
유렌과 카렌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무 시간을 한참 넘겼음에도 메이드들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저희 예상보다도…….”
역시 이들은 드레스에 대해 미리 언질 받은 모양이었다.
“어떠셨어요? 무도회는요? 춤을 추셨나요?”
“꺄아! 추셨다면 누구와?”
둘은 서로 손을 잡고 꺅꺅거렸다. 늘 그렇듯 귀여웠지만…….
“둘이 알고 있었군요.”
“네? 아아!”
동그란 눈을 뜨고 있던 유렌이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필리어 님께는 비밀로 하라고 하셨어요.”
“깜짝 선물이라니, 그렇게 낭만적인 분이실 줄은 정말 몰랐지 뭐예요.”
“마음에 드셨어요?”
메이드들의 어딘지 익숙한 눈빛, 저 표정, 저 말투, 저 정서. 나는 그것이 왜 익숙한지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벨라가 클레멘츠와 잘되길 바라던 내가 꼭 저런 눈을 하고 있었겠군.
그럼 유렌과 카렌 역시 그렇단 말인가? 나랑, 누구를……. 역시 클레멘츠인가? 대체 왜 그런 듣도 보도 못 한 주식을 사 버린 거람?
카렌이 유렌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배시시 웃었다.
“꼭 물어봐야 아나요? 오필리어 님의 얼굴을 좀 봐요. 한껏 즐기고 오신 게 분명해요.”
“어머! 그렇군요!”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이렇게 컸을 줄이야. 병아리일 때는 병아리라서 잘 들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오해람? 미물과 황태자의 주식을 사다니. 직업 만족도가 높다곤 하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저들을 저렇게 만든 걸까? 측은하도다.
…아니, 그런데 영 엉뚱한 주식이라고 느끼기엔 아까 그의 눈은…….
겉의 드레스와 장갑, 구두만 벗은 뒤 그들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이만 가 보셔도 돼요.”
“오필리어 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번에도 역시 카렌이 유렌의 어깨를 톡톡 치며 고개를 저었다. 유렌은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곧 그들은 행복한 얼굴로 인사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오필리어 님.”
뭔 생각 하는데? 왜 그렇게 입꼬리가 실룩이는 거람. 대체 어디서부터 오해를 정정해 줘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혔다.
“내 얼굴이 어떻길래 그러지?”
문이 닫힌 뒤, 제 용도로는 퍽 오랜만에 쓰이는 화장대 앞에 가까이 앉았다. 메이드들이 밝혀 두고 간 조명 덕에, 어딘가 얼빠져 보이는 여자의 낯이 아주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아.”
화장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셨는데 양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지만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쓸데없이 커진 눈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벨라 역시 내 눈은 도대체 감정을 숨기질 못한다고 자주 핀잔을 주었지. 거기다 왠지 바보 같은 표정까지. 누가 봐도 무슨 일 있었던 얼굴이었다.
“오해할 만했네.”
아니, 오해가 아닌가?
무도회장, 특히 2층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메이드들을 미리 내보낸 이유도, 초커를 벗는 순간 그들이 뭘 보게 될지 두려워서였다.
목걸이는 계속 하고 다니라고? 그래야 할 거라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아, 젠장!
고개를 저어 이런저런 상상을 떨쳐 냈다. 헤어밴드를 화장대에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그 뒤 목 뒤로 손을 뻗어 하늘색 띠 모양의 목걸이를 풀어냈다. 그리고 거기엔…….
“……예쁘다.”
성대에 새겨진 여섯 꽃잎 문양의 윤곽선을, 은 펄을 부은 듯 은은히 빛나는 보라색이 남김없이 채우고 있었다.
뭐죠, 전하? 이렇게 예쁜 거라면 그냥 드러내 놓고 다녀도 되겠는데요. 패션 타투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2% 부족하던 내 문양이 완성돼 버렸는데?
“왜 가리고 다니라고 한 거지?”
의문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이 황홀한 빛깔이 어떻게 채워졌는지 기억났다.
‘γλυκιά φωνή σου το γέλιο.’
내 품에 안기듯 푹 숙여 나직이 고대어를 속삭이던 모습이, 이어서 와 닿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안 그래도 넋 나가 있던 거울 속 얼굴이 이번엔 주체할 바 모르고 붉어졌다.
“아악!!”
연약한 거울에 주먹질을 하지 않기 위해 거울의 모서리를 양손으로 꽈악 움켜쥐었다. 내친김에 차가운 거울에 돌진해 김이라도 날 듯한 이마를 식혔다.
“미쳤나 봐. 미쳤지. 돌아 버린 인간!”
병아리에게도 다크서클이 있을까? 일어나자마자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있다면 지금 내 눈 밑에 짙게 깔려 있을 테니까.
일단 드러눕기로 마음먹고 자리에 뻗었을 때부터 거의 동트기 직전까지, 클레멘츠가 했던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무슨 의미지? 설마? 설마? 나에게 반한 것인가?
알고 보니 어떤 기적적인 경로로 인해 병아리가 아닌 인간 오필리어에게조차 애착의 감정을 느껴 버렸나?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남자랑 춤추는 게 싫다고까지 했잖아. 그럼 어떡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은 그와 3남 2녀를 낳고 노년에 세계 일주까지 떠나고 있었다.
피곤에 절어 제정신이 아닌 몸과 들떠 있는 정신이 벌인 환장의 콜라보였다.
다행히도,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몸이 다시 병아리로 변하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계약 병아리일 뿐인데, 그런 모호한 말과 행동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여러 모로 피곤하다.
“삣끽.(후우, 자의식 과잉 상자.)”
그런데도 생각이 거기까지 급발진하다니.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역시나, 다시 점검해 보니 나의 자의식 과잉 상자가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삐욧!(정신 차려!)”
튼튼한 날개로 내 뺨에라도 스윙을 날렸다. 그리고 더 크고 넓고, 깊은 마음속의 상자에 ‘혹시 클레멘츠가 날 좋아하나? 왜, 저번에도 이랬고…….’로 시작하는 생각들을 꽉꽉 욱여넣고 튼튼하게 탕탕 못질했다.
후, 이제 됐다.
조금 기다리자 평소처럼 메이드들이 들어와 뽀득하게 광을 내고 아기자기한 장식을 매달아 주었다. 그 능숙한 손길에 몸을 내맡기다 보니 설쳤던 잠이 다시 쏟아져,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아직 나오지도 않은 ‘황녀님은 꾀병쟁이야’ 7권을 넘기고 있는데, 손등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건 클레멘츠 때문이다. 그가 내 손등에 입 맞추었기 때문에.
아니, 문양에 색깔 넣는 것까진 봐줄 만하지만, 손등은 이게 뭐야. 멍든 것도 아니고.
마침 가까운 곳에 클레멘츠가 있었다. 나는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유성 매직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흥, 반드시 이 두 손으로 네 윤기 나는 피부에도 멋진 그림을 그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