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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81)화 (81/218)

81화

“글쎄요. 이 모든 것이 오직 저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을까요?”

수도는 물론 일부 지방 귀족들까지 모여든 연회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메디프.”

“왜 기뻐하시지 않는 겁니까? 어머니. 제가 결국은 돌아왔잖아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모자의 미소는 퍽 닮아 있었다.

메디프는 고요한 수면 같은 표정으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비껴 연회장 너머를 향했다.

“제가 보낸 선물은 잘 처리해 두셨지요?”

“오, 그럼. 물론이지.”

“소중히 다뤄 주세요. 제게 무척 소중한 물건이니까요.”

황비의 그 미소는 이젠 미들 네임이 된 그녀의 성처럼 파란 들꽃 같은 데가 있었다.

“내 아들, 너를 가장 빛내는 것이 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았단다.”

“……그렇군요.”

‘너를 위해서.’

메디프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무엇이건 했다.

천재란 명성을 얻은 황태자에게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냈다.

개화한 재능을 더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마탑에 보냈다.

그리고 학자 행세를 하는 것이 황족 핏줄에 어울릴 리 없으니,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 모든 게 그를 위해서였다. 메디프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따금 모친은 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선하고 순하며, 욕심 없는 황비 클라우디아. 제국민들뿐 아니라 페리윙클 가문 사람들마저 그 인상을 믿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메디프는 그녀가 겉으로 내세우는 성격을 믿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황자의 손톱이 반도 비우지 못한 샴페인 잔을 톡, 토토독 두드렸다. 그 성마른 리듬이 점차 정돈되어 갈 무렵, 연회장의 주의가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가 허리를 숙였다. 홀의 소음을 감싸고 흐르던 관현악도 그쳤다. 정적 속에서 황제는 천천히 걸었다. 그가 걷는 방향에서 사람들이 황급히 떨어져 나와 곧고 넓은 길을 형성했다. 위엄 있는 걸음은 제 맏아들 앞에서 멈추었다.

“클레멘츠.”

“예, 폐하.”

쏟아진 시선들은 그대로 팽팽히 긴장된 수백 수십 개의 실이 되었다. 나이 든 황제가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여는 그 순간이 길게도 느껴졌다.

* * *

오늘 아침까진 참 좋았다.

황궁 무도회란 게 열린다기에 ‘오, 멋지다. 구경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잘 다녀와라 클레멘츠!’ 정도로 생각하고 침대에 뻗어 있었지.

그 클레멘츠 놈이 난데없이 나를 파트너로 정했다며 끌고 온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병아리를 무도회 파트너랍시고 데려왔으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갈 일이지. 굳이 도발해 오는 카밀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놈의 청황 논쟁……! 끝까지 지지 않으려 드는 카밀이며 말리긴커녕 편들고 드는 카시스는 또 어떻고!

“베일리스 영애. 자랑할 수준은 아니지만 저도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필리어 님께서 걸치셨던 수많은 색 가운데 단연 푸른색이 최고였습니다.”

“경은 뭘 모르면 끼어들지 마세요.”

이 넓은 홀 안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들에게 ‘여길 좀 봐 주세요!’라고 비명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이젠 황제마저 이 난장판을 정면으로 봐 버린 상황.

이쯤 되면 모나한 백작가에서의 만찬은 그저 펼쳐질 미래를 위한 예행연습이 아니었나 싶기까지 했다.

내 머릿속에 살며 ‘이, 이러면 안 돼! 아,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줄기차게 외쳐 대던 놈이 방금 전 ‘에이씨, 안 해!’라며 짐 싸서 떠나 버렸다.

황제. 당장의 문제는 대면한 황제였다. 가족 식사 자리 이후로 두 번째로 본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보아하니 결코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클레멘츠는 차분하게 부황에게 예를 취했다. 하지만 나를 받쳐 든 손을 제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내심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긴장된다!

“대체 이게-.”

안 돼! 이 아버지가 되다 만 황제 아저씨, 또 뭐라고 소리 지를 생각인 것 같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클레멘츠를 갈구고야 말 거라고 생각하니 더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삐, 삐약!”

그간 찌그러 들어 있던 나는 활개 치며 일어났다. 황제의 근엄하고 매서운 눈빛과 함께 내게 시선이 쏠렸다. 젠장. 이제 어쩌지?

사실 딱히 구체적인 해결책은 없었다. 주변에 마침 또 수레국화 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 대충 플랜 A로 가자.

플랜 A란 귀여운 척이었다. 카밀 때도 그렇고, 일단 귀여움을 어필해서 만사가 잘 해결된 경험을 축적한 결과였다. 그렇다. 모두가 오냐오냐 예뻐해 줬더니 나는 버릇이 나빠졌다.

이 넓은 데 모인 이들이 다 같이 침묵하니 무서운 정적이 흘렀다. 간간이 기침 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 사이로 내가 날개 치는 소리도 들렸다.

포로롱.

“오필리어!”

나는 대뜸 황제의 품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슨……!”

