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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72)화 (72/218)

72화

야심차게 고안한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발해 보였겠지만, 내게는 어딘가 익숙했다.

꼭…… 노래방 기계 정밀 채점과 비슷하잖아.

저쪽 세상에 살던 시절,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코인 노래방에 찾아가 혼자 연달아 스무 곡쯤 부르곤 했다. 그러다 보면 도전 정신이 생겨 정밀 채점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노래방 온 기분을 느껴 볼까? 오래간만에 흥분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엔시.”

“……?”

“누나가 돈 벌어 올게.”

“…….”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예 예, 즉석 참가 신청도 받습니다.”

무대로 뛰어가니 즉석 참가자도 환영해 주었다. 새 채점 방식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참가자들이 우수수 기권했다는 모양이다.

좋았어. 경쟁자가 줄었으니 느낌도 좋았다. 즉석에서 명부에 이름을 쓰고 참가 번호를 받았다.

나는 마지막 순서였다. 간이 칸막이로 된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앞선 사람들의 공연을 구경했다.

그냥 자리 때우고 참가비 받으러 온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예상대로 대부분은 실력이 좋았다.

문제는 새로 도입된 채점 시스템이었다. 우선 익숙하지 않은 데다, 한 음 틀릴 때마다 관객들이 실시간으로 알아채게 된다는 점이 긴장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시선이 흔들리고 긴장하기 시작하니 자연히 실수는 더 많아졌다.

“괜찮아!”

“잘한다!”

심지어 관객석에서 위로 섞인 격려도 튀어나왔지만, 많은 이들이 불만족스러운 무대를 마치곤 터덜터덜 내려갔다.

저런…….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몇 명은 잘 해내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름 오후에 반주와 함께 멀리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감상적인 기분에 젖게 했다.

문득 참 좋은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따뜻하고 쾌적했다. 일 년 중 봄과 여름의 사이에 걸쳐진 지금. 아직 좋은 일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웃으며 떨어진 봄꽃들과 앞으로 약속된 결실의 계절이 다투어 빛을 냈다.

‘그러니까 이맘때 축제를 하는 거지.’

이왕 참가하는 거면 큰 걸 노려야지. 목표는 대상이었다.

대상 상금 정도면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몇 달간은 살아갈 수 있었다. 엔시가 거울 덮개를 돌려준다고 하면, 황비에게 받을 돈 대신 그 돈을 줄 수 있었다.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면 소년도 더 쉽게 마음을 돌리리라.

이윽고 진행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섰다.

“봄이 온기로 나에게 왔을 때-.”

반주에 맞춰 입을 열었다. 이 세계의 노래 가운데도 좋은 것들이 많았다. 벨라와 함께 배웠던 노래의 가사가 낱낱이 기억나는 게 참 신기했다.

입을 열 때마다 빛으로 된 막대가 금빛을 내며 팡팡 터졌다. 마법이 있는 세계에 떨어진 게 이럴 땐 좋았다. VR 게임이 부럽지 않단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초여름이면 열리는 클라티아의 축제에는 지난날의 부정한 것을 태워 버리고, 한 해의 소산이 풍성하게 영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의식에 무슨 효험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매년 축제가 진행돼도 어떤 해는 흉년이 든다. 또 어떤 해는 부정한 것들이 가득하여 큰 사고나 전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같은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좋은 일들이 삶을 가득 채우기를. 가능하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기를.

알맹이는 다른 곳에서 왔다 해도 나 역시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살아 있었다. 모두의 기원에 내 것까지 얹어서 화답하고 싶었다. 어떤 결실, 어떤 밝은 것. 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어떤 희망.

노래가 끝나고 인사를 하자, 두어 박자 늦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휴, 된 건가?

내 순서가 마지막이었다. 마법 판정에 의해 모두의 점수가 자동으로 매겨졌고, 즉석에서 결과가 나왔다.

“우승자는-.”

우승! 우승! 300크로나! 300크로나! 한 번만요!

“‘인생은 아름다워’를 부르신 로우레 자르부러스 님! 축하합니다. 300 크로나의 주인공이시네요!”

아앗!

바뀐 채점 시스템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를 보였던 붉은 머리의 참가자가 웃으며 꽃다발과 상금을 받았다. 크흑.

“정말 감사합니다. 깜짝 놀랐어요. 마지막 참가자분이 우승할 줄 알았는데…….”

그는 잠깐 나와 시선을 맞추고 웃고는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칭찬인가? 일단 고맙지만…… 약간 약 오르는데.

“자, 2등은 고급 여관 이용권과 200크로나의 부상이 있습니다. 영예의 주인공은-.”

대상보단 못하지만 200크로나도 괜찮았다. 나는 무대 뒤에서 간절히 진행자를 응시했다.

“‘아주머니가 제일 잘 나가’를 부르신 존 자렛스 님!”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머리도 왠지 느끼하게 말아 올린 남자였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1등은 다른 분이 하셨으니 2등은 마지막 참가자님이 하실 줄 알았는데…….”

