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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79)화 (79/218)

79화

그들의 속내만큼 빤한 것도 없었다. 황태자의 그림자는 차가운 눈으로 세 건달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더러운 자들. 성문에 도달하는 순간 가방은 빼앗기고, 저들은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마저도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편 황비는 그렇게 술수를 부리고도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림자는 기지개를 켜며 새벽까지 이어진 근무에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모든 것은 황태자 전하의 뜻대로. 그리고…….’

오늘의 일은 평소보다 훨씬 흥미롭고 보람찬 데가 있었다. 그는 주군의 곁에 있던 자그마한 여인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 *

여름 축제 칼로카이리의 마지막 날. 황궁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마탑에서 돌아온 2황자 메디프의 환영연도 겸해졌다.

맑은 저녁. 그레이트 홀 앞에 마차들이 줄을 이었다. 연회장 대문 앞에서 황궁 정문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밝혀진 등이 귀빈의 길을 비춰 주었다.

문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화려한 별세계가 나타났다. 샹들리에 불빛이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었다. 하인들은 바삐 음식을 나르며 먹음직스러운 향과 훈기를 퍼뜨렸다. 열대의 새처럼 치장한 초대객들로 넓은 홀이 꽉 채워졌다.

제국 전통의 대축제인 만큼, 클라티아의 귀족이기만 하다면 참여 자격은 충분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재력과 인맥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와 파벌을 확인하기 위해 모여든 전장. 유행에 맞는 꾸밈새, 온몸에 바른 보석과 정제된 미소. 대화에 교묘하게 섞을 비밀과 험담이 그들이 준비한 무기였다.

허나 그들은 각오한 전투도, 투지도 잊어버렸다.

평민들이나 보는 저급한 신문에서 족히 열흘은 떠들어 대던 그 ‘병아리’, 오필리어를 귀족들은 눈앞에서 맞닥뜨렸다.

황태자가 여름 무도회의 파트너로 병아리를 데려온 것이다.

“저게 대체 무슨…….”

올해 24세를 맞은 황태자는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한 사내였다. 그들이 숭배하는 황실의 유일한 적자.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 반대파조차 공공연한 공격은 할 수 없는.

평소처럼 진중하고 격식 있으면서도 밝은 색상의 포인트로 여름 무도회에 알맞은 명랑함까지 갖춘 의상. 누구나 매력을 느낄 만한 모습이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에 소녀들은 먼발치에서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손바닥 위에 저 병아리만 없었다면.

동그랗고, 작고, 아주 폭신폭신해 보이는 병아리였다. 병아리의 머리와 통통한 목에 묶인 리본은 황태자의 연회복 안으로 살짝 보이는 베스트와 같은 밝은 하늘색 새틴이었다.

“삑- 삐익-.”

병아리는 무척 순했다. 가만히 그의 손바닥 위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황태자를 향해 삐약거렸다. 그러다가 나중엔 왠지 축 늘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황태자는 진지했다. 모두가 그를 향해 ‘도대체……?’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어도 그는 진지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손바닥 위의 병아리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부 시찰 이후로 요상한 염문을 퍼뜨리더니, 베일리스 영애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모두가 그것이 어떤 여성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었다. 정체를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천하거나, 외부로의 조금의 노출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황태자가 총애하기에.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든, 사람 대신 병아리를 내세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내세울 필요가 있나? 조금 지나치지 않나?

설마…… 총애한다는 ‘오필리어’는 정말 그냥, 병아리에 불과한가?

“전하께서…….”

그와 가깝던 귀족들조차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뭐라고 인사하지? 전하, 병아리와 참 잘어울리십니다? 병아리님께서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실례지만 제정신이십니까?

그레이트 홀의 광활함이 무색할 만큼 모여든 이들이 하나같이 병아리라는 난제에 부딪혀 헤매는 사이, 당당하게 그의 옆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3대 세력 가문의 가주 중 하나, 카시스 듀프레였다.

“역시 전하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게히렌 새틴이 오필리어 님과 전하께 모두 잘 어울리는군요.”

“신경을 좀 썼지. 오필리어의 첫 사교계 데뷔 자리가 아닌가.”

“탁월하십니다. 곧 있을 춤 시간이 기대되는군요.”

춤? 병아리와 춤까지 추겠다는 거야?

듣지 않는 척, 다른 이와 대화하는 척, 다른 곳 보는 척하고 있어도 모두의 귀는 그쪽으로 쫑긋 열려 있었다. 황태자와 듀프레 후작이 주고받는 대화 사이로 병아리가 끊임없이 삐약거렸다. 어쩐지 구슬프게 들리는 새소리였다.

카시스 듀프레. 그는 선하고 정직한 신사로 정평이 났지만, 황태자를 향한 오래고 한결같은 충심으로 더 유명했다.

과연 황태자의 수석 보좌인이자, 예부터 황실과 인연이 깊고 충의를 중시하는 동부 귀족의 대표자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그 충성심은 가끔 앞뒤 가리지 않을 만큼 과도하다는 뒷말이 있었는데, 귀족들은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확인받는 셈이었다.

