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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89)화 (89/218)

89화

“그 사기꾼 천막의 주인이 너였느냐.”

“사기꾼이라뇨? 마탑 수석 마법사에게……. 뭐, 상관없습니다. 오필리어 양은 저를 믿고 200크로나의 의뢰금까지 주셨으니까요.”

“…….”

생으로 날아간 내 현금까지 생각나자 더더욱 힘이 없어졌다. 날 추궁할 줄 알았던 클레멘츠는 역으로 메디프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쓰레기였냐는 눈이었다.

“오필리어에게서 돈까지 뜯은 건가?”

“…….”

“…….”

메디프는 당황했다.

“뜯, 뜯다니. 그게 그렇게 큰돈은…….”

나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화,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해 주지.”

“해 드리겠습니다. 오필리어, 저는 그 정도면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음, 무료 이벤트라고 생각을 하고…….”

역시 황족 입장에선 실제로 푼돈이라 자기 기준으로 생각한 거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입장에서 출혈은 컸지만 어쨌든 메디프의 마법은 그 정도 값어치는 할 테니까. 날로 먹고 싶진 않았다. 페이백 거절!

한사코 거절하자 클레멘츠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저건……! ‘그러게 왜 굳이 그 천막을 찾아갔냐.’라고 하려고, 지금 막 예비 박을 넣은 거겠지?

“화, 황태자 전하께선 제게 첫 춤을 맡겨 두신 적 있나요?”

거기서 저주를 풀려는 내 독단 행동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질 게 뻔한 것 같아, 황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애당초 병아리인 제게 에스코트를 자청하셨을 뿐이잖아요. 그런 사소한 문제로 무섭게 구는 건 그만둬 주세요.”

“그게 너잖나. 모습이 바뀌었다고 의무가 사라지진 않아.”

“만약 안 바뀌었으면, 아기 새를 손에 얹고 춤이라도 추실 계획이셨어요?”

당황하며 페이백을 제시했던 메디프는,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크흠. 큿…… 후훗!”

클레멘츠는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메디프를 짜게 식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2황자 전하께서도, 고객의 정보를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씀하셔도 되나요? 좀 더 믿음직스럽게 행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게 신분을 숨겼다가 들통나신 지 한 시간도 안 되셨잖아요.”

“……죄송합니다.”

“오필리어에게 신분까지 숨겼나?”

“…….”

셋 모두에게 상처만 남은 대화와 폭로의 장. 나는 흐린 눈을 뜬 채 나의 멘탈을 다독였다. 그러다 침묵이 길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드니, 황가의 두 형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기 싸움?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다가 결심했다. 도망가자.

어쩐지 싸움 붙이고 튀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여기서 빠지는 게 맞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저는 이만…….”

여전히 꼭 잡혀 있는 클레멘츠의 손을 놓고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내 걸음은 즉시 생긴 반발력에 막혔다.

“뭐죠, 이건?”

여전히 내 왼손은 클레멘츠에게 잡혀 있었고, 오른쪽 손은 메디프가 새로이 붙잡은 상태였다.

형제의 시선이 와 닿았다. 온전히 자수정 빛을 담은 클레멘츠의 눈동자와, 그보다 푸른빛이 짙은 메디프의 것.

“아니, 여기 있어라.”

“가지 마세요, 오필리어 양. 아직 말 다 안 끝났습니다.”

아, 대체 왜들……!

“오필리어 양, 생각해 보면 무책임하게 당신을 끌어들인 건 형님이시지만, 오늘 정식으로 당신을 모시기를 청한 건 제가 아닌가요?”

“그, 그게…….”

“웃기는 소리. 오필리어를 속여 놓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클레멘츠는 경멸조로 덧붙였다.

“안면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 아니지. 오필리어를 그저 유희 상대로 여겼다면 한참 잘못 골랐단 걸 깨달아라.”

“……당신의 동생을 그리 가벼운 이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건가?”

“그러는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분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고 계신지 의아하군요.”

어느 정도 투닥대던 분위기는 급속도로 싸늘해지고 있었다.

“제발, 그만들 좀 하세요!”

“…….”

“…….”

얼겠다, 얼겠어! 그러니까 나는 보내 주고 둘이 싸우든지 하라고!

“제가 뭐라고, 이런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황족 형제분들끼리 네가 뭘 했니 너는 뭘 잘못했니……. 이러는 거 보기에도 안 좋고, 좀 아닌 거 같거든요.”

“……그래서?”

“그래서요?”

“그냥 다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제가 사라질게요. 자리 이탈했다가 허락 없이 사람 됐다가 엄한 분이랑 춤춘 것 모두 미안합니다. 두 분은 화해하시고 좀 제대로 된 말씀 나누세요. 형제잖아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여기 있어라.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이하동문이에요, 오필리어.”

“너는 그 손이나 놓지 그래.”

