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분명 평화적으로 돌려받게 되실 거예요.”
“그 애가 범인인 줄 모르고 있다고 할게요. 거기까지만 맞춰 주세요.”
이미 저 도둑을 단단히 믿고 있는 듯 헤실대던 미소까지 떠올리면 더더욱.
저런 식으로 가 버린 걸 알면 대체 얼마나 실망할까. 어쩌면 또 며칠간 마음 상해 있을지도 몰랐다.
‘죽이지 말아야겠어.’
원래는 소년을 죽일 셈이었다. 마차에 침입해 물건을 훔쳐 가고 오필리어를 납치한 것만으로 죽을 이유는 충분했지만, 소년을 죽이겠다는 결심은 일종의 호의였다.
‘죽게 내버려 둬야지.’
상대는 클라우디아 페리윙클이다. 임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소년은 똑같이 죽게 될 것이다. 선한 황비의 이미지를 뒤집히게 만들 수도 있는 후환을, 그것도 거울 덮개에 들어간 황실의 문장까지 봐 버린 거리의 소년을 살려 둘 리 없었다.
그러느니 사전에 고통 없이 처리하는 편이 자비로우리라. 이젠 그럴 이유조차 없지만.
그토록 분노하면서도, 클레멘츠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여 문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걸음에라도 돌이키지 않을까.
그는 어느새 오필리어가 했던 것과 같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작은 손이 유리문의 손잡이에 닿았다. 셋을 셀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는 그대로 멈춰 있다가 뒤돌아섰다. 무덤덤하던 앳된 미간 한가운데 굵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못된 마법사 형.”
클레멘츠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황당한 호칭이었다. 그리고, 내심 바라던 일이 이루어짐에 그조차도 일순간 현실감을 되찾지 못했다.
어린 도둑은 다시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서 있는 채로 허름한 옷 몇 겹을 풀더니 숨겨 두었던 덮개를 꺼냈다. 황금빛 광채를 뽐내는 직물이 흐물거리며 끌려 나왔다.
“너, 이걸 왜…….”
“받아요. 중요한 물건이었죠?”
소년은 잘났다는 듯 턱을 치켜 들었다. 그의 의문을 ‘네가 이걸 왜 갖고 있느냐.’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클레멘츠의 의문은 다른 것이었다. 방금 전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뜻대로 굴러가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라고.”
“누나는 사과하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진 못하겠어요. 형은 이게 없어도 변함없이 못되고 높은 마법사지만, 전 이게 없으면 이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도 알았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왜 돌려주는 거지?”
엔시는 이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성벽에 기대어 판자로 지어 올린 거처에 가족이 살았다. 이제는 소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지만, 정신이 말짱할 적 소년을 주워 본인이 품 팔아 얻은 양식을 전부 주다시피 하던 할머니.
불량배 소굴에서 자란 소년은 소매치기가 되었다. 불량배들은 늙고 쓸모없어진 할머니를 거둬 준다는 명목으로 소년이 가져오는 지갑을 가로챘다. 아무리 많이 훔쳐 와도 노름과 술값으로 써 없애곤 부족하다고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놈들이 높으신 분에게 의뢰를 받았다며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을 때, 엔시는 할머니와 함께 탈출할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새벽, 동트기 전에 내성 서문 앞으로 가져오라더군.”
“1천 크로나라니, 이게 웬 떡이냐!”
“조용히 해. 애새끼가 들을라.”
“그래. 엔시가 물건을 가져오면 새벽까지 진탕 마시다 돈 받으러 가자고.”
저 돈을 가로채서 할머니와 함께 떠나야겠다. 성문 근처의 숙소에 미리 할머니를 데려다 놓는다. 가짜 물건을 가져간 톰슨 패거리가 한심하게 술이나 마시는 사이, 먼저 진짜 물건을 의뢰인에게 주고 돈을 받아 떠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완벽했을 계획은 어긋났다. 중간에 돌아온 패거리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기 직전,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이 나타났다.
“오필리어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필 누나는 멋진 사람이라서, 두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놈들을 묵사발을 내 놨다.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서 돈을 구해 왔다.
하필 누나는 착한 사람이라서, 그걸로 갖고 싶은 걸 사지 않고 엔시에게 전부 주었다. 돕겠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엔시는 원망을 담아 클레멘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오필리어 누나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사람. 못된 마법사.
훔친 천을 그대로 가져가면, 모르긴 몰라도 이 남자가 곤란해지리란 건 분명했다. 그러니 결국 잘된 일일 텐데.
하필 누나는 올바른 사람이라서, 훔친 물건을 돌려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형이랑 있을 때 오필리어 누나는 즐거워 보였어요.”
“……뭐?”
근사한 보랏빛 눈 가운데서 동공이 크게 무너졌다. 엔시는 그 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시력이 안 좋은가? 오필리어는 날 싫어하고 있다.”