저런 모습까지 긍정하는 거야? 연회 자리에 병아리를 데리고 나왔는데?

나름대로 가신으로서 주군을 모신다는 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반성했다.

‘나는 평소 저렇게 주군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충성을 바쳤었나?’

반대로 카시스 후작을 반면교사 삼는 이들도 있었다.

‘제국 최고의 충의는 무슨……. 나는 저렇게까지 아부하지는 말아야지.’

아무리 주군이라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렇게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또 하나의 주목 받는 귀족이 나타났다.

“하하하…….”

베일리스 후작 영애, 카밀이었다. 분명 연회마다 황태자를 따라다니며 환심을 사려고 애쓰던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다가오는 자세부터가 예전과 달랐다.

저 헛웃음이라니. 뜻 모를 분노에 찬 안광이라니.

지켜보던 귀족들은 돌변한 기세에 흠칫했다.

후작 영애가 병아리를 두고 황태자 전하와 결투를 벌였다던데, 설마……!

평민들이나 보는 일간지라 하여 무시하면서도 은밀히 잘만 구해 읽은 그들이었다.

“뭐지? 카밀 드 베일리스.”

“베일리스 영애 아니십니까. 오필리어 님과 관련된 문제는 전부 조정이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 허락 없이 오필리어의 반경 3키보스 이내에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삐, 삐약. 뺙삐야악-.”

……소문이 사실인가? 귀족들은 이제 노골적인 시선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베일리스 영애 쪽을 주목했다.

카밀은 들고 있던 부채를 기세 좋게 쫙 펼쳤다. 그러곤 분노를 담아 팔랑팔랑 부쳐 댔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말하는 모습은 전과 다름없이 우아하고 오만했다.

“기어이 그 아이를 무도회에 데려오셨군요.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마치- 하! 마치 오필리어가 전하의 것이라도 된다는 것마냥…….”

“틀린 말은 아닐 텐데?”

“후후후……. 틀린 말이, 아니라…….”

“그럼 오필리어가 그대 것이라도 된단 말인가? 황당함이 도를 넘어 이젠 반응해 줄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군.”

카밀은 그림이 그려진 이국의 비단 부채로 입을 가렸다. 웃음의 소리와 크기, 부채를 잡은 손의 동작.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러니 아무도 부채 뒤에서 그녀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는 것까진 알 길이 없었다.

“더 이상은 참고 두고 볼 수가 없군요, 황태자 전하.”

“이쪽이 했어야 할 말을.”

“우리가 각자의 이름을 걸고 한 결투는 헛것이었나요? 분명 일주일에 한 번은 제게 오필리어와 점심식사를 함께할 권리가 있는데.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피하시더군요. 황실의 공의가…… 하! 제국법의 공정한 집행자이신 전하께서!”

“……핑계라니? 지금 내게 얼마나 무엄한 모독을 퍼붓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전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충분히 설명했을 터.”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듣던 귀족들의 마음속에 격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둘의 결투를 두고 가장 지지를 얻던 가설은 ‘사랑 싸움론’이었다. 병아리를 내세워 대신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간 쌓여 있던 감정을 해소했다는.

그런데 저 분위기가 서로 좋아하는 연인들의 티격태격인가? 아닌데? 누가 봐도 개싸움 중인데?

“그렇습니다. 베일리스 영애, 이런 기쁜 자리에서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카밀은 끼어드는 카시스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이것 봐요. 제국 제일의 신사라는 당신이 대답해 보시지요, 듀프레 후작. 당신 주군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지.”

“그야……!”

“제가 아니라 당신의 양심에 대답하란 말입니다!”

기세 좋게 일갈한 카밀은 좌중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이스밀 부인! 당신이 주관한 결투잖아요. 나와서 뭐라고 좀 해 보세요!”

매서운 녹안이 스쳐 가자 귀족들은 흠칫거렸다.

“이스밀 자작 부인은 어디 있지?”

화제의 그 결투에서 심판을 본 주체가 카밀의 먼 친구인 이스밀 자작 부인이라는 이야기도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스밀 자작 부인은 자리에 없었다. 친한 친구들과 새벽까지 카드놀이를 하던 그녀는 연회 준비를 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일어났다.

‘내년에 가지 뭐…….’

워낙 세상사에 초연한 그녀는 일 년에 한 번뿐인 황궁 여름 무도회를 과감히 제껴 버렸다.

‘안 왔잖아! 이스밀 부인 당신……!’

그런 고로 제 편이 되어 줄 심판이 나타나지 않자, 카밀은 작전을 바꾸었다. 황태자가 오필리어를 보란 듯 데리고 다니는 상황 자체가 극도로 싫었지만, 유독 거슬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 그게 최선인가요?”

“최선이다.”

클레멘츠는 무엇이 어떻게 최선이냔 건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이 대화를 더 이어 나가기 짜증 난다는 듯 내뱉었다. 하지만 카밀은 굴하지 않았다.

“하하, 최선일 리가요! 뭐죠? 그 창백한 리본은?”

자신과 야심차게 맞춘 오필리어의 리본이 도마에 오르자, 클레멘츠의 자색 눈에 적극적인 적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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