“제가 놓기로 정해졌습니까? 언제요?”

클레멘츠는 조소를 흘렸다. 두 쌍의 눈이 또 나를 향했다. 결국 그들은 날 놔주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 있을지 네가 골라라, 오필리어.”

“고르세요. 올바른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아…….”

울고 싶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 * *

“내 아들, 너를 가장 빛내는 것이 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단다.”

메디프 황자는 어미의 웃음에서 무언가를 꾸밀 때 종종 보이곤 하는 기색을 읽어 냈다.

괜한 생각이리라. 마탑이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는 존재 자체로 제국의 보물이었다. 아무리 그의 어머니라 해도 그런 귀한 물건에 흠집을 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의혹이 생긴 이상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메디프는 살짝 연회장을 빠져나와 진실의 거울, 카트레프티스를 보관해 둔 방으로 들어갔다.

덮개를 씌우고 고정해 둔 황실의 봉인은 그대로였다. 봉인에 찍힌 아다만티스의 문장을 수레국화 문양이 두르고 있었다. 황제 측에서 친히 봉한 그대로라는 뜻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어머니도 예전 같진 않으신 건가.”

봉인을 풀고 거울을 공개하는 건 무도회가 무르익었을 때, 객들 앞에서가 될 것이다. 직접 덮개를 벗기고 확인할 수는 없어 한참 더 미간을 좁히고 쳐다보니, 장엄한 직물에 올이 나간 듯 조그만 구멍이 눈에 띄었다.

“웬일로 일을 완벽히 처리하지도 않으시고.”

저 정도 작은 흠이라면 덮개의 보호 마법에 영향이 갈 수준도 아니었다.

‘철두철미하신 성격도 못 뵌 새 변하신 건가.’

안도감에 픽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이질적인 연하늘색 옷감이 거울 뒤편에서 삐져나와 바닥을 덮은 게 보였다.

누군가 있다.

평온해졌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메디프는 굳은 표정으로 거울 뒤의 여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요?”

또 다른 모습으로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여자였다. 방금 전 말도 안 되는 날갯짓 하나로 부황의 분노까지 꺾어 버린 병아리. 그 본모습을 알고 있다는 건 메디프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첫 고객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저는…….”

“오필리어?”

“저를 아세요?”

허둥대며 변명하려던 여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왠지 모를 흥분과 기대감에 온몸을 사로잡고 있던 무료함이 밀려났다.

그런 한편 마음 한구석엔 의혹이 남았다. 왜 하필 그의 보물에, 마탑 시절이 그에게 남긴 유일한 기념물에 접근했던 걸까.

오필리어는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형제라고 하지만 차기 황제의 자리를 두고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건 온 제국이 다 아는 사실. 황태자파의 밀명을 받고 아티팩트를 망치려고 숨어 있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가까운 곁에 두고 지켜봐야겠다고, 메디프는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름과 신분을 속이고 그 여자를 연회장 밖으로 꾀어내고 있었다.

모든 말과 행동이 새로운 여자. 자꾸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여자. 의심은 점차 흐려지고 믿고 싶어지기만 했다. 이윽고 정체를 밝히고 그녀를 데려와 춤을 추었을 때.

메디프는 이쪽을 보는 클레멘츠의 눈빛을 보고 말았다.

‘어째서?’

답은 금방 나왔다. 애정이 듬뿍 들어간 드레스를 보고 짐작은 했었다. 저 진득하고 강렬한 감정.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황태자는 병아리 아가씨를 원하고 있었다. 메디프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걸 알아챘다.

새삼 제가 황궁을 떠나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다 싶었다. 음모를 꾸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잠잠하고, 그 냉정하던 이복형은 감정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긴 하늘색 속눈썹이 덮인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그는 짧은 과거를 회상했다.

아카데미 시절, 지금보다 어렸던 그는 눈으로 몰래 이복형을 좇았다. 그곳에서조차 천재라 칭송받는 고고한 모습을 동경했다.

황궁 안에서 왕래가 없는 건 단지 어머니의 가문이 달라서, 그래서 가족이라도 다른 편이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선 다를 것이다. ‘형’도 자신도 똑같은 학생이었으니까.

그렇게 홀로 복도를 지나는 황태자와 기대를 안고 마주쳤을 때, 막상 입을 열고서야 그를 ‘전하’라고 불러야 할지, ‘형’이나 ‘클레멘츠’ 따위로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복형은 그저 평소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지나갔다.

그런 사람이었다. 도대체 그 누구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살갑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춤추는 여자를 보는 형의 눈빛은 집요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사랑이라니. 사랑을 한다니. 한 사람을 보고 저렇게나 분노하고, 저렇게나 기뻐하다니.

애꿎은 유리잔이 박살 났다. 메디프는 웃었다. 품 안의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에, 눈을 맞추며 살살 웃어 주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불쌍한 아가씨, 저 집착을 어떻게 감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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