“그것도 맞겠죠. 저도 보통의 경우 할머니를 싫어하고 있으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클레멘츠를 보며, 엔시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을 하고 후회했다.
하필이면 이 남자 앞에서 오필리어 누나가 편하고 즐거워 보일 건 뭐람. 그리고, 그렇게 나쁜 짓을 했으면서. 결혼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면서, 이 남자가 누나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안절부절못하는 걸 봐 버릴 건 또 뭐람.
도둑질은 나쁘다는 걸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엔시의 행동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지 못했다.
하지만 오필리어가 엔시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듯이, 엔시 역시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자신 때문에 오필리어가 실망하고 상처받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떠나면 누나는 다시는 순진한 생각 따위 안 하게 되겠지.’
거리의 아이를 믿고 호의를 베풀 일도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게 당연한 건데.
결국, 엔시는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저는 후회하게 될 거예요. 얼마 못 가서 지금의 제가 미쳤었다고 생각하게 되겠죠.”
“그런데?”
“오필리어 누나를 속상하게 하고 도망쳐서 할 후회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요.”
소년은 후련한 마음으로 겁에 질렸다. 클레멘츠는 소년이 꺼내어 내놓은 봉투를 보았다. 옷 주머니에 넣어 두느라 깔끔했던 봉투는 반으로 접혀 있었다. 작은 손이 봉투를 열어 크로나 지폐 한 장을 꺼냈다.
“누나한테 이거 한 장만, 빌리겠다고 전해 줄래요? 높으신 분의 의뢰를 망쳐 놓고 손 놓고 있을 순 없거든요. 도망이라도 쳐야지.”
마차를 잡아타고 옆 도시로 떠나든, 워프 포탈을 타든. 할머니까지 2인분을 내야 했으니 최소한의 교통비였다.
가타부타 말이 없던 클레멘츠는 소년이 꺼내 가려던 지폐에 손을 얹었다.
“……이것 하나도 못 줘요? 설마 그냥 이대로 나가서 죽으라는 뜻이에요? 높으신 분이, 뭐가 그렇게 자비가 없어요?”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버릇없는 도둑 같으니.”
자업자득에 불과했을 소년의 죽음은, 마지막 순간 죄를 돌이키며 부당한 결말이 되었다.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오필리어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 바람에 그는, 예정된 소년의 죽음을 모른 체할 수 없게 되었다.
“알아 둬라. 어떤 사람은 의뢰가 성공해도 입막음을 위해 이행자를 죽이기도 한다. 네가 그토록 약속을 지켜야 한다 믿었던 그 여자도 다르지 않아.”
“네? 그, 그럼…… 의뢰를 완수해도 다 죽었을 거라는…….”
소년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간, 엔시는 제 실력 하나를 믿으며 살아왔다. 가끔은 위험천만하지만 그건 실패할 경우 치르는 대가일 뿐이라고. 이 험한 세상에서도 자신이라면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밤이 오면, 네 할머니를 데리고 성 서남쪽에 있는 자주색 지붕의 저택을 찾아라. 문을 두드리고, 황태자의 명에 따라 왔다고 고해라. 그리고 글로리나 남작 부인 로메오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
클레멘츠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결국 오필리어의 뜻대로 되었다.
“그럼 몇 나절 남지 않았던 네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거다.”
“다행이다. 아직 음식 안 나왔네요. 어? 엔시는요?”
소년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오필리어가 환한 낯으로 들어왔다. 클레멘츠는 의자를 빼서 오필리어를 앉혔다. 그리고 얼버무렸다.
“잠시 심부름을 보냈다.”
“네? 밥 먹을 시간인데요?”
너무하다는 시선이 와 닿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좀 더 얼버무렸다.
“이 레스토랑의 수준에 많은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포도주는 참고 마실 수 없는 수준이더군. 가까운 곳에서 주류를 취급하니 금세 사 올 수 있다고 하기에 보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더더욱 너무하다는, 거기에 더해서 어지간히 좀 하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오필리어는 빈자리가 거의 없이 메워진 식탁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클레멘츠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우려하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뜻대로 되었다. 소년은 옳은 결정을 했으며 승복한 그는 최선의 보상을 했다.
그럼에도 클레멘츠는 어설픈 거짓을 지어냈다.
“맛있어요.”
그 말, 그리고 아무런 걱정 없이 혈색 좋은 입술 사이로 음식을 집어넣는 저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실을 말하면 오필리어는 기뻐할 것이다. 아쉬워할 것이다. 어쩌면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지 않았냐며, 당장 밖으로 걸어 나가 소년을 찾아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는 끝까지 그런 식으로 소년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필리어가 더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칠면조 샐러드를 그릇에 덜어 주었다. 타인을 챙겨 주는 동작이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자그마한 병아리의 식사를 챙기던 버릇 탓이었다. 눈앞의 여인과 같은 존재인.
다행히도 이제 오필리어는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클레멘츠는 형식적으로 음식을 자르고 씹으면서, 무척 당연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