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형님이 신경 쓰이시는군요.”
“……네.”
“자, 들어 보세요, 오필리어. 황태자께서 에스코트하신 건 병아리인가요? 아니면 당신인가요?”
“그게, 사실 둘이 같잖아요.”
그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럴까요?”
“그건 아니지만…….”
나는 고민하다 한숨을 쉬었다.
“……병아리죠.”
“그렇지요. 그러면 제가 첫 춤 신청을 할 수 없는 건 당신인가요? 아니면 병아리인가요?”
“……병아리…요.”
이게 무슨 기적의 논리란 말인가.
뭐, 하긴. 이 모습 그대로 들어간대도 딱히 클레멘츠가 내게 춤 신청을 하는 모습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차라리 병아리에게라면 모를까.
‘나와 함께 춤추자꾸나, 오필리어.’ 따위의 말을 하곤 병아리와 춤을 춘답시고 손바닥에 새 새끼를 얹고 플로어에서 흐느적거리는 클레멘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건……국가적인 재앙이었다.
사람이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신의 한 수였구나. 조상님의 도우심이었구나. 그 자리에 거울을 놔둔 메디프에게 리스펙. 거울 덮개에 구멍을 내 놓은 과거의 나에게도 리스펙. 답례 삼아 메디프와 함께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결정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소박한 귀족 인생 첫 연회에 댄스 파트너로 서브 남주를 고르게 된 것이다.
* * *
“태자궁의 일이 한동안 잡음 없이 돌아가는 것 같더니만. 지켜봤더니 가관이더구나.”
“면목 없습니다.”
은행 관계자와 이야기를 마친 즉시, 클레멘츠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연회장과 연결된 안쪽은 황족만을 위한 휴게실로 꾸며져 있었다. 거기서 그는 한참 동안이나 붙잡혀 있어야 했다.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 아니 감은 시간마저도 제국에 투신해야 할 게 아니냐. 그럼에도 여전히 너의 불리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잊었느냐?”
“저의 태생을 잊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답은 짧고 공손하게. 생각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것. 클레멘츠에겐 쉽고 언제나처럼 지루한 일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고자 황제는 시가를 피워 물었다. 곧 연기가 휴게실에 뭉게뭉게 들어찼다.
“셀레네를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네 어미를 말이다.”
처음엔 후계자의 자질에 대한 훈계였지만, 늘 그렇듯 결국은 황제 본인의 넋두리로 술술 넘어갔다. ‘셀레네’를 부르는 늙은 얼굴은 지나간 한바탕 비극을 곱씹는 듯했다. 흡사 그 흉포한 손에 할퀴어진 건 자신뿐인 양.
죽은 어머니에 대해 황태자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차가운 미소뿐이었다.
평소라면 좀 더 오랫동안 앉아 있었을 것이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석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자기를 갈무리하지 못한 부황의 무책임함을 견뎌 냈으리라. 하지만 뿌옇게 흐려진 공기 속에 있자니, 숨통을 틔워 주던 작은 존재의 기억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클레멘츠는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곧 춤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그래. 널 무서워하면서도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여자들과 춤을 추도록 해라. 개중에 한두 명 정도는 쓸 만하겠지.”
입술이 제멋대로 주워섬긴 만만한 핑계는 춤이었다. 황제는 킬킬거리다가 가래가 끓은 기침을 해 댔다. 클레멘츠는 그를 등지며 얼굴에 드러난 혐오감을 숨겼다.
기이하게도, 아비가 채신없이 내뱉은 말에서도 클레멘츠는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황태자비 자리 생각은커녕 이 연회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겠지만.’
창백하게 질렸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필리어의 전용 라운지에 도달했을 때, 그는 병아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심장이 둔중하게 떨어지는 감각이 명치끝을 울렸다. 그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별일은 아닐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림자들이 은밀히 오필리어의 행방을 주시하고 있을 테니. 혼잡한 연회장에 오필리어를 데려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그는 자신의 호위보다도 더 많은 수를 병아리를 위해 배치했다.
최소한 사람들의 발에 차이거나 저번처럼 납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분명 스스로 어디론가 당돌한 발을 움직인 거겠지. 다들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 부담스럽다거나, 어디 신기한 게 보인다거나 하는 이유로. 잠시만 눈을 떼도 그렇게 사라진다. 평정심에 해로운 여자였다.
‘그러니 그저 보고만 기다리면 될 터인데…….’
왜 이리 늦는 것인지. 한 번도 그림자들의 보고가 늦다 타박해 본 적 없는 그였지만, 조만간 보고 시점에 대해 엄중히 경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곧, 춤곡이 시작되고 플로어에 모인 남녀들이 음악에 맞춰 돌기 시작했다.
첫 춤은 파트너와 함께 추어야 했다. 아무리 황당한 상대라도, 심지어 동물이라도 황태자가 정한 파트너였다. 감히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첫 춤을 제안할 만큼 패기 있는 귀부인은 없었다.
색색의 화려한 섬유들이 나부끼는 가운데, 무심한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꽂히듯 들어왔다.
‘오필리어.’
그리고 그 여자와 정답게 손을 잡고 움직이는 제 혈육의 모습까지.
