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파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클레멘츠는 그제야 무심한 시선으로 제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잔이었던 것을.
“화,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마침 곁을 지나던 하인이 그 참사를 목격했다. 복장 규정상 장갑을 끼고 계신 게 천만다행이었다.
“……연회용 유리잔을 전부 바꿔야겠군.”
허둥지둥 손수건을 바치고 유리를 치우는 하인의 머리 위로, 실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예?”
“황실에서 내놓은 잔이 이리 쉽게 깨져서야. 연회에 쓰는 물품의 질은 주인의 품격을 대변하는 법. 더 튼튼한 것으로 전부 교체하도록 하라.”
“예…… 예?”
조각난 유리잔은 얇았지만 결코 쉽게 깨지는 소재가 아니었다. 기존의 유리보다 정교한 가공이 가능하면서도 더 단단한 신소재로, 틀림없는 황실 유리 장인이 만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황태자가 약하다면 약해 빠진 물건인 것이다.
“예…….”
하인은 제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황태자의 뒷모습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 * *
샹들리에의 등황색 불빛이 아름답게 떨어졌다. 춤곡이 시작되었다. 상대역이 잘 춰서 그런지, 연습이 부족했는데도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주변의 박자와 잘 섞여 들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한 게 무색하게도, 춤추는 건 꽤 재미있었다. 음악에 맞추어 가벼운 운동이 지속되자 따뜻한 피가 구석구석 전신을 달렸다.
동작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살짝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다. 열띤 왈츠를 추면서 봐도 여기서 제일 돋보이는 카밀이 있었다. 흩날리는 상앗빛 망토와 머리카락이 우아했다. 크.
나머지 세 친구들도 발견했다. 하지만 클레멘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 병아리가 황태자의 파트너라고(에휴…….)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고. 암만 그가 얼음 같고 북풍 같더라도 황태자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할 가문이 한둘이겠는가.
그러니 분명 누군가와는 첫 춤을 출 텐…….
“앗……!”
이런. 초보 주제에 너무 넋을 놓았나 보다. 턴 동작 하나를 놓친 내가 비틀거리는 사이, 메디프가 강한 힘으로 날 끌어당겼다.
“조심해야죠, 오필리어.”
음악 소리를 뚫고 귓가에 울린 메디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은 미성이었다. 새삼 이 목소리를 왜 바로 알아듣지 못했나 싶었다.
“죄송해요. 잠시 주의가 흐려졌네요.”
“주변에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 아뇨.”
내심 찔려서 즉시 부정해 버렸다. 춤추는 파트너를 두고 딴생각을 하는 건 역시 실례였을 테니까.
“저를 봐 달라고요, 저를.”
“아하하……!”
다행히도 장난스레 눈웃음을 치던 메디프는, 어딘가를 넘겨다보더니 웃음이 짙어졌다. 명백히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라 의아했는데, 한 바퀴 손을 잡고 돈 김에 그쪽을 보니 별거 없었다. 하인 한 사람이 깨진 유리잔을 치우고 있을 뿐.
다들 놀고 있어도 서비스직은 열심히 일하는구나……. 왠지 모를 공감의 눈물을 삼켰다.
“오필리어.”
“네!”
이런. 또 엉뚱한 데 주의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집중할 거예요! 란 뜻으로 기운차게 대답하고 눈을 빛내는데, 메디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대체 그 편지는 무슨 뜻이었어요?”
“편지요?”
“축제에서 만나고, 이튿날에 당신이 부친 것. 웬 병아리 발자국이 잔뜩 찍혀 있던데요.”
목소리에 채 다 숨기지 못한 웃음이 배어 있었다. 아, 그거.
마법사의 천막에서 나올 때, 그가 추후 이걸로 연락하라며 쥐여 보낸 작은 편지지 꾸러미.
인간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때 시험해 봤어야 하는데, 그날 밤은 왠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그 편지지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렸다. ‘황녀님은 꾀병쟁이야’ 6권조차 펴 보질 못했으니, 말 다 했지.
결국 다음 날 아침 병아리가 되어 눈을 뜬 나는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가 돌돌 말린 한 장을 펴고, 발바닥에 잉크를 묻혀 콕콕 찍어 댔다.
카시스의 서류를 망칠 때는 다분히 악의 서린 혼돈의 몸부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경건하고 정갈하게 찍은 발자국들이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편지지에서 물러서자, 종이는 저절로 착착 접히더니 새 모양이 되어 날아갔다.
‘삐옷?(전서구?)’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참 편할 것 같았다. 하기야 200크로나짜리 편지지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대충 찍어 보낸 병아리 발자국에 대해서, 피차 인간이고 얼굴과 신분도 노출된 상태에서, 진지하게 춤추면서 듣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 얼굴 빨개진 건 아니겠지?
“그냥…… 그냥 테스트 삼아 보낸 거예요.”
“네, 테스트 메시지 잘 받았어요. 답장도 보냈는데 아마 못 받으신 모양이군요.”
