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예기치 못하게 몸이 변했으니 당황했겠군요.”
“어유, 말도 마세요!”
“사정은 알았으니, 근위대가 당신을 잡아가는 일은 없게 해 드리죠.”
경계의 기색을 거둔 그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말을 좀만 잘못했으면 이 손을 끌고 그대로 근위대로 직행했을 것 같지만. 일단 그 손을 잡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당신은 제 고객이잖아요. 잡혀가지 말고 안전하게 잔금을 치르셔야죠, 오필리어.”
잔금 때문이었냐고! 이, 수완은 별로면서 쓸데없이 장사 욕심은 있는 마법사 같으니.
메디프가 통로 밖에 있는 근위병을 유인한 사이, 나는 재빨리 빠져나와 원래부터 구석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어? 방금…….”
“왜 그러지?”
“뭔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제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전하.”
“자네 피곤한 모양이군. 교대가 끝나면 들어가서 쉬도록 하게.”
경례를 받은 그는 웃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근위병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지만 곧 치워졌다. 메디프가 평소 워낙 이런저런 다양한 아가씨들을 가까이한 덕에, 나도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가실까요, 레오라 영애.”
“방금 저분이 당신을 보고 ‘전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안 들렸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다 들렸다.
“아니요, 잘못 들었겠죠.”
“그래요?”
사방에 자기 신분을 아는 사람 천지인데, 대체 언제까지 (제 딴에는) 비밀로 할 생각인 거지? 내가 5분만 더 속아 준다.
메디프는 나를 눈에 잘 띄지 않는 출구로 능숙히 안내했다.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온 우리는 그레이트 홀 양쪽을 둘러싸고 미로 정원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예쁜 풀벌레 소리가 고요 속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합주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드레스는 어떻게 된 건가요?”
“드레스요?”
“그 새틴과 보석은 병아리일 때 착용하고 있던 것과 같죠. 평소에도 그래요? 옷도 같이 변하나요?”
엉뚱하지만 궁금할 만한 질문이었다. 만약 그런다면 유렌과 카렌이 정말 기뻐할 텐데. 나는 가볍게 웃다가 대답했다.
“아뇨. 병아리로 변할 땐 그냥 맨몸의 병아리고, 사람으로 돌아올 땐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에요. 저도 처음 보는 옷인데…….”
새삼 다시 한번 내게 걸쳐진 드레스와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어쩜 이렇게 몸에 맞춘 듯 딱 맞을 수 있는지. 옷자락에 작고 섬세하게 붙은 보석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날 빤히 쳐다보던 메디프가 슬쩍 말했다.
“잘 어울려요, 오필리어.”
자, 잠시만.
이 분위기에, 저 얼굴에, 그런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말하는 건 반칙 아닌가? 숨 쉬듯 플러팅을 하는 캐릭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방심해 버렸다.
“아하하……! 메디프 님도 멋있으세요!”
흐읍, 숨을 들이쉰 나는 갑작스레 들어온 공을 받아치듯 뻣뻣하게 말했다.
“이런 분이 그때 그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기 용의자 마법사라고 어떻게 상상하겠어요? 못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죠.”
망했다. 어째 말하다 보니 칭찬에서 그라데이션으로 욕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메디프는 기분 나쁜 내색은커녕 웃었다. 풉, 킥, 하고 삼켜 내다가 결국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형제가 쌍으로 웃음 포인트가 이상했다. 클레멘츠도 애써 만든 서류를 찢으며 욕하니까 웃었잖아.
그, 그래. 클레멘츠! 나는 기쁜 마음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드레스는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 마련해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진 않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네.”
“당신, 전하의 연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연인이 아니라면 전하께서 왜 이런 선물을 하신 거죠?”
메디프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내 의상을 훑어보았다. 흠. 생각해 보니 오해할 만한가?
“아마도 포상 같은 게 아닐까요?”
“포상?”
“병아리인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니까요. 애완동물 역할을 잘 해냈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잘 좀 해 달라는 부탁의 의미인 거죠. 마찬가지로 아직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진 않았지만!”
“……큭.”
어라? 갑자기 메디프가 비틀거리더니 난간을 짚었다. 걱정이 되어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에 얼굴을 묻은 그가 힘겹게 숨을 골랐다. 뭐, 뭐야. 무슨 지병이라도 있나? 숨겨져 있던 설정인 건가?
“당신 너무 웃겨요.”
“……아, 지금 웃은 거예요?”
“네.”
“레이디 오필리어.”
메디프는 가까스로 웃음을 그쳤다. 뭔, 사람이 무슨 말만 하면 웃는 거야?
“왜요.”
“연인도 아니고, 오늘의 무도회에 대해선 합의된 것도 아니라면.”
그는 몸을 바로 하고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오늘 밤 당신을 모실 영광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미 데리고 다니고 있지 않나? 멍청히 서 있다가 깨달았다. 이건 무도회 정식 파트너 신청이었다.
