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제 나는 여기서 평범한 병아리인 것처럼 졸다가, 간식 먹다가, 사람 구경하다가 적당히 돌아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클레멘츠와 카밀은 여기까지 따라와서 2차전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며.
“어머나, 귀여워라!”
분명 내 전용 라운지인데, 왜 주변에 인간용 의자를 놔서 밀착 구경꾼이 불어난 거지? 댁들 누구세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과연 명가의 여식과 황족이 다툴 만하군요.”
“서부와도 인연이 깊은 제 지인이 얘기하기론, 단순한 병아리가 아닌 엄청난 명품종이래요. 전하께서 5000만 크로나를 주고 간신히 손에 넣으셨다죠.”
“어머나!”
그 헛소문은 아직도 소멸하지 않은 데다가 심지어 열 배로 불어나 있었다.
“진짜 이름은 오필리어 로트링겐 에스텔라시온 앙겔라드 뒤싱겐 13세라죠.”
함께 퍼지던 두 번째 헛소문에도 뭐가 잔뜩 더 붙어 있었다.
“그렇군요! 단순한 병아리가 아니라- 병아리님이네요.”
“그래요. 병아리님이셔요. 그러니 방금 황제 폐하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신 것 아니겠어요?”
못 알아듣는 척하기 힘들다……. 한참 나를 두고 떠들던 두 귀부인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셸 부인은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노란색이 가장 잘 어울리실까요? 아니면 푸른색?”
“제가 볼 땐 역시 지금의 연 파랑이 낫지 않나-.”
거기까지 얘기가 나왔을 때, 주변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대립을 지속하던 클레멘츠와 카밀이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클레멘츠의 입가엔 자연히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지만……. 카밀은 예전의 그 악녀처럼 독기 어린 시선을 쏘아 보냈다.
“이, 이, 이만 다른 곳으로 가 보도록 할까요?”
“그래요. 두 분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병아리님께도….”
그들은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도망치자.
여기 계속 있어 봤자 귀찮은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옆에선 내 두 극성팬들이 끊임없이 싸워 댔고, 새로운 구경꾼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스타의 운명은 고달프구나.
때마침 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이 한 무리 다가왔다.
“카밀, 병아리도 좋지만 계속 여기 있을 건가요?”
“벨레이 영애, 나는…….”
“그러지 말고요. 요즘 만나 주지도 않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단 말예요.”
카밀의 친구로 보이는 그들은 놀랍게도 카밀을 이겼다. 그녀는 반쯤 끌려가듯 하며 마지막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오필리어……! 곧 돌아올게!”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으냐, 오필리어?”
클레멘츠가 지은 승리의 미소도 오래가지 못했다. 곧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던 카시스가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전하,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클랏샤 은행과 관련된 일인데…….”
“……어쩔 수 없군.”
그럼 그럼. 정상적인 로판 남주라면 병아리 지킴이 노릇 이외에 할 일이 많겠지. 나는 잘 가라고 날개를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카밀과 클레멘츠가 떠나서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분산된 사이, 낮은 울타리를 넘어 슬그머니 뛰어내렸다. 더 이상의 구경꾼도 사양이고, 카밀과 클레멘츠가 돌아와 3차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짧은 두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벽으로 붙었다. 애당초 라운지가 홀 가장자리에 설치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대한 외진 곳을 찾아 달리다 보니 연회장 끝으로 오게 되었다.
연회장 끝은 홀의 규모에 비해 작은 통로로 이어졌다. 통로 입구에는 근위병 한 명이 번을 서고 있었지만…….
“아, 교대 시간 얼마나 남았지?”
그는 혼잣말을 하며 하염없이 시계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 통로 안으로 호로록 들어갔다.
안쪽엔 문짝 대신 커튼으로 구분된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연회 준비 공간이라든가, 물품을 잠시 보관하는 창고 같은 거겠지? 딱히 장식 같은 것도 없는 데다 근위병이 지키고 있으니 휴게 공간도 아닐 것이고. 자연히 사람이 들어올 일도 드물 것이다.
저기서 좀 쉬어야겠다.
입구를 막아 둔 커튼 밑으로 나 같은 병아리 한 마리가 드나들 만한 틈이 있었다. 쏙 들어가 보니 예상보다 아담한 방이었다.
아늑하고 따스한 색감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한가운데엔 웬만한 성인의 키보다 높은 물체가 화려한 천에 덮여 있었다. 은은한 조명 속에서 난 그 천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삐약.(이거 그거잖아!)”
황비가 심부름 시킨 물건! 저것 때문에 클레멘츠와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던가.
아, 엔시와 엔시네 할머니는 잘 계신다고 한다. 글로리나 부인의 집에서 일을 거들며 지낸단다. 엔시는 날쌘 몸놀림과 손재주로 적성을 살릴 만한 일을 배우고 있다는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까진 부인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튼 그 덮개가 덮여 있으니 이것이 바로 ‘카트레프티스’. 사물의 진실을 밝힌다는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원작 소설에도 나오는 그것!
연회가 무르익으면 공개하려고 여기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나는 불과 며칠 전 있었던 일의 감회에 젖으며 거울에 접근했다. 그러다 불현듯 멈춰 섰다.
저게 뭐지?
