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게 대체 무슨 짓일까요? 레오라 영애께 이미 파트너가 있는 게 보이지 않나요?”
“파트너? 방금 거절당하신 것 같던데요. 그리고 제 눈에는 레이디를 모시는 신사가 아니라 늘 하던 대로 여성을 희롱하는 남자가 보이네요.”
“아직 레오라 영애의 대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그런 말씀을.”
그 역시 예로부터 카밀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기 자신의 신분을 무기 삼아, 예리하게 갈아 휘두르는 여자. 스스로의 신분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던 메디프로서는 그게 차라리 어떤 광기로 보였다. 더구나 저를 볼 때마다 못 볼 거라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기까지.
이유 없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쪽에서도 싫어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저는 레오라 영애를 모시고 함께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만? 카밀이야말로 무례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끼어들어 폭언을 퍼붓고. 좋은 시간 보내던 사람들을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유려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레오라 영애.’라고 동의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아차.’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뜬 오필리어가 이내 생긋 웃었다.
“황자님?”
“…….”
“황자님이셨군요!”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메디프는 허둥지둥 머리를 굴려, 자신이 어쩌다 보니 신분을 속인 건에 대한 사과와 양해를 구하는 말을 생각해 냈다.
하지만 그사이, 평소와 달리 행동하는 카밀을 보던 친구들도 카밀의 의중을 다 파악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는 저 귀엽게 생긴 레이디를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지금 카밀에게 필요한 건 물타기였다.
“보아하니 레오라 영애의 의사도 이미 결정된 것 같군요.”
“어머나, 물론 신분을 숨긴 만남은 낭만적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가면무도회가 아니랍니다.”
“귀여운 분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십분 이해해요. 그래도 때와 장소라는 것이 있잖아요?”
“레오라 영애께선 익숙지 않은 연회에 시달리셨어요. 지금은 여자들끼리만의 휴식이 필요하답니다.”
오필리어는 커다란 눈을 반짝, 다시 반짝 떴다 감았다.
메디프가 신분을 속였다는 점을 이용해서 떨어져 나올 생각이었다. 딱 두 마디의 떡밥만 던졌을 뿐인데 나머지가 일사천리로 굴러갔다.
“레이디 오필리어, 제 말을 한번 들어 주십시오. 저는…….”
2황자는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마음이 약해져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고 했을 때, 오필리어는 카밀과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고혹적으로 가라앉은 녹안은 오필리어를 끌어당기듯 내려다보았다. 부채를 쥐지 않은 손이 천천히 붉은 입술에 대어졌다.
‘쉿.’
그사이 카밀의 든든한 친구들이 오필리어를 확보했다. 작은 몸이 풍성한 옷자락들 사이로 가려졌다.
“자, 2황자 전하. 바람 쐬고 계신다고 하셨죠?”
손짓으로 오필리어와 친구들을 제 등 뒤로 보낸 카밀이 말했다. 분명 메디프가 한 말이었지만 그 앞의 ‘레오라 영애를 모시고 함께’는 멀리 바다 건너로 보낸 뒤였다. 메디프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카밀.”
“가서 쐬세요.”
“네?”
“쐬시라고요, 바람.”
제 얘기를 하는 줄 알았는지,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가 공허한 소리를 내며 그들 사이로 불어왔다.
쌔앵.
* * *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끌려와 버렸다. 대체 카밀은 무슨 생각인 걸까? 워낙 갑작스러워서 혹시 날 알아본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당연히 착각이었다. 인간 모습의 나는 카밀과 초면이었다.
그녀가 무의미한 집착을 버리고 악녀 포지션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았지만, 늘 보던 병아리 바보가 아니라 도도하고 고집 센 후작 영애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좀 겁이 났다.
호, 혹시 내가 뭔가 밉보였나?
생각해 보니 그림이 좀 신경 쓰였다. 갑자기 이 구역에서 제일 인기 많고 돈 많고 폭력성으로 이름 높은 여자애가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와서 별 볼 일 없는 애 하나를 끌고 가는 상황.
집단 괴롭힘……?
“잠시 레오라 영애와 할 말이 있어요, 사랑하는 친구들.”
밤공기 속에서 더욱 우아해 보이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어요?”
“좋아요.”
친구들은 카밀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흩어졌다.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경고를 하려는 건가? 내가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건가?
“이런. 몸을 떨고 계시네요, 레오라 영애. 이를 어째? 추우신가 봐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추운 게 아니라 당신이 무서운 거거든요.
얼른 대답했지만 카밀은 석연찮다는 듯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그러다가 자신의 드레스에 딸린 망토를 풀어냈다.
카밀이 입은 진녹색 드레스는 은빛 광택을 품고 잠자리 날개처럼 차륵거렸다. 가벼운 금속 허리띠는 숲의 요정을 연상시켰고, 비슷한 디자인의 금속 버클이 한쪽 어깨에서 뒤로 늘어지는 얇은 상앗빛 망토를 연결하고 있었다.
