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오필리어의 리본이 어떻단 말이지?”
“기가 차군요! 설마 정녕 모르시는 건가요? 오필리어에겐…….”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카밀은 힘주어 외쳤다.
“오필리어에겐 노란색이 제일 잘 어울린단 말입니다!”
“무슨 소리지?”
클레멘츠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노란색이라니, 오필리어에겐 이미 노란색이 한가득이지 않은가. 안목이 수도 최고라는 명성이 그야말로 헛되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색이다.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하하하하……. 물론 오필리어에겐 세상의 그 어느 색이든 잘 어울립니다. 전하께서 고르신 그 안쓰러운 하늘색마저도요.”
그들은 어느새 바늘 하나 끼어들 틈 없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황태자 편을 들려던 카시스 듀프레마저 심각한 눈으로 상황을 관전할 뿐이었다.
“삐-빠힉…….”
병아리가 애처롭게 삐약거렸다.
“허나, 오필리어가 가진 본연의 순수한 매력을 가장 잘 끌어올릴 방법도 모르신다면- 여름 무도회 파트너 자리도 내놓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쓰러운 건 그대다, 베일리스 영애. 물론 오필리어는 가장 순수하고 그 면이 아름답지. 하지만 이 아이를 무엇보다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건…….”
“뺙삐힉!”
“청초함이야.”
“…….”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카밀이 듣고 보니, 오필리어의 청초함은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시 보니 저 푸른 리본과 물방울처럼 반짝이는 작은 보석들이 그리 미워 보이지 않았다.
클레멘츠 역시 오필리어의 순수함이 더 강조되어야 함에 동의했다. 이 세상 최고의 노란색을 좀 더 보란 듯이 세상에 퍼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역시 양보할 수 없었다. 두 시선이 다시 첨예하게 부딪쳤다.
“그래도 푸른색이다.”
“아뇨, 누가 뭐래도 노랑입니다.”
스스로도 몰랐지만, 두 사람은 오필리어와 어울리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각기 자신의 눈 색과 좀 더 가까운 색을 밀고 있었다. 녹색과 노란색, 보라색과 파란색.
역시나 그 마음을 모르는 당사조(鳥)는 생각했다.
‘이 하늘색 내가 고른 건데…….’
침울해진 병아리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필리어 님! 어서 골라 보세요.”
“어떤 옷감이 가장 좋으세요? 보석은요?”
“곧 있으실 여름 무도회에서 분명 가장 돋보이실 거예요!”
병아리 오필리어를 모시는 두 메이드, 유렌과 카렌은 주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옷감과 보석을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고급 야회복의 재료였다.
“삐이약.(무슨 소리야.) 뺘삑 삐약 뺘?(내가 무도회에서 돋보이면 안 되는 거잖아.)”
대체 왜 이런 짓을? 병아리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으나 메이드들은 막무가내였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 취향껏 골라 보세요. 오필리어 님.”
“삐휴우.”
클레멘츠 녀석. 왠지 점점 가면 갈수록 괜한 짓의 정도가 심해졌다. 한사코 거절할 수 없어서 찬찬히 고르다 보니 점점 즐기게 되었다.
“삐익.(이거 예쁘다!)”
“어머, 부드러운 하늘빛이 오필리어 님과 너무 잘 어울려요!”
“삐삣.(이것도!)”
“어쩜! 이 투명한 보석까지 붙이면 그야말로 요정 같으시겠어요!”
오필리어가 부리로 콕 찍어 건네자 메이드들은 기뻐하며 꺅꺅거렸다. 그렇게 고른 것들로 머리 장식과 리본이 준비된 것까진 좋았다.
“가자, 오필리어.”
“삐비육.(어딜……?)”
오필리어가 고른 것과 같은 새틴으로 만든 베스트가 눈에 띄었다. 동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클레멘츠는 빙긋 웃었다.
“무도회에 가야지. 에스코트하마.”
아무리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이곳이었다. 오필리어는 아직도 파란색이니 노란색이니, 청초니 순수니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크나큰 고통을 견뎠다.
‘아아, 왜 이렇게까지……!’
시선을 어디로 돌려 봐도 이쪽을 주시하는 귀족들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클라티아의 수도 귀족. 어쩌면 읽던 소설의 등장인물이었을 수도 있는 이들.
그들과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마주쳐야 하다니. 꿈에 그려 오던 무도회에 입성했음에도 병아리는 점점 침울해졌다.
한편 그저 경악과 호기심이 아닌 다른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황비의 친정인 페리윙클 가문을 필두로 하는 2황자파였다.
“황태자께서 대체 저게 무슨 일이시란 말인가.”
“물론 황실 행사이니 주역이 되실 순 있다지만, 이번 연회는 2황자 전하의 환영연이 아니오?”
그들은 난감함에 슬쩍 적대감을 섞어 황태자와 문제의 병아리를 주시했다. 황비의 삼촌인 조슈아 페리윙클 역시 과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아무리 메디프 황자께서 주목받는 게 싫으셨어도 저런 무리수를 두시다니.”
