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카밀. 레오라 영애. 이야기는 마쳤나요?”
“아, 그래요.”
잠시 떨어져 정원을 거닐고 있던 카밀의 친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나도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거겠지? 오해도 풀렸겠다, 친구들도 왔으니 살짝 인사하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밀은 활달하게 일어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다들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이쪽은 레오라 남작 가문의 장녀인 오필리어랍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일단 무늬는 귀족. 모나한 저택에 가기 전 속성으로 받았던 교육 덕택에 가까스로 예법에 어긋나지 않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반가워요, 레오라 영애. 저는 라일라 세인이라고 해요.”
“저는 벨레이 진리스.”
“에일린 레코니아예요.”
베일리스 후작 영애의 친구들답게 그들은 전부 중부 출신의 귀족파였다. 각자의 가문은 유명한 분야가 있었다.
금광의 세인, 인맥의 진리스, 학문의 레코니아.
원작 소설에서도 이들은 카밀의 옆에 당연한 듯이 붙어 다녔다. 그리고 카밀은 클레멘츠를 그림자처럼 따랐고, 클레멘츠의 옆에는 벨라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카밀을 위해 벨라를 적대했다.
세인은 재력을 이용해 벨라가 가져온 물건들을 더 초라해 보이게 만들었다.
진리스는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벨라를 따돌렸다.
레코니아는 벨라의 식견이 얕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창피를 주었다.
이 세계에 와서 벨라의 시녀가 된 후, 장차 이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 벨라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리라고 벼르고 또 별렀다.
그런데…….
“오필리어라고 불러도 되죠?”
“드레스는 어디서 맞추셨나요? 조화가 환상적이에요.”
“게다가 그 머리띠는 당장 다음 파티에서부터 상당히 유행할 것 같은데요. 레오라 영애께서 멋진 춤을 추신다면 말이죠.”
카밀이 내게 호의적으로 나오자, 이들은 한꺼번에 나를 에워싸고 너도나도 말을 붙여 댔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원작에서도 이들은 벨라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지 않았다. 그저 카밀이 미워하니까, 친구인 카밀이 벨라의 파멸을 바라기 때문에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
지금, 카밀의 악의는 사라졌다. 여기엔 벨라 대신에 내가 있다. 따돌림도 괴롭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 역시 이들을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지금 당장 이들을 추궁할 방법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다들 반가워요.”
평소라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오필리어 레오라와 교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레오라 남작가는 이미 150년 전, 황제 폐하께 작위를 인정받은 정통 귀족이라죠. 가문이 자리 잡은 건 서부의 맹주인 모나한보다도 오래되었어요.”
놀랍게도 카밀은 나조차도 긴가민가한 우리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꿰고 있었다. 심지어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백오십 년이고 뭐고, 베일리스 후작가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할 텐데.
우선 카밀이 날 띄워 주지 못해 안달이자, 중부 가문의 세 영애는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나를 비행기 태웠다.
“그렇군요! 어쩐지, 척 봐도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진다 하였어요.”
“제대로 된 기반도 없이, 황궁에 좀 출입한다고 백작입네, 자작입네 하는 근본 없는 자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혈통이시군요.”
심지어 레코니아 영애는 나를 칭찬하기 위해 수도 귀족과 궁정백을 까 내리는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그 정도일 리가 없는데?
오필리어 코인, 지금 이 순간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상한가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렇게까지 띄워 주지 않으셔도 돼요. 조금…… 부끄럽네요.”
“꺄아, 겸손하시기까지!”
“…….”
그들은 내 사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 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다 보니 주로 가문의 사업 이야기였다.
세인 가문은 남아도는 돈을 투자할 곳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진리스 가문은 귀족들 외에도 이런저런 직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을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작 벨레이는 그들을 대단한 ‘인맥’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레코니아는 학자 가문인 만큼 가주가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했다. 에일린은 학생들이 도대체 하나같이 학문에 열의가 없다며 매일 한탄을 늘어놓는다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정답게 한바탕 수다를 떤 뒤, 카밀과 친구들은 이만 춤추러 가야 할 시간이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오필리어는 춤추러 가시지 않나요? 왜?”
“아직은 생각이 없네요. 춤 연습도 덜 됐고.”
적갈색 머리의 레코니아 영애가 물었다. 나는 대충 ‘일단 초대받아 오긴 왔으나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지 않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 척했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벨레이 진리스가 경악했다.
“허어! 이렇게 멋지게 입고 춤을 안 춘다는 게 말이 돼요?”
“맞아요. 혹시 파트너가 없어서 그래요? 차라리 2황자 전하와라도 춤을 추시면 좋을 텐데. 저희가 괜히 떨어뜨려 놨나 봐요.”
“라일라? 대체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카밀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생각이 달랐다.