카밀은 친히 끌러 낸 얇은 망토를 펼쳐 내게 둘러 주었다. 망토에 놓아진 백금 빛 자수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베일리스 영애……?”
“이리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으셨으니 추울 만도 하죠. 여름이라지만 일교차가 크니까 감기 조심해야 해요.”
카밀은 날개 잃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뭐,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옥상으로 끌고 가 놓고 추워서 도망가면 안 되니까 자기 패딩을 덮어 주는 일진……? 그게 뭐야. 이상하잖아.
“자, 마침 저쪽 자리가 비었군요. 앉아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미로 정원 외곽에 마련된 예쁜 벤치 위에 앉았다.
“구두는? 연회장에서 꽤 오래 신었을 텐데, 불편하진 않아요?”
설상가상으로 카밀은 몸을 굽혀 내 발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치맛자락 안으로 얼른 발을 숨겼다.
“괘, 괜찮아요! 베일리스 영애, 정말 저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이렇게 친절하신 분이셨다니…….”
황송한 김에 그녀의 손을 잡고 번쩍 일으켜서 옆에 앉히기까지 했다.
“…….”
그러자 카밀은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왜 이래? 얘 왜 이러는 거람.
“레오라 영애는 친절하시군요.”
“아뇨, 베일리스 영애가 더…….”
그쪽의 과잉 친절을 방어하려다 보니 어쩌다 조금 친절해져 버린 것뿐이잖아. 하지만 카밀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닮았어. 이런 것까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그 표정이 왠지 되게 익숙했다. 나는 카밀이 날 괴롭히려고 데려왔다는 가설을 이만 폐기하기로 했다.
알 수 없는 카밀의 연상 알고리즘이 나를 호감으로 이끈 모양이었다. 왜? 머리가 노란색이라서? 이름이 오필리어라서?
어쨌든 괴롭히려는 것보단 나았다.
“갑작스레 모시게 되어 죄송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오필리어…… 아,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카밀.”
카밀은 입에서 살살 녹는 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미모였다.
“2황자 전하…… 그러니까 메디프 님은,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만나는 어느 여성에게나 다소간의 친절을 베푸는 분이세요. 그 모습이 하도 다정해서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시죠. 실은 별 뜻 없는 말과 행동이었는데도 말이에요.”
“아…….”
“그래서 걱정이 되었어요. 혹여나 서부에서 막 올라온 오필리어가 잘 모르고 소중한 마음을 빼앗기실까 봐.”
그런 거였구나.
돌고 돌아 몇 바퀴의 오해를 한 건지 가늠이 안 가지만, 일단 나를 위해 그랬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었다. 동시에 참 별일이었다. 카밀이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남에게 신경 써 주다니. 악녀로서의 이전 행적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선한 행보였다.
정말 뿌듯했다. 이게 바로 내가 온몸 던져 개과천선시킨 아이입니다, 여러분!
“그랬군요, 카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렇지만 염려 마세요. 제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테니까요.”
마음은 갸륵하지만, 카밀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한 셈이었다. 이곳 수도 사교계는 내가 길게 머물 곳이 아니었다. 얼마 안 가서 혼우드로 돌아갈 거다. 거기서 함께 부지런히 레오라 가문을 꾸려 갈 참한 남편감을 찾아야지. 이런 휘황찬란한 수도 생활에 익숙해진 남자 가운데 내 짝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애당초 이곳에선 안 생긴다는 걸 알고 있으니, 쓸데없는 호기심에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다.
“그 누구에게도요?”
카밀이 놀란 듯 되물었다.
“하지만…… 오필리어, 마음은 그렇게 철통같이 지켰다고 믿어도,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측도 못 한 존재가 몰래 가져가 버리고 만답니다.”
그러곤 뭔가를 회상하듯 아득한 표정을 짓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젠 내가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예요?
카밀이 또 누굴 좋아했지? 클레멘츠에 대한 회상인가? 하지만 다 끝난 일을 돌이켜보고 있다고 하기엔, 저 표정엔 너무도 생생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지만 달리 물어볼 말이 없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에 대한 말씀인가요?”
“후훗!”
카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해도 이해 못 하실 거예요. 하지만 오필리어…… 당신은 참 사랑스럽죠. 그 귀한 마음을 부디 합당한 이에게 쓰게 되길 바라요.”
그러니깐 여기선 누구한테 마음 줄 일 없대도.
“……아무한테나 들러붙는 한량이나, 냉혹한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탐하는 남자가 아니라…….”
“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오필리어.”
유감을 잔뜩 담아 중얼거리는가 싶던 카밀은 금세 활짝 웃어 보였다. 어쨌든 대화는 잘 끝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