가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석 지팡이가 신경질적으로 대리석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유일한 적자인 클레멘츠는 날 때부터 황태자였지만, 황제는 그에게 변덕스럽고 냉혹했다. ‘네가 어찌하느냐에 따라 보위를 넘겨줄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줄기차게 해 대는 판에, 사실상 다음 대의 황제가 누구일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2황자의 귀환은 황태자에게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2황자는 나이도 찼으며, 몇 대 전 샹그리아가 대신 3대 세력 가문으로 우뚝 선 페리윙클 가문이 비호했다. 심지어 아티팩트를 받는 것으로 마탑의 인정까지 받았다.
“알려진 것과 달리 체통도 품위도 없는 분이 아닌가.”
“이제 마음이 조급해지신 건가?”
그들이 애써 근거 있는 험담을 해도 타격감이 없었다. 그 옆에서, 이전의 고상하던 모습에 비하면 바락바락 악쓰다시피 하는 카밀 드 베일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우아한 몸가짐으로 너무도 정평이 나 있던 이들이어선지, 사실을 이야기함에도 오히려 그들의 문제 제기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대체 저게 무슨 일이지? 베일리스 후작.”
적의 적은 친구가 되는 법.
황태자에게 붙은 듀프레 후작 휘하의 동부 귀족은 예로부터 황족을 옹호했다. 자연히 귀족의 권리를 부르짖는 중부의 귀족파는 굳이 따지자면 2황자에게 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귀족파의 필두인 베일리스의 딸은 황태자비가 되겠다며 패악을 부리고 다니더니, 이제는 웬 병아리를 두고 황태자와 다투고 있다.
차라리 황태자비가 정말 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카밀을 통해 황태자에게 귀족파의 입김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 지금 저 꼴은 대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하도 유치하게들 싸우고 있어서 차라리 같이 노는 걸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이성 대 이성으로서의 끌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베일리스는 이미 황태자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오?”
“하,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페리윙클 공작. 그저 철없는 내 딸의 일탈일 뿐이오.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황태자 전하께 마지막 원망을 쏟아 놓는 게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런 겁니다. 달리 뭐가 있겠소.”
베일리스 후작은 검은 연미복 주머니에 꽂아 뒀던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카밀, 네 이 녀석!’
꾸준히 아비 속을 썩이더니 이제는 완전히 엇나가고 있었다.
황태자의 후계자 위치가 불안정한 데엔 사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황실의 수치와 관련된 극비 사항이었다. 오로지 중앙 정치에 발을 담근 지 오래된 귀족들만이 어렴풋이나마 그 내막을 알았다.
안 좋은 소문을 은근슬쩍 뿌리기에 귀족이란 귀족이 다 모이는 여름 무도회만큼 좋은 기회는 없었다. 메디프 2황자에 대한 인식은 아티팩트를 선보이고 나면 자연히 좋아질 테니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이게 뭐란 말인가? 저분께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다더라, 하는 소릴 흘려 봤자 ‘뭐요? 허허. 반려동물을 지나치게 아끼신다는 점?’ 정도의 반응이나 돌아올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미 화제성을 소용돌이처럼 끌어모아 버린 병아리 때문에.
‘대체 저 병아리가 뭐길래……!’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병아리를 보며 제 지지자들이 복장을 터뜨리건 말건, 정작 2황자 메디프는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예요. 귀엽지 않나요?”
그의 옆에서 샴페인을 홀짝이던 어느 귀족가의 영애가 수줍게 웃었다.
“네, 귀여워요. 황자님.”
“물론, 오브론 영애의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매력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요.”
꽃 장식으로 머리를 올린 오브론 영애는 얼굴을 붉혔다.
마탑으로 가기 전만 해도 소년의 느낌이 짙었던 2황자는 어느새 남성의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생김새 자체는 황태자와 비슷했다. 그러나 어딘지 차갑고 신비로운 황태자와 달리 2황자는 여유와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청량감을 주는 하늘색 머리가 그런 분위기에 아주 잘 어울렸다.
“황궁 연회라고 늘 엄격할 필요가 있을까요. 가끔은 저런 일도 있어야죠. 안 그런가요, 실비아?”
그는 실비아 오브론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곧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소녀가 바람을 쐬겠다며 물러갔다.
메디프는 정말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웬 병아리가 저에게 왔어야 할 관심을 전부 끌어가고 있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필리어.’
그는 저만 아는 인사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살풋 웃었다. 그리고 샴페인 한 모금으로 입을 적셨다.
“메디프.”
메디프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너를 위한 밤이로구나, 내 사랑하는 아들.”
심기가 불편한 와중에도 클라우디아의 얼굴은, 재회의 기쁨에 넘치는 자애로운 어미의 미소를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너를 위한, 밤 말이다.”
‘너를 위한 밤에 다른 이들이 네 몫을 취하는데 어찌 즐거워하고 있니?’
그런 힐책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메디프는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