눈을 찌를 만큼 강렬한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닥까지 넉넉히 덮은 거울 덮개의 아랫단 즈음.
출처를 찾아보니 규칙적으로 들어가 있는 황실 문장의 한가운데. 다이아몬드 형태로 간략히 표현된 아다만티스의 머리 부분에, 아주 자그마한 흠집이 있었다. 덮개 전체의 우아함과 장중함에 비해 아주 조악하고 하찮아 뵈는 흠집이었다. 마치 웬 병아리가 발톱으로 쥐어뜯은 것 같은…….
어라?
그럼 저건 내가 낸 흠집이었다. 실수였고, 바로 클레멘츠에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버렸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클레멘츠는 그걸 그대로 황제에게 제출했고. 이렇게 작은 구멍이 난 채로 거울에 덮어씌우게 된 것 같다. 다행히 별 지장은 없는 것 같고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긴 한데-.
“뺫.(어?)”
쓸데없이 자세히 보겠다고 얼쩡거린 게 문제였다. 새어 나오는 빛을 그만 정면으로 봐 버린 내 몸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꼭…….
파삭-.
변신이 진행될 때처럼 말이다. 야단났네.
그제야 관련된 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물의 진실을 밝히는 아티팩트’, ‘평상시 반사면에서 마력을 방출’.
아무 때나 이런 힘이 발휘되는 걸 막기 위해 천을 덮어 마력을 흡수하는 거고. 사물의 진실을 밝히기 때문에, 거울의 빛을 받으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이런 얘긴 안 해 줬잖아!
“하, 젠장!”
불쑥 높아진 시야가 생경했다. 인간 시점으로 보니 정말 병아리 발톱 사이즈의 흠집 따윈 눈에 띄지도 않았다. 왠지 억울했다.
“이제 어쩌지?”
마지막으로 인간 모습이 되었을 땐 잠옷 바람으로 잠들었던 기억이 났다.
세상 번쩍번쩍하게 꾸민 황궁 초대객들 사이에서 잠옷 바람으로 다니기? 열 발자국도 못 가서 끌려 나갈 것이다. 하인 행세를 하기에도 무척 부적절한 복장……일 텐데?
“어? 이게 뭐야?”
답이 없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 머리에 뭔가 튀어나와 있다? 손으로 조심스레 모양을 더듬어 보니, 머리 장식 종류인 것 같았다. 손에 닿는 감각도 맨살이 아닌, 뭔가 부드러운 게 한 꺼풀 씐 듯한 느낌이었다. 양손을 내려 보니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
손목에서 앙증맞게 끝나며 작고 하얀 진주 팔찌가 딸려 있는 장갑. 나는 이 장갑과 맹세코 초면이지만 웬일인지 내 손과 꼭 맞았다. 무엇보다도 장갑의 재질. 내가 고른 연하늘색 새틴이 틀림없었다. 병아리인 내게 달린 리본과, 클레멘츠가 하고 있는 타이와 같은.
당장 내 모습을 전체적으로 확인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거대한 진실의 거울이 있었지만, 원작에서 이 거울에 비친 벨라는 흑표범으로 보인다. 그러니 지금 이 천을 걷어 봐야 보이는 건 병아리일 터.
주변을 두리번대니 다행히 마침 한쪽 벽에 콘솔과 작은 거울이 있었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엔…….
완벽한 무도회 복장을 갖춘 내가 있었다. 아니, 조금 파격적인가?
튀어나온 무언가라고 느낀 건 헤어밴드였다. 역시 드레스나 장갑과 같은 연하늘색 새틴 재질이었다. 와이어를 넣어 모양을 조절할 수 있는 끝부분이 마치 동물의 귀나 새싹처럼 봉긋 치솟아 있었다.
“아…….”
이런 형태의 머리띠를 본 건 칼로카이리 축제에서였다. 정확히는, 내가 만들어 버린 거지만.
엔시까지 셋이 같이 시장을 가로지를 때였다. 어느 의상실 앞을 지나치는데, 가게 바깥에 화려하게 진열해 놓은 리본 뭉치가 눈에 띄었다.
이 시대는 리본이 유행이었다. 각양각색의 리본을 얼마나 잘 쓰느냐로 패션 감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다양한 리본이 시장에 나와 있었다.
개중엔 시폰처럼 흐물흐물한 재질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 기껏 묶어 놔도 모양이 잘 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그래 왔듯 답을 찾았고, 안에 얇은 철사를 넣어 모양을 고정할 수 있는 리본이 이미 보편적이었다.
“클레멘츠, 이것 좀 볼래요?”
“뭐지?”
“유렌이 가져다준 카탈로그에서 봤는데, 올해 여름부턴 이렇게 하는 게 유행할 거래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렌을 팔아 가며 날조해 댔다. 그때 나는 클레멘츠를 괴롭히고 싶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21세기의 한국에도 비슷한 헤어밴드가 있었으니, 모양을 만드는 건 쉬웠다.
그는 내가 멀쩡한 리본을 머리에 묶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신사들 사이에도 번질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요. 어때요, 트렌드 세터가 되어 보시는 건?”
그에게 보라색 리본을 내밀며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뭐든 할 수 있었다. 근엄함을 내던지고 토끼 귀 같은 머리띠를 한 클레멘츠를 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는 쌩하니 찬바람마저 일으키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