초여름에도 풍성한 털이 달린 옷을 입고 있기에 여차하면 거기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알 굵은 반지를 낀 손을 순발력 있게 뻗어 나를 받아 냈다.

순조롭게 안착했으니 다음 단계를 실행할 차례였다. 마침 손바닥 위였으니 효과는 두 배다! 카밀 역시 아마 손바닥에 올라가 애교 부리는 나를 본 그때부터 태세가 바뀌었던 것 같으니까.

“뺘아-(이렇게 울면) 삐잇?(대충 귀엽게 들리겠지?)”

목을 움츠리고 솜털을 가능한 풍성하게 부풀렸다. 하, 이런 게 뜻대로 되다니 왠지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깎여 나간 것 같지만, 다 생존을 위해 발달한 기능인걸.

색감만 아들과 판박이인 보라색 눈동자가 동요하는 게 보였다. 기습이라도 당한 듯한 눈이었다.

“클레멘츠, 네 녀석-!”

그리고 뭔가 클레멘츠를 꾸짖을 자세를 취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귀족들이 새삼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힐끔대던 이들은 황급히 도로 허리를 숙였다.

내 프로 병아리 경력(약 3개월)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이다!

여러분은 장르 소설 최초로 황제(남주 아빠)의 손바닥에 드러누운 병아리를 보고 계십니다.

경험상 이 방법까지 쓰면 백발백중 뭔가 반응이 있었다. 설령 거부감이 들어 던져 버리거나 할 수는 있어도 무반응인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고 입을 열었다.

“허, 나 참!”

“삐요.”

함 봐주십시다. 우리 구면이잖아요.

“하! 거참…… 무엇들 하고 있지? 이 황당한 병아리를 어서 옮겨라.”

“예, 폐하.”

역시. 이런 공공연한 자리에서 그 같은 권력자가 나처럼 연약한 어린 동물을 심하게 대할 리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서 으쓱대며 웃었다.

황제 옆에 붙어 있던 수행원들 중 하나가 나를 가져가려 했다. 그때, 클레멘츠가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데리고 있지.”

황태자의 명을 무시할 수 없어 수행원은 다소곳이 손을 내렸다. 황제는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클레멘츠를 보았다. 여전히 ‘으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황태자, 어지간히 하고 본분에 충실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폐하.”

“크흠. 그리고…….”

대 클라티아 제국의 폐하께서는 못마땅한 눈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셨다.

“너희는 황태자가 계속 병아리를 들고 다니게 만들 셈이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도록.”

“분부 받들겠습니다.”

오, 듣던 중 반가운 일이었다. 이대로 연회 내내 클레멘츠의 손바닥에 박제되어 있는 건 나도 사양이었으니까.

대충 고마운 일까지 해 주셨으니, 예를 취하기로 했다.

“삑삑.(성은이 망극.)”

발랑 고꾸라졌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이 병아리 몸의 구조가 허락하는 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는 대신 양쪽 날개를 반쯤 폈다.

그러자 ‘허! 나 참, 원! 참, 하!’라는, 서너 음절로 이뤄진 추임새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음, 알지 알지.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삐이.(봤냐? 세상은 귀여움이 지배하는 것이다.)”

황제까지 귀여움으로 굴복시켰으면 대충 세상을 제패한 것 아니겠는가?

뿌듯하게 가슴을 펴며 돌아오는 나를, 클레멘츠는 세상의 어처구니를 모두 털린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다 해 먹거라.”

“뺘.(암요.)”

상황이 종료되자, 귀족들은 뭐에 홀린 사람들처럼 터덜터덜 연회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방금 뭐였지?’라는 의문을 간신히 제기해도, 머리가 해석을 거부해 버렸다. 마치 후작의 생일연 때 초대되었던 객들처럼.

하지만 그들 가운데 한 명, 몹시 합리적인 추론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제의 병아리 때문에 이미 한 번 굴욕과 망신을 당했던 당사자, 베일리스 후작이었다.

“…저 녀석, 병아리 아닐지도 몰라…….”

지나다니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귀족들은 무슨 소리냔 듯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우연한 지혜의 말은 허공에 허무하게 녹아 사라졌다.

* * *

이게 뭐예요.

이래선 별로 달라진 상황도 아니잖아.

“회피하지 마시죠, 전하. 여전히 저는 오필리어에게 어울리는 옷, 어울리는 음식, 어울리는 방을 줄 수 없다면 오필리어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내가 다 해내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뭐지? 주제넘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나?”

황제의 명에 따라, 그레이트 홀 한쪽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전용 라운지가 즉석 설치되었다.

밟혀 죽지 않도록 충분히 높인 단 위에 전용 방석이 놓이고, 내가 자주 먹는다고 알려진 곡식과 과일들이 작은 그릇에 담겨 아담한 받침대 위에 놓였다.

떨어져 죽지 않도록 단 주변에 울타리가 쳐졌다. 따스한 빛을 뿜는 조명 마법 구도 주변에 몇 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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