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저 때문에 망한 건 아니에요. 장난을 쳐도 될 만한 걸 골라야죠, 누나.”
엔시는 얄밉게도 혀를 빼꼼 내밀었다. 두 번째 계획도 실패.
결국 세 번째라도 성공시키기 위해 내 뼈를 깎아 내기로 했다.
내 손엔 종이를 접어 만든 일회용 그릇이 들려 있었다. 노점에서 음식을 담아 파는 물건이었다. 안에 든 건 큐브 모양이고, 눈처럼 새하얀 가루가 곱게 붙어 있었다.
꼭 달콤한 초콜릿처럼 보이고, 식감도 비슷했다. 하지만 입 안에 넣고 굴리는 즉시 혀가 아릴 만큼 강한 쓴맛이 배어 나오는 간식이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지만, 이 극한의 쓴맛이 사람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건지 뭔지. 이 괴식에도 꾸준한 수요가 있었다.
하지만 출신이 길거리 음식이다 보니 귀하신 분들이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야 심부름과 겸해 시장을 둘러보는 게 취미였으니 알지만.
장난삼아 한번 벨라에게 먹어 보라고 내밀었을 땐, 저급해서 싫다며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서민 구경 나오신 이 황태자 전하께서도 요건 몰랐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낚시엔 밑밥이 필요한 법. 클레멘츠가 의심 없이 먹게 하기 위해서 나부터 아주 맛있어 하는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작은 일회용 포크로 이 ‘피크로스’를 하나 찍어 들었다. 결연하게 굴려고 했는데도 손이 조금 떨렸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클레멘츠를 괴롭혀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가 골탕 먹은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그 모습을 되새김질해 가며 한 달 동안은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뭐지?”
이건 초콜릿이다. 이건 달콤한 초콜릿이다.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속였다. 혼신의 연기력을 얼굴로 끌어모았다. 그럼에도 충격적으로 쓴맛에 눈꺼풀이 살살 떨린 것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클레멘츠는 미끼를 물었다.
“엄청 맛있는 거예요. 클레멘츠도 한번 먹어 볼래요?”
“……음.”
보랏빛 눈동자가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하얀 큐브를 훑었다. 엔시도 이번엔 재밌겠다는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좋아. 심하게 경계하는 것 같진 않으니 밀어붙이자. 내친 김에 하나를 찍어 그의 코앞에 내밀었다.
“……?”
“어서요.”
그도 몇 번이고 직접 내게 음식을 먹여 주었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잖아? 병아리가 나고 내가 병아리다.
바로 다음 순간이면 그의 일그러진 면상…… 아니, 표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쓴맛의 여운에도 얼굴이 저절로 살살 펴졌다. 웃음이 톡톡 새어 나왔다.
그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입을 벌리는 사이에 피크로스 하나를 콕 쑤셔 넣었다. 이야, 오늘 정말 무엄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했다. 이제 달콤한 월척을 낚을 차례.
“…….”
반응이 좀 느리네. 그는 몇 번 우물거리더니 기대감에 한껏 들뜬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눈이 마주쳤다.
와, 반응 진짜 느리네. 참는 건가? 아, 그렇겠지. 황족이 체면이 있으니 차마 오만상을 찡그릴 수는 없어서 참는 거구나!
그렇게 참고 참다가 결국 확 일그러뜨린 표정은 얼마나 웃기고 재밌을까? 안 돼, 기대가 더 커져 버렸어.
그사이 피크로스는 그의 입 안에서 다 녹아 사라진 것 같았다. 클레멘츠는 다시 입을 벌렸다. 또 달라는 뜻인 것 같아 하나를 더 넣어 주었다.
오호, 이건 그거지? 이 정도론 끄떡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허세 부리는 거지, 지금?
저 허세마저 무너진 모습은 더 가관이겠지? 기대에 부풀며 세 번째, 네 번째 피크로스까지 그의 보기 좋은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을 때.
나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있잖은가. 저급한 시비를 붙이려고 무협지 주인공에게 접근한 삼류 악당들이, 약간 미친놈 같아 뵈는 그의 행동에 검 한 번 맞대 보지도 않고 ‘으아아! 괴물!’ 하고 줄행랑을 놓을 때.
바로 그 삼류 악당의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뭐 하는 자식이야, 이거? 미각이 마비됐나?
신나고 두근거리던 마음은 점차 공포에 점령당했다. 마침내 녀석이 다섯 번째 입을 열었을때, 나는 항복을 선언하며 손을 내렸다.
“이, 이제 그만 드셔도 될 것 같아요…….”
“더 있는데.”
“제, 제 거예요…….”
저 사람 무서워.
이로써 내 원대한 계획은 플랜 A부터 C까지 전부 실패했다.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클레멘츠가 고통에 몸서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젠장.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터덜거리는 내 앞에 뭔가 불쑥 내밀어졌다.
근처에서 팔고 있던, 잘 익어 말랑거리는 복숭아였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시선을 올리니 클레멘츠가 말했다.
“너도 그 이상한 걸 먹느라 고생했을 것 아니냐.”
그의 말이 맞았다. 정체불명의 쓴맛이 아직도 남아 혀끝을 온통 농락해 댔다. 견딜 수 없어 허겁지겁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씻어 내리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이상한 걸 알고는 계셨네요.”