“조금 못 추면 어때요? 모처럼의 황궁 무도회인데 최대한 즐겨요. 제 말 아시겠죠, 오필리어?”
세인 영애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는 카밀을 호송하여 그레이트 홀로 올라갔다.
소설 속에선 너무도 얄밉고 악랄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해 보니 생각보다 인간적이었다.
어차피 이제 와선 벨라의 적이 되지도 않을 테니, 적대감도 거두어야 맞는 걸까?
친구의 적이라고 무작정 무자비하게 굴지만 않으면 참 좋을 텐데.
혼우드에서 절절히 깨달은 바 있지만, 이곳은 ‘원작’의 내용대로 고착되지 않는다. 변수에 의해 착실히 변화하는 열린 세계다. 그러니 어쩌면, 달라진 나와 카밀의 존재에 의해 그들의 행보 역시 달라질는지도 몰랐다.
“춤이라…….”
이런 곳에서 사교댄스를 추는 건 벨라의 몫이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출 거라고 생각한 적 없다. 새삼 다시 내게 입혀진 옷을 돌아보았다. 클레멘츠는 왜 이런 걸 준비한 걸까? 내게 선물하는 거라면, 다른 선택지가 많았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로맨스 소설만 한 무더기 갖다 줘도 난 기뻐했을 텐데.
“연인이 아니라면 전하께서 왜 이런 선물을 하신 거죠?”
메디프가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혹시 클레멘츠는 정말 나와 춤을 출 생각이었던 걸까? 하지만 무도회에 그와 함께 온 건 병아리였다. 사람인 내가 아니라.
그럼 아무리 봐도 무도회 외에는 쓸데가 없는 이 옷은 또 뭐야?
“진짜 사람 어렵게 만드네…….”
끙끙대고 있는 나에게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다가왔다. 깜짝이야.
“기다렸어요, 오필리어.”
움츠리던 어깨를 바로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메디프였다.
진작 연회장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말 그대로 그는 오랫동안 바람이라도 쐰 듯, 연푸른 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흐트러진 모습이 왠지 처량해 보였다.
“2황자 전하?”
“미안해요.”
“아니, 뭐가요?”
“신분을 속인 거요. 당신을 다시 만나 반가웠는데, 황족이라는 걸 알게 되면 당신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래서 그런 거지 별 이유는 없었어요.”
그거야 별 이유 없으리란 건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그보다도!
“그 말씀을 하시려고 바깥에서 절 기다리셨어요? 오늘의 주인공이시잖아요. 사람들이 다들 얼마나 찾았겠어요.”
“상관없어요.”
……아 그렇지. 메디프라면 상관하지 않을 만도 했다. 워낙 자유로우신 성격이니.
“아, 정말…….”
곤란해하는 내 표정에 응하듯 그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짙은 색의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데. 다시 물을게요. 오필리어 레오라, 내게 그런 영광을 허락하겠어요?”
“그거라면 이미……!”
“거절을 끝맺지 않으셨으니, 제겐 아직 기회가 있어요. 카밀이 오랜만에 고마운 일을 해 줬네요.”
그러고 보면 막 거절하려고 하던 참에 카밀이 친구들과 난입해서 우리들을 떼어 놓았다. 그대로 파투 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요청할 줄은.
왜 하필 내게 이러지? 단순히 함께 다닐 귀족 영애를 찾는 거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좋았다. 축제 때 만나 거래를 텄고, 병아리로 변신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그의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저기, 전하는 솔직히 말해서…….”
“네.”
“너무 눈에 띄거든요. 저는-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러운데, 조용히 지내다 들어가고 싶단 말이에요.”
“카밀의 친구들, 그 아가씨들에게 듣지 못했나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메디프는 내 부정적인 태도에도 굴하지 않았다.
“제 옆에 나타난 레이디는, 특히나 새로운 얼굴일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효과가 있답니다.”
곁에 있는 여자가 맨날 바뀌는 남자라면, 확실히 이번엔 누가 그 옆에 섰는지 관심이 덜 쓰이는 게 사실이다. 흐린 눈으로 쓱 지나치곤 ‘메디프가 메디프했네.’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점이다. 특별한 비밀이라도 얘기해 주듯 키득거리는 저 얼굴이라니. 자신의 단점을 팔아서까지 나와 파트너 하고 싶은 걸까?
“뭐, 그럼 그럴까요…….”
이쯤 되면 그냥 선선히 잠시 들어가서 같이 있다가 슬쩍 나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원래 사람은, 더욱이 이런 사람은 거절할수록 끈질겨진다.
그냥 승낙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전히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으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멈칫거렸다.
그가 허공에서 멈춘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무심코 홀 쪽을 힐끔거리는 내게 메디프가 예리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