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턱 선 길이에서 잘린 밝은 금발이 부드럽게 빛나며 흔들렸다. 둥근 눈은 순해 보였고, 한순간 활짝 피어나는 웃음엔 보는 이의 마음까지 동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공작새처럼 치장한 여인들 틈에서 언뜻 평범해 보였지만, 평범하지 않았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이들도 한번쯤 소녀를 돌아보았다.
클라우디아의 온화한 눈매 속에서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메디프는 여성과 말을 섞고, 마주 웃고 친분을 쌓는 일을 마치 냇가에 돌 던지듯 장난삼는 아이였다. 또 어느 보잘것없는 집안의 딸에게 자신을 가벼이 춤 상대로 내어 주었구나, 그리 여기고 돌아서면 될 일인가?
그렇지 않았다. 황비는 헛웃음을 지었다.
황당하게도 그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황제의 아들들이 모이더니 퍽 한심해 뵈는 싸움을 벌였다.
‘지금 저 아이들이 뭘 하는 거지?’
저 소녀가 문제인 듯한데.
대범하게 던지는 눈빛이나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수도 사람들 특유의 겹겹이 둘러싼 예의나 규격화된 언어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서부 사람들은 다들 저런 식인가?
소녀는 이질적이었고,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눈에 튀었다. 혹은, 거슬렸다.
‘어디서 저런 맹랑한 게 튀어나온 거야?’
확실히 색다르긴 했으니, 황제의 두 아들이 이끌리는 것까지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름 무도회는 축제의 연장선이다. 하룻밤 즈음 가벼운 여흥이 허락되는 자리. 그러고는 끊어 내야 했다.
설마 황태자가 저런 출처 모를 것에게 홀려 천지 분간 못 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음이 그토록 허술하였다면 일찌감치 그녀의 먹이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클라우디아가 걱정하는 쪽은 제 친아들이었다.
‘이제 놀이는 그만두렴, 메디프.’
이 어미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 볼 때잖니. 황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경하는 여러분, 클라티아의 귀족 분들-.”
무대는 완벽히 준비되었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여기 있습니다.”
황태자가 외출한 날 새벽, 그녀의 뜻을 따르고 온 심복이 익숙한 모양의 가방을 내밀었다. 뒤집어쓴 로브에서 축축한 밤이슬이 떨어졌다.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클라우디아는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틀림없었다. 그녀 자신이 똑같이 짠 두 장의 덮개 중 하나였다. 같은 황실의 문장, 같은 황금색.
“뒤처리는?”
“확실히 했습니다.”
들개처럼 수도를 어슬렁거리며 귀족들의 뒷일을 맡아 주는 건달들이라고 했던가.
대담하게도 황태자의 마차를 열고 물건을 바꿔 쳐 준 일은 고맙지만, 그런 불결한 무리가 황실과 관련되고도 살아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쨌든 청소되었다면 걱정은 덜었다.
그 밤에 클라우디아는 들고 있던 천을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진짜는 불에 타서 없어졌으니, 지금 거울에 덮여 있는 것은…….
“이런 식으로, 흡수 대신 반사 마법을 건 천을 씌워 두게 되면- 거울과 거울 덮개 사이에서 마력의 끊임없는 반사 작용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거울 자체에서 방사되는 마력이 시시각각으로 합쳐져…….”
마법사는 손을 덜덜 떨며 고했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아무리 튼튼한 아티팩트라 해도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반사면이 못 쓰게 되어, 더 이상 거울이라 할 수 없는 형태가 되겠지요.”
황비는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미의 명대로 순순히 공부를 그만두고 황궁으로 돌아왔어도, 메디프는 여전히 마탑에 미련이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제 신체의 일부를 감각하듯 아들의 감정을 읽었다. 그래 봤자 물건 나부랭이인 아티팩트에 집착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을.’
클라우디아가 그 하나뿐인 귀중품을 이용해 황태자를 거꾸러뜨릴 계략을 세웠을 때부터, 그 거울- 카트레프티스는 파괴되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었다. 가장 처절히, 찬란히 부서지도록.
그리고 메디프는 바보처럼 아끼던 거울이 망가진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할 것이고.
그 꼴을 보며 아이는 배우게 되리라. 관심이 있어 잘하고, 잘했으니 칭찬받고, 자신의 소중함이 타인에게도 같은 크기의 의미를 보장받고…….
그런 순전한 세계 따위, 그 애의 인생엔 없다는 걸.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착각하다간 더 부서지고 깨질 뿐임을. 기호와 소망은 우습고, 때로는 진심조차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그 깨달음이야말로 황비 클라우디아가 오랜만에 재회하는 자식에게 주는 진짜 선물이었다.
‘주제를 깨달으렴, 메디프. 모든 게 거기서부터 시작된단다.’
덮개를 걷을 시종이 걸어오는 동안, 클라우디아는 엉망이 된 거울을 보며 어떻게 충격과 공포에 싸인 연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머릿속의 그림은 완벽했다. 망가진 아티팩트, 처참해진 연회장 분위기, 낙담하는 아들과 비틀거리는 자신. 그리고 격노하는 황제.
