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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78)화 (78/218)

78화

“당신에게도 있지 않았나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일이요.”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부드럽게 구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있었다.”

“그렇죠? 그건 힘든 일이잖아요!”

내 대답은 다 끝났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클레멘츠는 아직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 눈빛만으로 뭔가를 요구하는 상사는 싫어! 숙연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내 입술이 계속 움직였다. 일단 띄우자! 비행기를 태우고 보자!

“전하께선 이 나라의 미래시잖아요? 능력도 출중하시고. 앞날이 탄탄대로시고……!”

“……?”

갑자기 아부로 흐르는 화제에 클레멘츠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 제길. 눈치 빠르긴. 얼른 원래 화제와 이어 놔야지.

“원하기만 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실 수 있잖아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크, 자연스러웠다. 제법 끝마무리 같은 말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됐겠지?

저 말은 진심이었다. 좋은 황제가 된 그의 옆에 벨라가 있진 못하게 됐지만, 여전히 둘의 앞길이 밝기를 바랐다.

성군 클레멘츠. 오래고 안정된 치세. 그거면 딱 좋았다. 먼 변방에서 바라보기에도, 주인공이었던, 혹은 주인이던 그를 추억하기에도.

이윽고 그가 미소 지었다. 휴, 좋았어.

어쨌든 성공리에 면담을 마친 모양이었다. 나름의 보상도 있었다. 그는 마차 한쪽의 보존 상자를 열었다.

먼 길을 오가는 귀하신 분들이 배곯으시지 않도록, 고급 마차에는 보통 식품 보존 마법이 걸린 상자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뚜껑이 열린 상자에서 나는 냄새의 정체를 나는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레몬 크림 파이가 한 뭉텅이 내 품에 안겨졌다.

세, 세상에. 구워 내자마자 바로 보존 상자에 넣어 둔 듯, 아직 따뜻하고 바삭거렸다.

“먹어도 돼요?”

“다 네 거다.”

세상에!

갑자기 너무나 큰 기쁨의 파도 속에 잠겨 버렸다.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어떻게 이게 지금 내 손에 들어왔는지 큰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2순위였다. 1순위는 내가 먹어 주기만을 바라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레몬 크림 파이였다.

불과 얼마 전 코스 식사를 배불리 마쳤지만, 난데없는 감정 소모와 면담으로 인해 기력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간만에 먹었더니 훨씬 더 맛있었다.

“이거 진짜 맛있는 거거든요.”

“그래 보이는군.”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하나를 해치우고 두 번째 파이를 손에 들었다.

“이걸 혼자서 다 사 간 독한…… 아니, 화끈하고 멋진 분이 바로 전하셨군요.”

분명 좋은 건 혼자 독식하려는, 자본이 낳은 괴물, 세상을 삭막한 장소로 만드는 돈 많은 먹보 자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취소입니다. 다 피고용인을 보살피려는 갸륵한 마음씨에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제가 오해를.

그에게도 하나 권했지만 그는 내가 먹는 걸 구경하는 게 더 재밌다고 했다. 아마 내가 웃기게 먹나 보지, 젠장.

“제가 이걸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짙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했다. 그는 조용히 있다가 픽 웃었다.

“네가 거기 줄을 서 있었으니까.”

……?

“그럼 제가 잔뜩 기대하면서 줄 서 있는 걸 알면서도 다 사 가시고, 더 이상 못 팔도록 주인아주머니께 웃돈까지 얹어 주셨단 말씀인가요?”

“그랬지.”

이놈은 싹싹 비는 나에게 풀타임 병아리 저주를 씌울 때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 놈이다. 파이를 먹다 말고 썩은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뭐가 좋은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주먹이 운다.

“전하 성격 진짜 이상하세요.”

하지만 결국 오늘의 레몬 크림 파이는 전부 내 품 안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상당히 관대해질 수 있었다.

“사실 저도 선물이 있어요.”

레스토랑에서 음식 나오기 전에 살짝 나가서 사 왔지롱. 그사이에 엔시를 놓치고 말았지만.

“선물? ……나에게?”

직접적인 디스에도 은은한 미소만 짓던 황족은 선물이 있다는 말에 턱을 괸 자세를 바로 했다. 훗. 역시 선물은 신분을 막론하고 먹히는 것이다. 숨겨 두었던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클레멘츠가 종이 포장을 풀자 자색 보석이 들어간 커프스 버튼이 나왔다.

칼로카이리 노래 대회 3등 부상은 현금 100크로나와 의상실 예약권. 어차피 병아리로 지내는 터라 의상실 예약 같은 건 전혀 쓸모없었다. 하지만 마침 레스토랑과 가까운 곳이라 신속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예약권 금액이 생각보다 넉넉해서 나름 좋은 걸로 골랐으니 그의 눈에도 괜찮아 보일 거다.

“다 같이 있었는데 상을 받았다고 엔시만 챙겨 주면 전하께서 서운하실까 봐요.”

