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남겨진 이들에게 황태자는 명했다.
자신과 그 여자가 내려오기 전, 누구든 이 계단을 올라오려 하는 자는 베어 버리라고.
그런 뒤, 그 여자가 밟고 올라간 계단을 뒤따랐다. 천천히, 후끈대는 열기와 요란한 빛을- 절정으로 치닫는 연회를 등지고 달가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요한 가운데 바지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클, 아니 전하? 여기 너무 어둡지 않나요? 조명이 될 만한 게 없나 찾고 있어요.”
그는 명랑한 목소리가 꺼내다 만 ‘클-’의 뒷말이 아쉬웠다. 그녀가 그대로 헷갈려 불러 버리고 만다면, 그도 모른 척 지적하지 않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어쨌든 오필리어의 말대로였다. 이 층의 회랑을 따라 즐비한 커다란 창문들은 낮에는 충분한 광원이 되어 주지만, 지금처럼 완연히 저문 밤에는 암흑에 싸여 있다는 느낌만 더해 주었다. 무도회가 한창인 아래층에서 바스라져 뿌려진 불빛만이 오필리어의 윤곽을 비추었다.
그 모습에 클레멘츠의 눈길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허무한 빛 조각도 귀신같이 잡아채, 필요 이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기가 찼다. 단지 머리 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좋은데.”
“……그래요?”
실로, 클레멘츠는 이 어둠 속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광활한 아래층에 비하면 비좁기까지 한 공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스스로조차 의아함을 느낄 만큼 들떴다. 귀에 거슬리던 음악 소리마저도 충분히 멀리서 전해지니 괜찮게 느껴졌다. 그는 맑은 어둠을 자유롭게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원래…… 어둠의 자식이신 편? 어울리시긴 하죠. 네.”
그는 엷게 웃었다. 여자의 목소리에 깃든 미미한 떨림을 어렵지 않게 잡아챘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톡톡 던지는 여자는 재미있었지만, 그보단 당장 해야 할 만한 질문을 했다.
“너는 어떻지? 무섭나? 어두워서.”
“허! 저는 어른이라고요. 누굴 불도 못 끄고 자는 어린애로 보시나. 당연히…….”
낯선 공간이 어두우면 무서울 만도 한데. 대체 어떤 부분에 도발당한 건지. 스스로 열을 내며 일어서던 여자가 휘청거렸다. 클레멘츠는 두어 발짝 떨어져 있던 그 형상을 얼른 붙잡았다. 어두운데 급히 움직이려다 치맛자락이라도 밟은 모양이었다.
조심 좀 하지.
그는 영문을 모를 만큼 다급해졌다. 원래도 덤벙대지만, 혹여 너무 멀거나 늦어 그가 붙잡아 주지 못했다면 다쳤을 게 아닌가.
“저,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그녀의 눈이 살풋 찌그러진 클레멘츠의 수려한 눈썹을 살폈다. 그 시선을 인지한 것만으로도 그의 눈매는 누그러졌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에 오필리어의 손이 잡혔다. 그가 아직 오필리어의 양팔을 붙들고 있어, 그녀의 손이 속수무책으로 그의 옷소매를 건드렸다. 장갑을 낀 손가락이 짙은 색의 소맷자락 위에서 하느작거렸다.
저 손이 갑자기 너무도, 너무도 작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의 손에 비하면 작고 약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재앙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좋지?
저런 약한 손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과 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떠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를 접견하고 검을 휘두르고 서류를 뒤적이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넓고 오필리어의 손이 너무 작다는, 이미 일어나 버려 뭘 어찌할 수도 없는 재앙이.
“전하?”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였다. 오필리어가 손을 물리자, 그 손을 잡아채고 싶다는 충동이 파도쳤다. 그는 그 충동이 비이성적이라는 걸 간신히, 아주 간신히 알아챘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그 말에 오필리어는 딱 봐도 찔리는 게 많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유쾌해졌다. 동시에 재앙이 그의 머릿속에서 한계를 모르고 크기를 불렸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라서, 오필리어가 오롯이 무사히 그의 앞에 있는 지금에도 그는 대책 없이 불안하고 언짢았다.
“그게 그, 옷이요…….”
“옷?”
“네에. 이거- 머리띠랑, 목걸이랑, 구두랑.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거죠?”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찔리는 것들 중 그나마 위험 부담이 적은 화제를 고른 게 분명했다. 오필리어에겐 유감이지만, 클레멘츠는 의상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래. 할 말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 감사해요. 너무 과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단 근사하기도 하고요. 덕분에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을 때 덜 곤란했고요.”
어떻게 했냐고.
황궁임을 고려해 위험 부담을 최소화한 채 위계는 낮고 약하지만 손재주는 좋은 악마를 찾아내고, 메이드들을 시켜 치수를 재고, 그녀가 원하는 소재를 고르게 하고……. 그는 그런 너저분한 절차를 주절주절 외울 셈이 없었다.
