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전, 전하?”
이 사람이 갑자기 여긴 왜 나타났지? 난감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한 얼굴로 호칭이나 정정했다.
“클레멘츠.”
“클레멘츠…….”
……?
오, 나 지금 합법적으로 이 나라 황태자의 이름을 막 불러 젖혀도 되는 상황인 건가?
아무래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나왔으니, 밖에서 전하라고 막 부르면 안 되나 보다. 이 나라에 전하가 한 다스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서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클레멘츠는 제 이름을 부르는 날 잠깐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내 냉엄한 시선을 엔시에게 옮기려는 그를 붙잡고 열 걸음 정도 옆으로 끌어냈다.
“‘클레멘츠’가 아니잖아요! 왜 오신 거예요?”
“꼭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안 되죠오…….”
나는 절망적으로 속삭였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냐뇨…… 훔쳐 간 걸 돌려주러 가자고 살살 꼬시고 있는데 도둑맞은 당사자가 딱! 등장해 봐요. 얼마나 부담스럽고 거북하겠어요. 용기를 내려다가도 도망갈걸요.”
“그렇게 양심이 있어 보이진 않던데.”
그런가……?
그럼 아직 나의 계획은 유효하다는 건가?
다행히 클레멘츠는 엔시를 당장 끌고 가서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좀 무섭게 쳐다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지?”
역시 클레멘츠는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건에 대해 캐물었다.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 엄청 무서운 사람들이 우릴 위협했거든요. 진짜 위험했어요.”
“……그랬나.”
“그때 제발 인간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빌었더니 짠, 하고 돌아온 거 있죠. 신기하죠?”
메라와 닉타가 합체 마녀가 되어 꿈속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왠지, 고자질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사자들도 ‘이건 뒤싱겐 몰래 해 주는 거다!’란 느낌을 팍팍 풍기기도 했고.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거짓말은 아니잖아. ……그렇겠지?
원할 때 인간으로 돌아오는 건 내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그런 건가.”
클레멘츠는 수상쩍다는 듯 날 바라봤지만, 다행히 더 추궁하지 않았다. 나는 대충 웃음으로 그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얼버무렸다.
“그럼…… 저의 엔시 개과천선 프로젝트를 재개해도 될까요?”
“그게 네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뒤로 뺐다.
아, 맞아. 그가 좋아하고 서슴없이 만지는 건 노랗고 작은 병아리였지. ‘실례했습니다.’, 덧붙이고 손을 놓았다. 그는 자신의 손이 신경 쓰이는 듯 내려다보았다.
“엔시에겐 그 애가 범인인 줄 당신이 모르고 있다고 할게요. 거기까지만 맞춰 주세요. 분명 평화적으로 돌려받게 되실 거예요.”
“그래.”
그는 엷게 웃었다.
“다만 시간은 잘 지켜라. 해가 저무는 대로 넌 나와 함께 돌아가게 될 테니까.”
“아유, 그럼요.”
여름으로 접어들며 해는 길어졌다. 그리고 희망은 점점 커졌다. 엔시는 방금 내가 건넨 상금을 받아 줬으니까 아마 긍정적으로 새사람 되기를 고려 중일 거다. 나는 이번엔 엔시에게 다가갔다.
“누군지 알아보겠지? 마차 주인. 내 고용주.”
“그리고 못된 마법사 형이죠.”
“너, 너 이 녀석!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여전히 열 걸음쯤 떨어진 클레멘츠 쪽을 힐끔거리며 소리를 죽여 외쳤다. 그다음엔 소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클레멘츠는 아직 네가 누군지 몰라. 납치범으로부터 도망쳐 헤매다 너를 만났다고 해 뒀어.”
납치범은 사실 너지만…….
이건 엔시가 잘못을 돌이키게 하기 위한 밑밥. 즉 하얀 거짓말이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그리고 적당한 때에 돌려주고 사과하자. 알겠지?”
소년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구나. 자, 이리 와.”
아이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노래까지 했더니 엄청나게 배고팠다.
“……클레멘츠?”
그런데 이 양반은 왜 이러지?
다정히 손잡은 엔시와 내 앞에 서더니, 뭔가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앞에 한 손을 내밀었다.
……?
돈 달라는 뜻은 아닌 것 같고. 엔시의 손을 잡은 오른손의 반대쪽, 내 왼손을 살포시 그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괴상한 표정을 짓거나 뿌리칠 것 같단 예상과 달리, 그는 흡족해하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아까는 나와 닿은 게 싫어서 잡힌 손도 빼 버렸잖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그림자 슥삭 맨분들, 이거 이해되세요?
“뭘 그렇게 두리번대는 거지?”
“아뇨, 아닙니다. 전방 주시할게요.”
황태자이자 남주인공, 계약 병아리, 병아리 납치범 2 겸 황비의 끄나풀 겸 경범죄 꿈나무.
이렇게 셋이서 정답게 손잡고 축제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게, 오늘 일어난 갖은 괴사건 중에 가장 이상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클레멘츠는 왜 난입한 거지?
“저기요-. 클레멘츠.”
“왜 그러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혹시 축제 구경?”