“답장이요?”
“처음 편지처럼 답장도 창문으로 갔을 거예요.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셨다면, 바깥 창틀에 끼워져 있겠죠.”
그렇구나. 과연 마탑 수석 마법사의 기술력이었다. 이따가 방에 도착하면 창문을 한번 열어 봐야겠다.
“마침 우리 둘 다 황궁에 살고 있으니 만나긴 쉽겠네요. 다음 만남 일정을 적어서 다시 보낼게요.”
“……!”
“풀어 보자고요, 저주.”
그렇다. 바야흐로 저주를 풀어야 할 시점이었다. 연락 수단 하나도 기깔 나게 만들어 내는 마법사라면 분명 저주도 잘 풀겠지?
“좋아요……!”
기대감과 설렘에 잔뜩 부푼 채로 춤이 끝났다.
잠시 음악이 멎은 사이 쉬려고 메디프와 함께 걷고 있는데,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클레멘츠였다.
“앗, 전하…….”
그런데 어째 얼굴이 좀 무섭다?
“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일 있으셨나요?”
“춤을 잘 추더군.”
“보셨어요?”
칭찬 같은데, 왜 이렇게 혼나는 느낌이 들지? 꼭, 뭔가 잘못한 게 있을 때 엄마가 ‘자알-한다.’라고 하는 걸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그래도 제가 생애 처음으로 무도회에서 춘 춤이에요!”
그래서인지 왠지 변명 비슷한 걸 하게 되었다. 이러면 뭔가 좀 더 잘 말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치고 잘했네! 같은.
“처음이라고?”
그러나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되묻는 목소리가 왠지 음산하기까지 했다. 당황한 나는 말이 많아졌다.
“네. 혼우드에서 무도회 같은 게 열릴 일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서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가끔 열렸지만, 모나한 백작님이나 잘해야 벨라까지만 초대받았는걸요.”
“…….”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전하? 그래서 화나셨어요?”
젠장, 차라리 그렇다면 속 시원히 말씀해 달라고요!
그는 풀죽어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클레멘츠는 언제 무섭게 굴었냐는 듯 살짝 웃고 있었다.
“이리 와, 오필리어.”
이제 화가 풀렸나? 아니면 그냥 다른 것 때문에 잠깐 기분이 안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안도한 채로 그 손을 맞잡으니 부드럽고 강한 힘이 죽 끌어당겼다.
“오필리어.”
휘감기듯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서게 되었는데, 마치 뒤에서 붙잡듯 메디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십니까? 파트너를 두고.”
그러자 클레멘츠는 메디프를 노려보았다. 화가 풀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까 전 나를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차갑게 분노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왜 이래?
“이 무슨 무례지? 내 파트너와 나보다 먼저 첫 춤을 춘 데다가, 이제는 뭐라고?”
뭐? 그거 때문에 화난 거야? 나 때문에?
아니…… 당신 파트너는 병아리잖아요. 소유욕은 병아리 상태일 때만 발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피곤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항의 삼아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내 손을 더 꽉 눌러 잡을 뿐이었다.
“이제야 절 봐 주시는군요, 황태자 전하.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는 병아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메디프는 시치미를 뚝 뗐다. 연기가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단지 곤경에 처한 데다 구면인 레이디를 도와 드렸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무도한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서럽네요, 형님.”
“곤경에 처해?”
클레멘츠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게요…….”
나는 소곤거리듯 설명했다. 병아리 전용 라운지가 부담스러워 아티팩트를 보관해 둔 방으로 갔다가, 덮개의 흠집에서 새어 나온 빛 탓에 이 모습으로 변했고, 마침 메디프가 들어와 날 데리고 나갔고, 그 뒤는 보시는 대로.
사물의 진실을 밝혀 주는 카트레프티스. 클레멘츠는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감을 잡은 모양새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만졌다.
“짧은 다리로 발발대며 멀리까지도 갔군.”
“짜, 짧은 다리라니…….”
“그럼, 병아리 다리가 긴가?”
제길.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왜냐면 계약서상 조항에 의해 나는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자유가 있었으니까.
“흥, 아무튼 그렇게 된 거예요. 이제 아셨죠?”
“아직 설명이 안 된 게 있을 텐데. 네가 왜 저 녀석과 구면이지?”
저 녀석- 다름 아닌 메디프를 의미했다. 그제야 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형제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별로 사이가 좋진 않은 것 같지. 하기야 원작에서도 한 여자를 두고 경쟁했으니까.
“그건…….”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축제에서 메디프를 만났다고 하면 저주를 풀려고 독단적인 시도를 했다고 밝히는 셈이었다. 클레멘츠가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메디프가 알아서 술술 입을 열어 버렸다.
“오필리어 양께선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일을 제게 맡기셨답니다. 칼로카이리 축제에서 있었던 일이죠.”
나는 하얗게 얼어붙었다. 클레멘츠는 진지하게 듣더니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