모든 화살은 즉시 황태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굳이 페리윙클 가문 사람들이 나서지 않아도 괜찮았다. 덮개에 문제가 있단 사실은 금세 밝혀질 테고, 그 부분을 담당한 이가 황태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부군이 어떤 이인지 잘 알았다. 그는 권위에 천착했고, 최소한 그것이 좋은 아비가 되는 것보다 그에게 중했다.
황제 스스로가 제 장자를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 스스로 씌우고 봉인한 덮개에 장난을 쳐, 황제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는 이유겠지. 전후 사정은 알아보지도 않을 테다.
‘만세를 누리소서, 폐하.’
하지만 드러난 건 아무리 봐도 온전한 형태의 거울이었다.
그녀의 입술에 덧그려져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분명, 흡수 마법 대신 반사 보존 마법을 걸었다는 똑같은 천을 황태자의 마차에 넣어 두었을 터였다. 명령을 수행한 황궁 마법사에게 설명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클라우디아는 페리윙클 출신이지만, 마력을 보거나 다루는 능력은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러니 흡수 보존 마법이 걸렸다고 믿고 불태운 천이, 실은 자신이 바꿔 치라고 보낸 반사 마법 덮개일 줄이야 알 길이 없었다.
황태자 역시 청마법에는 문외한에 가까우니 알아채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턱없이 안이했다.
어미의 실패한 음모를 알 길이 없는 황자는 설명에 여념이 없었다. 쇼는 성공이었다. 그녀의 것은 시작도 못 했으니, 아들의 쇼가.
클라우디아는 속에서 일어나는 천불을 평온한 얼굴로 억눌렀다.
‘황태자……!’
은발을 빗어 넘긴 의붓아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섰다. 대마법사들의 장난감 따위에 정신이 팔린 어리석은 귀족들을 내버려 둔 채로. 계책을 되돌려 그녀를 바보로 만들어 두고 잘도 모른 체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곁에는 아직도 그 계집아이가 있었다. 체구도 훨씬 작은 것을 앞세운 채 졸졸 따라가는 게 웃겼다.
‘하, 하하.’
의외로 빠진 쪽은 저쪽이었던 건가.
‘가만있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잠시 생각한 뒤에야, 클라우디아는 병아리가 달고 다니던 리본이 금발 계집애의 것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녀의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한 것도 저 여자아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어디 보자. 어떻게 망가뜨려 줄까요.’
말 한마디 섞지 않고도 이토록 거슬리게 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한류의 바다처럼 찬 눈동자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 * *
혹여 거울에 비쳤다가 엄한 사람한테 병아리인 걸 들키면 큰일이었다. 메디프의 아티팩트 공개식이 진행되는 동안, 클레멘츠의 널찍한 등짝 뒤에 숨어 있었다. 다행히 성질 나쁜 클레멘츠도 저리 가라고 폭언을 내뱉거나 밀쳐 내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기에도, 확실히 무도회에 곁들이기 좋은 볼거리였다. 비둘기 마술 쇼와 대머리 폭로전이라니. 마지막에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흐느끼는 베일리스 후작을 보니 괜히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다.
사람들이 아직 아티팩트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현명한 클레멘츠는 빙글 돌아 다른 곳을 향했다.
“전하, 어디 가세요?”
“방해꾼이 없는 곳.”
오, 좋은 생각이다. 나도 빨리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무도회 파하기나 기다려야지. 더 이상 눈에 띄는 건 위험했다.
이윽고 그를 따라 연회장의 끝까지 도착했다. 거울이 있던 통로와는 반대쪽으로,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넓이만큼이나 높이도 굉장한 그레이트 홀이었다. 2층은 1층보다 훨씬 좁고 벽에 붙어 있었다. 마치 공연장이나 체육관의 응원석 같은 느낌. 흘깃 올려다보니 어둡고 조용했다.
“오오…….”
자고로 이런, 남들이 잘 안 가고 으슥한 데다 높기까지 한 공간은 왠지 꼭 들어가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었다.
계단으로 한 발짝 올라서려는데, 쇠붙이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가로막혔다.
“……아.”
홀 입구와 거울 방에도 있던 근위병들이 계단을 지키고 서 있었다.
“현재 2층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황족이며 귀족이란 귀족은 죄다 모여 있는데. 위로 숨어들어서 누굴 저격이라도 할지 알 게 뭔가. 내가 그런 스나이퍼는 아니지만.
“올려 보내 주어라.”
머쓱한 기분에 뒤로 물러서는데, 클레멘츠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전하, 하지만…….”
한 명이 뭐라고 입을 열었지만, 곧 다물었다. 곧 그들은 경례를 붙이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올라가십시오, 레이디.”
“감사합니다.”
오, 오오. 이것이 바로 황태자 프리 패스, 황태자 패스인가?
“먼저 올라가 있어, 오필리어.”
“네!”
왠지 신난다. 좀 이따 올라온다는 클레멘츠를 내버려 두곤 마저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2층은 정말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