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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83)화 (83/218)

83화

“……안 살 거면 그만 만지고 가자.”

역시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야박하다고 마음속으로 엄청 욕했는데.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트렌드가 어쩌네 하는 내 말까지 믿은 눈치다. 나는 클레멘츠가 이걸 해 줬으면 했지만…….

어깨가 시원하게 드러난 하늘색 드레스엔 내가 골랐던 작고 투명한 보석이 아낌없이 붙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예쁘게 반짝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생각해 보면, 한 번은 사람으로 변해 있을 때 유렌과 카렌이 열심히 이곳저곳의 치수를 잰 적이 있었다. 꺄르르 웃으며 병아리 목둘레를 잴 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함으로. 숫제 전투적으로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나는 ‘이럴 필요가 없을 텐데. 대체 왜 재는 거야?’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었다. 그게 설마 이 옷을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이었나?

무슨 암살 계획도 아니고, 나 몰래 다들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마지막으로, 같은 하늘색 새틴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초커 형태로, 정확히 내 목 한가운데 있는 문양을 가리고 있었다.

“목둘레, 7.8도데네요.”

유렌이 말하고 줄자를 떼어 내던 그 감각이 왠지 되살아나는 것 같아, 목걸이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미쳤나 봐…….”

누가 주도했느냐는 명백했다. 클레멘츠였다. 왜 이런 일을? 깜짝 이벤트인가? 생일도 한참 지났는데. 핫, 그럼 혹시 뇌물 같은 건가?

그럴싸한 미소를 띠며 당당하게 제안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멋진 옷도 선물해 줬으니, 병아리 계약을 1년 연장해 줬으면 한다.’

뭐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싫어요.

거절하는 연습을 하자. 나중에 어떤 상황에서 그런 제안을 받아도 단칼에 자를 수 있게. 싫어요. 안 할래요. 싫어요-라고 하는 거다.

마침 앞에 거울도 있겠다. 연습하자. 하나 둘 셋, 싫어요-.

있는 대로 정색하고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통로를 지나 이 방으로 오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방에 보관된 카트레프티스가 보통 귀한 물건이던가?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수상해 보일 거다. 거기다 나는 지금 연회에 참여한 귀족처럼 보일 텐데, 굳이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가 없으므로 더더욱 수상했다.

아, 어떡하지?

차라리 병아리로 다시 변했으면 하고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내가 한 건…… 마법 거울 카트레프티스 뒤에 숨는 거였다.

차락, 입구에 쳐진 커튼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곧장 이곳까지 걸어와, 덮개로 덮인 아티팩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기서 넋을 놓은 듯 침묵했다. 뭐 하는 거지? 뭐가 됐든 좋았다. 그냥 거기서 멍 때리다가 나가! 얼른!

“……괜한 걱정이었나? 어머니도 예전 같진 않으신 건가…….”

간신히 숨죽이고 있다가 헉 소릴 낼 뻔했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이내 그가 움직이는 듯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자 더욱 익숙했다.

“웬일로 일을 완벽히 처리하지도 않으시고…….”

누구였지? 금방 생각날 것 같은데 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이 나를 지배했다.

“여기서 뭐 해요?”

그러느라 그 사람이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젠장. 이 치맛자락이 너무 풍성했나? 숨는다고 숨었지만 어림도 없었나 봐.

확실히 망했다는 감각과 함께 떨리는 얼굴을 돌리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니, 서브 남주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이었다. 저 하늘색 머리카락. 형제와 아비의 것보단 좀 더 푸른 색조가 짙은 청보라 색 눈. 왠지 한량 같은 태도까지.

이번 연회에서 만나길 기대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었다. 이 아티팩트를 가져온 당사자가 메디프다. 보나 마나 주인 의식을 가지고 아끼고 있을 터. 수상쩍게 여기서 거울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안 돼. 부디 변명의 신이 나를 돕기를.

“그러니까 저는…….”

“오필리어?”

엥?

무조건 우연히 들어와 길을 잃었다고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서브 남주님이 나를 알아본다?

“저를 아세요?”

“어, 모르시겠어요? 얼마 전 만났는데.”

“사실은 저도 당신 목소리가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때 저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가 생각나 버렸다. 칼로카이리 축제 광장에서, 내 저주를 풀어 주겠다던 그 수상쩍은 마법사가 저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 물정 몰라서 하루 종일 공치던 주제에 내 현금을 한 번에 뜯어 간 그놈!

“그때 그 마법사…….”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그게 댁이었냐고요!!

메디프가 마법 오타쿠라는 점과 워낙 자유로운 성정이란 걸 고려하면, 신분을 숨기고 축제 현장에서 천막을 운영하는 것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더불어 그 마법사가 그렇게 물가 감각이 없고 모든 물건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던 것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재벌이라 그랬구나.