“당연하지. 내 입맛을 뭐로 보고.”
“…….”
그는 내 의도를 알고 있었다.
“내가 죽상 짓는 꼴을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승자의 여유 같은 미소가 잘생긴 얼굴에 한가득 걸렸다. 그럼…… 그럼 뭐야? 결국 알면서 당해 줬단 말인가? 역으로 내가 당황하도록 반격하고, 쓴맛은 그냥 참은 거야?
“인생을 왜 그리 어렵게 살아요?”
완전히 질려 버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복숭아나 마저 먹었다. 클레멘츠는 그러는 나를 만족스럽게 구경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흑흑.
“두 사람 잘들 노네요.”
팔짱을 끼고 관전하던 엔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녀석 봐라. 무슨 뜻이야?
* * *
클레멘츠는 이 상황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분수도 모르고 끼어 있는 이 꼬맹이만 제외한다면.
당장 잡아다 추궁해야 했지만, 오필리어는 하필 저 꼬마를 애지중지 데리고 다녔다. 오래간만에 인간으로 돌아와 저렇게 신나 하는데, 그라고 해서 중간에 초만 치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왜 누나를 병아리로 바꾼 거예요?”
그래서 참고 달고 다니고 있었더니 녀석은 태연하게 도를 넘었다.
“내가 굳이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소년의 무엄한 눈빛은 약간 오필리어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역시 결혼을 강요하려고…….”
오필리어가 반대편에서 소년의 손을 끌어당겼다.
“엔시! 그거 아니야. 내가 아니랬잖니.”
속삭인다고 속삭이는 것 같은데, 다 들렸다.
“왜요? 귀족들은 원치 않는 결혼도 하게 된다고 그러던데요.”
“그렇긴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아…….”
답답한지 소년의 어깨를 흔들던 오필리어의 목소리는 절망적으로 기어들어 갔다. 듣던 클레멘츠는 살짝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왜 저렇게까지 부정하는 거지?
초여름의 해는 어물거리며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세 사람은 오필리어가 눈여겨봐 둔 식당에 앉았다. 사실 클레멘츠는 엔시 놈 따위 굶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쯤 체념한 채 앉아 있으니 여기저기서 그들의 테이블에 눈길을 보냈다.
“아까 노래 부른 아가씨 아니야?”
“귀엽다…….”
“말 걸어 볼까?”
건방진 소년 하나 참아 주는 것도 한계에 부딪히던 참이었다. 별 잡스러운 것들까지 끼어들어 모처럼의 여유를 방해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쪽을 힐끔거렸는데, 클레멘츠는 왠지 젊고 반질거리는 사내들이 다가오려는 게 특히나 더 싫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저들을 쫓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어슬렁대며 접근하다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멀어져 갔다.
“……?”
오필리어도 아까부터 기이한 경로로 꺾어지며 튕겨져 나가는 사람들을 눈치챘다.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다시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엔시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 표정이 명백히 ‘잘들 논다’느니,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 클레멘츠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정했어요!”
집중하던 오필리어가 마침내 메뉴판을 탁 내려놓았다.
“아직 식당에서 정한 저녁 시간이 살짝 안 되었기 때문에 여기 따로 적혀 있는 점심 특선을 주문할 수 있어요. 칠면조 고기 샐러드가 이 집의 인기 메뉴라고 하니까 시켜 보죠. 그리고 할인율과 실속을 고려해 봤을 때 여기, 커플 B 코스를 주문하는 게 좋겠어요.”
클레멘츠는 얼른 대답했다.
“그러지.”
“대신 오늘의 사이드 메뉴로 나온다는 미니 파이는 토마토 치즈 구이로 바꾸기로 해요. 봐요, 저기 앉은 부부는 파이를 손도 안 댔거든요.”
오필리어는 대각선 방향에 앉은 부부의 식탁을 가리켰다. 과연 그들은 문제의 미니 파이를 대부분 남겨둔 채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스에 스테이크와 크림 스파게티가 있으니 담백한 토마토로 입가심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누나.”
웨이터가 오자 오필리어는 능숙한 솜씨로 주문했다. 그러곤 어딜 잠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전 이쯤에서 빠져 줘야겠죠.”
그는 일어나는 소년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빠지겠다는 말은 흡족했다. 하지만 어딜 그냥 가려고?
시선을 오해한 소년은 변함없이 건방진 말투로 지껄였다.
“됐어요. 저라고 댁 시선에 찔려서 너덜너덜해지면서까지 얻어먹고 싶진 않으니까. 아주, 오필리어 누나를 제외한 거의 모두를 그렇게 보시던데요.”
성격이 왜 그래요?
어린 도둑은 그 말을 끝으로 출입문을 향했다. 유언치고 한없이 버릇없는 소리였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클라우디아는 많은 돈을 약속했을 테고, 남의 돈지갑을 훔쳐 쉽게 벌어먹고 사는 데 익숙하던 도둑이 새 삶을 결심할 리 없다.
결국, 저 아이가 잘못을 되돌릴 거라는 오필리어의 희망은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당연한 결과였고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소년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분명, 화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