나는 아까 봐 두었던 레스토랑을 향하고 있었다. 드넓은 광장의 지름을 반 넘게 가로질러야 하는 거리였다.
그는 픽 웃었다.
“네가 하고 싶다 하지 않았어?”
“맞긴 맞는데요……?”
“그럼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긴!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 맞나? 물론 ‘나중에 따로 와서 같이 구경하자.’라는 말을, 본인 스스로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작고 소중한 아기 병아리를 데리고 구경하러 오고 싶단 얘기인 게 당연했다. 그는 병아리 광신도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다 해서 병아리가 아닌 원래의 나와, 그것도 모르는 사이이던 소년까지 하나 껴서, 축제 구경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한다고? 뭐 잘못 먹었나?
의문을 가득 담아 쳐다본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좋았다. 알맹이가 얼마나 상해 있든, 참 좋은 얼굴이다.
너무 빤히 봤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잡혀 있는 손의 체온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슬며시 손을 움직여 빠져나오려 했다. 어차피 그도 충동적으로 잡은 것일 테니.
“……!”
놔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단단히 잡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항의의 뜻을 담아 노려봐도 그는 보란 듯 웃기까지 했다. 나는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나를…… 괴롭히는 거야.
오늘 클레멘츠의 일정은 나 때문에 완전히 꼬여 버렸다. 궁에 돌아갈 시간도 놓치고, 아마도 납치된 나를 찾느라 인력을 두 배로 소모했을 것이며. 진작 회수하고도 남았을 거울 덮개를 소년을 살리겠다는 내 고집 때문에 눈앞에 두고도 지켜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옹졸한 보복이 분명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하질 않나. 손을 꼭 잡는 것……. 이건 뭐라고 해석할 수조차 없다. 내 자유가 그의 손아귀 안에 붙들려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인가?
그건 아닐 것 같지만 어쨌든 기분이 상했다. 치사한 클레멘츠.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뭐지, 오필리어.”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다가 들켰다. 난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턱짓으로 아무 데나 가리켰다.
“저기 가 보고 싶어요, 클레멘츠.”
“그러지.”
흠? 은근히 또 하자는 대로 어울려 주는 것 같다. 자신이 승인하는 활동은 괜찮다는 건가?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면 승인받은 한계 내에서 마음껏 괴롭혀 주지.
“앗, 저 손수건.”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다 하나를 콕 집어 가리켰다. 고운 빛으로 물든 손수건이었지만 붙은 가격이 심히 사악했다.
노점을 지키고 있는 상인은 머나먼 외국에서 배워 온 특별 기법을 이용해 완성했다며 비상식적인 가격을 합리화했다. ‘무슨 문제라도?’라고 하는 듯한 얼굴은 값에 대한 의문 제기를 사전에 차단했다.
“와아. 너-무 너무 예쁘다. 진. 짜. 갖. 고. 싶. 다.”
“사거라.”
“비싼데요. 저에게 우정의 선물로 주실 생각은?”
“그러지.”
……?
몇 초 후, 난 내 손에 쥐어진 그 성분 불명의 염색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이, 이건 아닌 것 같다. 상대가 너무 돈이 많다 보니 전혀 타격이 없었다. 클레멘츠는 태연하다 못해 평온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건 오히려 나였다. 사악한 기득권 적폐 세력의 2인자 같으니…….
혹은 이게 비싸다는 인식조차 없을 수도 있었다. 왠지 고민 상담소 천막에 있던 마법사 양반이 생각나네.
아무튼 이 방법은 기각이다. 다른 수를 써야겠다.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딱 적당한 걸 발견했다.
“앗.”
클레멘츠와 엔시도 나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칼로카이리를 맞아 특별 출장! 수도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라는 배너가 걸려 있는 노점이었다.
“자, 이미지 변신에는 헤어 디자인만 한 게 없죠. 이 기회에 연인이나 모임, 새 직장에 좋은 인상을 심어 주세요.”
가위와 빗을 들고 있는 대머리 청년이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다양한 머리 모양을 섬세한 그림으로 표현해 둔 커다란 패널이 있었다. 나는 그중에 가장 실험적이고 이상하며 못생겨 보일 확률이 높은 스타일을 가리켰다.
“최근 수도에서 가장 유행한다는 스타일이네요.”
“가서 하거라. 기다려 주마.”
“……아니, 자세히 보세요. 저건 머리가 짧은 사람을 위한 스타일이잖아요? 남자분이 하시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
나는 눈빛으로 황급히 엔시에게 동조를 요구했다. 눈치는 빠르지만 열의는 부족한 소년은 마지못해 뇌까렸다.
“와아- 나도 크면 저 머리 하고 싶어-.”
“들었죠? 유행한대서 너도 나도 따라 하긴 하는데, 솔직히 저 머리는 진짜 잘생긴 사람만 소화할 수 있거든요.”
당연한 얘기지만 지나다니는 인간들 중 아무도 저 머리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클레멘츠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 어울리는 사람을 못 봤는데, 클레멘츠라면…….”
“볼일 없으면 이만 가지.”
“아아…….”
쳇.
클레멘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두말없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