“제가 당신이랑요?”
“안 되나요?”
이 무도회는 그가 주인공이었다. 인기가 많으니 찾는 사람도 자연히 많을 터였다.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게 없는 나와는 맞지 않는 짝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도 ‘메디프 페리윙클’로 행세하고 있었다. 내가 귀족들의 예법에 크게 얽매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요청을 할 때는 정식으로 이름을 밝혀야 하는 거 아닐까?
“데리고 나와 주신 건 고마워요. 그렇지만…….”
아마 큰 의미를 둔 신청은 아닐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탈의 일환이거나, 단순한 흥미의 표현이겠지.
숙녀다운 거절 멘트는 이미 머릿속에 다양한 레퍼토리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다, 벨라가 수도에 데뷔하면 시녀로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날파리들을 쳐내기 위해 생각해 둔 것들인데. 내가 이렇게 준비된 조연인데, 크흑. 이걸 나 스스로를 위해 쓰게 될 줄이야.
거절을 막 입에 담으려던 순간이었다.
“이게 누구야. 제2황자 전하 아니세요?”
누군가 다가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메디프는 예의 친절하지만 날카로운 눈웃음을 지었다. 정체가 들통나자 평정이 무너진 것 같았다.
“사람, 잘못 보지 않았을까요?”
“여전히 한없이 가벼운 말만 하는군요. 너무 가벼워서 저의 어처구니도 없어지다 말았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말 너무하시네.”
메디프는 살짝 움직여 나를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객의 눈빛이 내게 꽂혀 드는 걸 막기엔 늦었다.
“당신, 누구예요?”
불만스러운 표정.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카밀 드 베일리스였다.
* * *
카밀 드 베일리스는 예로부터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이라면 질색이었다.
제 형의 반만 닮았어도 제법 그럴싸한 남자일 텐데. 고고하고 무게감 있는 클레멘츠와 다르게 메디프는 허공에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사용인이라도 실실 웃으며 말을 붙여 대고, 여자라면 할머니부터 코흘리개 어린이에게까지 전부 사근사근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 바람에 큰 착각을 하고 마음을 키웠다가 엉엉 울며 뛰쳐나간 영애들이 수도 없었다.
오늘의 연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에 봤을 땐 분명 오브론 영애에게 실컷 추근대고 있더니, 그새 또 여자가 바뀌었다.
그저 음흉한 페리윙클의 후손이 제 버릇 남 못 줬다며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평소라면 기껏해야 든든한 호위처럼 옆에 늘어선 제 친구들과 함께 비웃는 말 몇 마디 던져 주고 가면 끝이었을 테다. 가볍기가 가을날 흩날리는 나뭇잎보다도 못한 황자와, 그가 어떤 이인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단꿈에 젖은 멍청한 여자애 모두를.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유난히 눈에 밟혀서, 저 상황 자체에서 둘째 황자를 제거하고 싶었다. 아니, 저 영애를 빼내 오고 싶었다.
왜?
……저 노란머리 영애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귀여운 단발. 그리고 노란 머리. 노란색.
사랑스러운 오필리어의 색깔이지 않은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한순간 카밀의 표정이 무한정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입고 있는 하늘색 옷이며 앙증맞은 리본까지. 오늘 보았던 오필리어의 모습과 더더욱 비슷했다. 비록 이제는 짝사랑은커녕 보기만 해도 두통이 이는 황태자의 안목이긴 했지만.
그래서 카밀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물었잖아요. 이름은?”
둘째 황자가 무슨 악의 손길에서 지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영애의 앞을 가로질러 팔을 뻗었다. 하지만 노란 머리 영애는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오필리어 레오라입니다.”
“오필리어?”
그게 그렇게 흔한 이름이던가? 어쨌든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니, 사실상 이 시점에서 카밀의 호감도는 이미 최대치를 찍어 버렸다.
이전의 카밀이었다면 레오라 가문이 어디 박힌 가문인가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귀족 명단을 달달 외운 머리 한구석에서 ‘서쪽 변방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작은 남작 가문’이란 정보가 나온 순간, 그녀를 무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과연 촌구석 출신이라 소식이 느린 건 어쩔 수가 없다며 업신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따위 사소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왠지 오필리어를 생각나게 하는데, 병아리와 사람인데도 저렇게 닮았는데 이름마저 오필리어라니?
이건 운명이었다.
카밀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예전의 그녀가 귀족파 수장 후계자의 권위로 타인을 찍어 누를 때 나오던 자세는 여전히 한 점의 흠도 없이 당당해 보였다. 그 상태로 카밀은 손을 내밀었다.
“자, 레오라 남작 영애. 멀리서 왔으니 많은 것이 낯설 테죠? 이리로 와요. 정원을 안내해 드리죠. 친구도 소개해 드릴게요.”
“……카밀.”
메디프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