“다시 만난 김에 소개할게요. 제 이름은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

“페리윙클입니다.”

“예?”

물론 그의 외가는 페리윙클 공작가였다. 하지만 엄연한 황자라는 신분을 내게 숨길 생각인 것 같았다. 얼굴도 형이랑 제법 닮은 주제에.

나는 이 자리에서 그의 풀 네임, 좋아하는 음식, 이상형까지 댈 수 있었다. 메디프의 이상형은 의외로 귀엽고 밝은 여자였다. 그러다 정반대 타입인 벨라를 만나 풍덩 빠지긴 하지만. 우리 벨라가 취향이고 뭐고 다 흔들어 놓을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소개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정체를 아는 티를 낼 순 없었다. 우린 그날 축제에서 처음 만났다. 이 몸, 오필리어 레오라는 벽지인 혼우드 출신. 황자의 얼굴을 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하. 길거리 마법사가 사실 페리윙클 가문 출신이라서 놀라셨나요? 어때요.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죠?”

“아, 하하하…… 네에…….”

“레이디의 이름은?”

“레오라 남작가의 오필리어랍니다.”

결국은 그의 장단에 어설프게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뭔 생각이래?

“아아- 혼우드의 레오라 남작 영애셨군요. 과연. 그래서 서부에서 돌아오시는 황태자 전하와 함께였던 거였네요.”

“아하하, 네네…….”

그는 쿡쿡 웃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문제의 ‘오필리어’가 정말 병아리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저를 포함해서.”

“그래요…….”

“그리고 그 병아리가 이렇게 멋진 아가씨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여전히 극히 적을 테고요.”

“……?”

장난스럽던 웃음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미소가 되어 있었다. 천막에서 대뜸 손잡고 속닥거릴 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도 뭐랄까, 한량이라는 소문이 난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감사합니다? 당신도 멋있어요?

이런 칭찬에 어색한 내가 굳어 있는 동안 메디프는 유연하게도 다음 화제를 던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 용감하게 날아드는 당신을 봤어요. 그분 앞에서 그리 당당히 떠들 수 있는 건 사람과 동물을 막론하고 당신밖에 없을걸요.”

“아, 그건…….”

클레멘츠를 구하기 위해 황제 앞에서까지 작정하고 귀여운 척을 했던 걸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잊어 주시겠어요?”

“글쎄요. 과연 누가 잊을 수 있을까? 제국의 지존께서 작은 병아리의 귀여운 모습에 함락되시던 장면을요.”

망한 것 같다.

“그런데 그 대단한 병아리님께서…….”

한 발짝 다가서는 메디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왠지 날카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 여기까지 들어와서 사람이 되어 계신 걸까?”

아, 그렇구나.

역시 날 의심하는 것이다. 처음엔 반가움에 안부 인사를 했어도, 여전히 아티팩트를 둔 방에 내가 숨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부착된 봉인을 보면 알겠지만, 저 물건은 황가의 보물이에요. 오늘 처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비를 두어 지키고 있었지. 물론 오필리어,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의심하고 있잖아!

“설명 정도는 해 주셔야겠는데요. 아티팩트 보안은 중요한 문제라.”

이쯤 되면 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은 왜 들어왔죠? 황실 관계자도 아니잖아요.”

“2황자 전하께 부탁받았어요.”

그러나 메디프는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그는 제 가슴에 달린 마탑의 마법사 배지를 가리켰다.

폐쇄적인 마탑은 원래 소속된 마법사를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메디프만큼은 마탑 소속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그대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고, 거기에 더해 아티팩트까지 선물로 받았다.

특유의 성격으로 마탑 원로들을 구워삶은 건지, 아니면 실력으로 인정을 받은 건지.

“사실 저도 황자 전하와 동문수학했거든요.”

예 그러셨겠죠……. 저도 저와 동문수학했습니다. 와, 신기하다.

“저라고 갑자기 인간이 될 줄 알았겠어요? 저도 얼마나 당황했다고요.”

이렇게 의심하고 나온다면 나도 다 할 말이 있었다.

“시선을 끌고 있기 피곤해서 가까운 방으로 피신했을 뿐인데……. 제가 마음대로 본모습을 되찾을 수 없다는 건 아시죠?”

200크로나를 괜히 당신에게 뜯겼겠냐고. 눈빛으로 찌르자 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이후에는 들어오자마자 이 물건에서 새어 나온 한 줄기 빛을 받고 사람으로 변해 버린 눈물겨운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덮개에 난 구멍의 출처가 내 발톱이란 점은 쏙 빼놓았다.

“그렇게 된 거군요. ‘카트레프티스’는 사물의 진실을 밝히는 빛이니.”

그는 비어 있던 조각이 채워지자 그것을 제 머릿속에서 맞춰 보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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