남자는 번드르르한 미소를 지으며 날 돌아보았다.

뭐지? 다들…… 나를 놀리는 것인가? 설마 ‘이런 이런…… 당신 같은 아마추어가 낄 자리가 아니란 걸 진작 알아채지 못했나요?’라는 뜻의 우회적인 표현?

“자, 자! 순위 판정은 극도로 공정하니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연달아 내가 1등할 줄 알았단 말이 나오자 진행자는 사전에 물의를 차단하려는 듯 무대 한쪽에 빛으로 떠 있는 점수를 가리켰다.

모든 참가자들의 점수는 이미 나와 있되, 순위에 든 사람들의 이름은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시스템이었다.

엔시는 관객석에서 무미건조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녀석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었는데. 사냥에 실패한 암컷이 급속도로 위축됩니다…….

“3등은, 오필리어 레오라 님입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데 별안간 내 쪽으로 조명이 떨어졌다. 2등과 약간 차이가 벌어지는 점수 옆에 내 이름이 반짝이며 커다랗게 나타났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기계적으로 진행자의 앞에 가서 섰다.

“상금 100크로나와 의상실 예약권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있어!’ 아주 잘 들었어요. 오래되고 다 아는 노래인데 이렇게 새롭게 들릴 데가 있나!”

어디선가 튀어나온 스태프들이 내게 화관을 씌우고 코사지를 달아 주었다. 잠깐 굳어 있다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자 객석에서 다시 한번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순간 스타가 된 듯한 기분에 취한 나는 손을 흔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감사드려요!”

내려오면서 생각해 보니 약간 바보 같았을 것 같다. 설마 아는 사람이 보지는 않았겠지. 수도에 내 지인이라곤 거의 없으니까. 아암.

“누나!”

엔시는 인파가 적어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멋지게 우승해서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역시 세상사 다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하. 봤냐?”

그래도 일단 3등이나 했잖아?

“……노래를 잘한다는 말은 왜 안 했어요?”

“했으면 네가 믿었을까?”

“음, 아뇨.”

솔직한 면이 참 귀한 친구였다.

머리에서 화관을 내리고, 망토 자락에 달린 코르사주도 뺐다. 그리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봉투를 열었다. 빳빳한 크로나 지폐가 넉넉히 들어 있었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

“…….”

엔시는 내 말을 바로 알아차리고 침묵했다.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봉투를 그대로 닫아 내밀었다.

작은 손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소년, 엔시는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걸 왜요?”

“받아 줄래?”

황금빛 눈이 따스한 웃음을 흩뿌려 댔다.

“그분이 얼마를 약속했는진 모르겠구나. 하지만 적어도, 톰슨네 삼총사가 저희들끼리 해 먹고 네게 조금 떼어 줬을 몫보단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이걸 대신 받고, 훔친 물건을 못된 마법사 형에게 돌려줄래?”

엔시는 오필리어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사실, 이런 돈 같은 건 주지 않아도 좋았다.

‘널 도우러 왔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유교 문화권’이니 뭐니,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늘어놓으며 톰슨 패거리를 죽사발로 만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위태롭게 자신을 감싸며 뛰어들어 사람으로 변했을 때부터.

그 밝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고분고분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치 빠른 소년은 어렴풋이라도 알았다. 제국의 문양이 수놓인 천이 향할 곳이 어딘지. 정체를 알릴 수 없는 귀부인 의뢰자가 누구인지. 얼핏 봐도 지나치게 고고해 보였던 못된 마법사가 어디에 속했을지.

판잣집에 근거지를 둔 패거리는 제법 오랫동안 ‘영업’을 했다. 간혹 ‘높으신 분들’이 일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성공하면 큰돈을 만졌지만, 실패하면 사람이 죽어 나갔다.

높으신 분들은 감히 자신의 의뢰를 실패한 천것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오필리어 누나의 권유대로 혼우드로 도망갈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가 누나의 집이라면, 워프 포탈은 있을지 의심스러운 깡시골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을까? 이번 의뢰자는 지금껏 판잣집에 사는 불량배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끔찍하게 죽인 귀족들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동안의 경험에 따르면, 신분이 높은 의뢰자일수록 치졸하고 잔인했다.

설마 하찮은 소매치기 소년을 죽이러 세상 끝까지 따라오랴 싶었지만, 할머니의 목숨까지 걸고 위험 부담을 질 순 없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오필리어 누나.’

상금 봉투를 돌려줘야겠다.

‘그렇지만 누나가 실망할 텐데.’

돈을 받고 실망하다니.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정말 이상한 누나였다.

그래서 좋았고, 소년은 봉투를 돌려주는 동작이, 뒤이을 거절의 말이 망설여졌다. 그때.

저쪽에서 어떤 인영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아가씨.”

제목이 긴 책들을 팔던 서점 주인이었다. 누나가 하나를 갖고 싶어 하던데, 훔쳐 건네주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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