“별 걱정을 다 했군.”

“흥, 말로는 일축하고 있지만 표정은 솔직하군요.”

광대뼈가 승천할 기세로 웃고 있잖아. 마음에 들어하는 거 다 알아. 나는 씩 웃었다.

“축제 구경, 같이 해 줘서 고마워요. 전하.”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웬일인지 훈훈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이때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고.

* * *

밤이 깊어 갔다. 침실에서, 클레멘츠는 오필리어가 선물한 커프스 버튼을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이 물건을 고를 때, 그녀가 자신의 눈동자를 생각했을 거라고 추측하면 더더욱. 그리하여 보는 순간순간마다 뿌듯해질 물건이었다.

이것을 착용하고 다닌다면…….

자연히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오필리어가 제 손으로 고른 선물을, 오필리어의 흔적을. 숱한 다른 눈들이 스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역시 고이 숨겨 두고 저 혼자만 보아야 하나. 그녀의 선물을 지니고 다니고 싶은 마음과, 보는 것마저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혼란 속에서 클레멘츠는 기억을 되짚었다.

“전하께선 이 나라의 미래시잖아요?”

“원하기만 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실 수 있잖아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그는 눈앞의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될 생각도 한 적 없었다. 그저 쏟아져 들어오는 기대에 맞춰 스스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게 다였다.

제국의 희망이라며 그를 찬양하는 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많았다. 그건 그저 듣기 좋은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진심으로 그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그런데 왜, 너는.’

왜 하필 그런 걸 기대하는가. 더 많은 기회를, 많은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라 함은 대중을 의미했다. 그 개개인은 약하고 힘이 없으며 위해 주어도 돌아오는 게 없었다. 그런 건 정치가 아니었다.

완벽한 후계자가 되어 달라. 혹은 태자비의 자리를 약조해 달라. 하다못해 당신의 마음을 달라 기대했다면 그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클레멘츠는 곤혹스러웠다. 생전 처음 떨어진 숲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당신에게도 있지 않았나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일이요.”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주문. 그리고 누구도 던진 적 없었던 질문은 그를 망망한 의식 속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 클레멘츠는 문득, 아주 오래전 잊어버렸던 의문을 발견했다.

“폐하, 저는.”

“대체 얼마나 더 짐을 실망시켜야만 직성이 풀리겠느냐! 나가거라!”

뱃속에서 움트고, 꺼내 보이자마자 짓밟혔던 싹. 거기서 자랐을지도 모르는 가지. 맺혔을지도 모르는 열매의 이름은 그였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그는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열매를 찾아 손을 휘저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지?’

이윽고 고요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 * *

“허…… 헉.”

수도 외곽. 다 무너져 가는 판잣집 앞에 쓰러져 있던 세 남자는 눈을 떴다.

한밤중에야 일어났지만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 몸도 개운하니 말짱했다. 마력 환각제인 희석된 하빌 뿌리의 덕이었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괘씸한 엔시 녀석…… 도망친 할망구…… 그 미친 병아리…….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정황이 머릿속에서 안개 낀 듯 희미했다.

“일어났군.”

낯선 목소리에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어둠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 잿빛 망토를 쓴 사람. 목소리마저 막을 뒤집어씌운 듯 희끄무레했다.

“누, 누구?”

“그러고 보니 시간은? 거래 물품이…….”

“엔시 그 쥐새끼! 물품을 훔쳐서 도망갔어!”

“그럼 우린 이제 어떡하지?”

거물의 의뢰를 놓쳤다! 낭패감에 빠진 무리를 달랜 건 망토를 걸친 의문의 인물이었다.

“진정해라.”

그는 익숙한 천 가방을 내밀었다.

“너희가 찾던 것이다.”

내용물을 확인한 건달들은 안도했다. 엔시가 속여 던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이 고급스러운 천이야말로 의뢰자가 원하는 진짜 물건이 분명했다.

“엔시에게서 도로 빼앗아 온 거요? 그 애를 어떻게 했는데?”

망토를 쓴 사람은 미세하게 웃었다.

“뭐,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셋은 순간 오싹했지만,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깟 버릇없는 쥐새끼 죽든 말든 알 게 뭐람.’

기척이 거의 없는 걸 보아 이 회색 망토도 이쪽 업계 실력자인 모양인데, 의뢰 보상금을 떼어 먹으려고 개입한 것 같았다.

‘1천 크로나라면 위험한 놈들이 냄새 맡고 달려들 만도 하지.’

‘제길, 이래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건만!’

그 덕에 어쨌든 물품을 확보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어느덧 동이 터 올 시간이었다. 세 패거리는 약속 장소인 내성 서문으로 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고맙소. 아마 눈치챈 모양이지만 포상이 두둑하게 걸렸어. 형씨에게도 확실히 몫을 떼어 주지.”

물론 불량배들은 그와 몫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돈을 받자마자 수도를 떠 버릴 생각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비켜서는 회색 망토를 속으로 비웃었다.

‘병신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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