“어떻게 했든, 입고 다른 남자와 춤추라고 마련해 준 것은 아니지.”
다만 번잡한 밤이 끝나면 춤을 춰 볼 생각이었다.
그의 손이 마침내 오필리어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당연하다는 듯한 접촉이었다.
“네 파트너는 나였다는 걸 잊었나?”
“아, 아직도 그 소리세요? 진심이세요?”
“응.”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래층에서도 무도회가 재개된 듯, 느릿한 춤곡이 아득히 울려 퍼졌다. 오필리어도 얼떨결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클레멘츠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예쁘군, 후회될 정도로.”
오필리어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가 입히고 데려온 이 여자를, 동생이 잡아채듯 데려가 사람들 앞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상상보다도 더 반짝이는 모습으로 그 품에서 춤사위를 빚어내던 오필리어를 떠올리자 다시 속이 끓었다. 그 열을 토해 놓지 않곤 견딜 수 없었다.
그 애의 것이 아니다. 내게 속했다. 누구에게인지도 모른 채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이 두 손으로 저 옷을 다시 벗기는 편이 그 증거라면 하고 싶었다. 미쳤다는 소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품 안의 체온이 바르작거렸다. 그가 더 강하게 제 품에 가두자 여자는 어쩔 줄 모르다가 입을 열어 항변했다.
“저도 얼마나 놀랐는데요! 갑자기 사람이 됐는데 못 보던 옷을 입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
“애당초 무도회장에 데려온 것도 전하시고, 있는 장소에 어울리게 춤이라도 춘 것뿐인데 왜,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 거예요!”
“그런 눈?”
클레멘츠는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움찔대는 손을 제 뺨 옆으로 가져갔다. 반쯤 충동적으로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어떤 눈으로 널 보고 있는데?”
“……!”
오필리어에겐 다행인 일이었지만, 클레멘츠는 어둠에 묻혀 버린 사위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들었다. 놀라 허둥대는 기색은 충분히 느껴졌지만, 저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무섭잖아요.”
“……무서워?”
“아니, 이, 이상하잖아요. 왜 저를……. 이러실 거면 차라리 다시 병아리로 되돌려 주세요.”
“내가 왜? 누구 좋자고.”
허겁지겁 주워섬긴 말은 물론 통하지 않았다. 우물쭈물대다가 항변을 포기해 버린 오필리어는 도피해 버렸다.
“앗, 등불이에요!”
클레멘츠의 등 뒤편 창문. 어둠에 눈이 익자 그 창턱에 놓여 있는 랜턴이 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지원병이라도 만난 양 랜턴을 향해 달려갔다.
“어휴. 어두워서 혼났지 뭐예요.”
괜히 호들갑을 떨며 성냥을 그어, 유리 랜턴 안쪽에 있는 초에 불을 붙였다. 온전한 어둠보다는 약간 나은 조그만 불빛이 그들 사이를 둥글게 밝혔다.
어둠 따위 무섭지 않다고 조잘대던 조금 전의 과거는 다 잊어버렸는지. 그의 품을 벗어나 피한 곳이 겨우 이까짓 등불 옆이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등불을 놓고 안심한 듯 웃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런 모습을 동생에게도 보였을까. 축제 날 꽤 오래 들어가 있었던 천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클레멘츠는 영영 알 길이 없었다.
“그래, 메디프에게 의뢰를 했다고.”
“……!”
오필리어는 겁을 먹은 듯 얼굴을 굳혔다. 모든 것이 마음에 찼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했어?”
“……!”
“그래서 그놈이 풀어 주면, 떠날 셈인가? 계약이건 뭐건, 뒤도 안 돌아보고?”
“아, 아뇨! 아뇨 아뇨. 계약은 계약이죠. 제가 어떻게 전하와의 약속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겠어요? 국법이 지엄하거늘! 하하!”
지그시 바라보자 난감한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저주가 어떻게 되건 계약 기간은 꼭 지킬게요!”
“……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짧은 1년이 끝나고 나면 정말로 미련 없이 떠날 기세였다. 그러나 당장 더 이상 어떤 말로 붙잡는가.
꼭, 동생 놈은 그녀를 자유롭게 해 줄 능력이 있는데, 정작 그는 오필리어에게 단지 붙잡아 끌어내리는 족쇄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한 과거는 얼마나 안일했었나.
하지만…….
그래 봤자 그녀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그 자신이었다. 얼마나 무모한지. 바보처럼 굴다가 어떻게 허를 찌르는지.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반짝임이 어떻게 흐르는지.
“……왜, 또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예요.”
밤과 낮의 마물이 이 사람을 어떤 새로 만들었는지. 저 목소리엔 어떤 힘이 담겼는지.
클레멘츠는 손을 뻗어 오필리어의 목 뒤에 있는 초커의 걸쇠를 풀었다. 놀라 숨을 들이쉬니 하얀 어깨가 들썩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의 여섯 잎 꽃이 마치 귀여운 크로커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