겨우 되찾았던 클레멘츠의 평정이 엉망진창으로 어그러졌다.
“재료는 이것으로.”
무도회가 시작되기 얼마 전, 그의 책상 위 한쪽에는 오필리어가 직접 골랐다는 하늘색 천과 투명한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메이드들이 정확한 솜씨로 잰 오필리어의 치수가,
그리고 그 옆에는 실물 크기의 병아리 모형이 있었다.
클레멘츠의 맞은편에 꿇어앉은 자는 인간의 온갖 잡기(雜技)를 담당하는 손재주의 악마, 케리탈리온이었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뒤싱겐의 말에 뒤집어쓴 인간의 모습은 검은 머리의 창백한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드레스를 만들되…….”
작은 손이 병아리 모형을 가리켰다.
“평소엔 저 병아리 머리에 다는 리본이었다가, 병아리가 변신하면 리본도 몸에 맞춰 옷이 되게 만들라는 거지? 뒤싱겐.”
“그렇다. 거기에…….”
현왕의 후손으로 모든 마족의 주인이 된 자는, 펜을 움직여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제법 능숙하게 금세 형태가 잡혔다.
“이것과 같은 모양의 머리 장식까지 세트로.”
심이 들어간 리본을 머리에 감다니. 단순하면서도 혁신적인 머리 장식은 그 여자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
악마 케리탈리온은 헤어밴드의 그림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
공방 뒤뜰에 쌓인, 잘려 나가 버려진 재료 더미에서 도제들의 한숨을 먹고 태어난 악마였다. 위계도 하급으로 낮았고, 마력도 미미했지만 이 정도 잔재주쯤이야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왜 이런 짓을……?”
병아리에겐 작은 리본을, 그 병아리가 사실 여자라면 여자에겐 드레스를 선물하면 되는 일이었다. 굳이 왜 귀한 신분에 스스로 성가신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레멘츠는 주제넘은 사역마에게 그저 싸늘한 눈빛만을 돌려주었다.
“미안해, 뒤싱겐. 금방 완성될 거야.”
케리탈리온의 이마엔 검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나의 뒤싱겐을 잘 따라야 해. 네 쓸개라도 원한다면 하나 빼 주고 와.”
아끼는 대자인 뒤싱겐이 소환하는 게 자신이 아닌 고작 하급 악마란 걸 알게 되자, 마공작 크렘시아는 울분을 담아 주먹을 휘둘렀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케리탈리온은 잘해야 했다. 피의 속박에 묶인 악마로서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하급 악마는 실로 성심껏, 재빨리 작업을 끝내고 사라졌다. 완성된 병아리 리본에서 한동안 마력의 빛이 번뜩였다.
케리탈리온의 지적은 옳았다. 클레멘츠는 참으로 성가신 짓을 사서 했다.
수도- 특히 황궁에는 마법사며 신관이며, 마력에 민감한 자들이 대거 포진했다.
교단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해도 여전히 시미크 교는 클라티아의 국교였고, 교단은 뒤싱겐 황가의 소환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족을 소환하는 것 자체가 위험 부담이었다. 그래서 클레멘츠는 위계가 보잘것없으면서도 용도에 맞는 악마를 찬찬히 가려냈다. 오로지 그의 아기 새가 멋진 여자로 변해, 제 모습을 돌아보고 놀라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제게 떠 보일 것이다. 그다음엔, 쑥쓰러운 듯 배시시 웃을 것이다. 그다음엔 그 작은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겠다. 성가신 무도회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난 후에. 둘이서만.
그러나 혼잡하고 변수가 많은 날일수록 일이 뜻대로 굴러가지만은 않는 법.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진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는 건 그의 동생이었다.
장갑을 낀 오필리어의 손이 메디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마나 오래되었더라. 클레멘츠는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복도 끝으로 밀어붙였던 밤을 기억했다. 몇 겹의 옷을 타고 전해지던 오물거리는 손가락의 감촉이 선연히 떠올랐을 때, 그는 끔찍한 불쾌감을 느꼈다.
얄궂게도, 동생의 연푸른 머리 색이 오필리어가 입은 드레스와 멋지게 어울렸다. 짜 맞춘 그림처럼.
후회가 깊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는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며 베일리스의 딸과 유치한 싸움까지 했던 마당에. 차라리 은색을 택할걸 그랬나. 하지만 그 창백한 색은 보나마나 오필리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드레스를 마르고 완성한 건 확실히 악마의 솜씨였다. 오필리어의 모습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활짝 드러난 여린 어깨가 유연했고, 경쾌한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는 옷감은 푸른 물보라 같았다. 더할 나위 없는 형상이었다. 연회장을 밝힌 빛이 다른 사물의 표면에선 흐릿해지고, 오직 그녀와 만나서만 청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렇게 선명한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호기심과 매혹을 참지 못한 눈길들이 슬금슬금 오필리어를 향해 모여들었다. 클레멘츠는 수려한 눈썹을 구겼다.
음악에 맞춰 턴을 한 소녀가 황자의 팔에 끌어당겨졌다. 빈틈없이 돌아가는 동작의 향연에 집중하던 둥글고 큰 눈은 문득 저를 보는 메디프의 시선에 웃음으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