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누나는 키가 몇이에요?”
“나?”
이곳의 길이 단위는 미터가 아니었다. 성인의 아래팔 길이 정도 되는 ‘키보스’와 그 12분의 1이라는 ‘도데’. 키를 잴 때는 보통 도데를 사용한다. 1도데는 어림잡아 4cm가 약간 안 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재 본 적은 없었다. 당연하다. 여기에는 미터자가 없으니까.
“41.”
엔시는 제 머리끝에 손날을 눕혀 들고 내 키와의 차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들어 이번엔 위쪽 허공의 어느 지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지?
아! 저기가 목표치인가?
마법사의 천막에서 강탈해 먹은 것도 키가 커지는 사탕이었지. 이럴 수가. 귀여워…….
“여기까지 크고 싶어?”
엔시의 목표 지점 즈음을 나도 손으로 짚어 보였다.
“더요.”
“여기?”
아이는 진지했다. 내 얼굴과 손의 위치를 번갈아 보더니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더.”
“꿈을 크게 꾸는구나. 좋은 자세야.”
소년이 만족할 때까지 손을 올린 결과 거의 팔을 쭉 뻗어야 했다. 음, 그러고 보니 클레멘츠가 이 정도인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그와 나란히 서 있던 때로 기억을 돌렸다. 황태자궁 벽에 그의 어깨를 밀어붙이고, 나를 어떻게 이용할 생각이시냐 을러댔던 때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첫째. 맞아, 클레멘츠가 이 만큼 컸다.
둘째. 와, 내가 미쳤었나?
처음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쳐다보다가, 나중엔 진득한 감정이 꾸역꾸역 끼쳐 오던 눈동자가 생각났다. 달빛에 그의 턱이 하얗게 빛나고, 귀와 목은 은은한 어둠에 잠겨 들던 것도.
뭐지. 뭐가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나지? 이러다 클레멘츠의 숨결이 미세하게 내 목을 간질이던 것까지 기억날 것 같잖아.
……? 이미 기억났는데?
당황스러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미남과 관련된 고화질 메모리는 쓸데없이 오래 저장되는 모양이라고. 보다 윤택한 삶과 정신 건강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 틀림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놈은 잘생겨서, 휴.
“……누나? 왜 그래요?”
“아니야. 엔시, 너 여기까지 크려면 많이 먹어야 돼.”
소년은 많이 먹고 있다고 주장하듯 반 넘게 먹은 얼음 설탕을 치켜올렸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량 식품 말고.”
불량 식품이란 말에 얼음 설탕을 만들고 있던 노점상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멋쩍은 미소와 함께 엔시를 끌고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도 나와 함께 점심을 굶은지라 더 군것질에 탐닉하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 보였다. 저기라면 좋겠어. 양질의 음식을 먹이고 나서 다시 한번 설득하는 거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진 거 다 꺼내세요.’란 말에 순순히 가진 돈을 다 내놓는 게 아니었는데. 바보 같았다. 지금이라도 마법사에게 돌아가 선금을 일부 돌려받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지나치던 가게 주인이 외쳤다.
“자, 자. 로맨스 소설이 싸다 싸. 한 권에 1실버. 신간은 2실버.”
시몽 씨네 서점에 비하면 비싸군.
하지만 관심사가 관심사라,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빠른 속도로 좌판을 스캔한 내 눈이 뭔가를 포착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저, 저거…….”
“아, 이거. 아시죠? 출간되자마자 품절되고 재쇄도 품절된 ‘황녀님은 꾀병쟁이야’ 6권. 우리 가게에 남은 마지막 권이에요.”
“아아!”
혼우드에선 한 권 빼 준다는 시몽 씨가 있었지만 사정상 살 수 없었고, 황궁에선 나와 같은 분야의 책을 즐겨 읽는 카렌이 구하려고 노력해 줬음에도 아직까지 구하지 못했다.
드디어 실물을 만났는데.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돈이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옆에서 엔시가 측은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누나는 참…… 희로애락이 시시각각 널뛰는군요.”
“칭찬 고마워.”
“칭찬이 아니에요.”
소년의 빛나는 올리브색 눈으로 날 올려다보더니 속삭였다.
“그 책이 갖고 싶어요? 말만 해요.”
훔쳐다 주겠단 얘기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저주를 풀어 준다는 마법사에게 돈을 다 써 버렸고, 그러니 이 책은 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받아들여야 할 상황은 받아들이는 게 어른.
“안 살 거면 내려놔요. 구겨지겠어.”
“아, 안 구겼어요…….”
얼마나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고. 아쉬움이 그득 든 눈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만 가야지. 서점 주인이 쫓아 버려야 할 날벌레를 보는 눈으로 날 보기 시작했다.
엔시를 챙겨 가려는데 주인이 불러 세웠다.
“저기.”
“갑니다, 가요.”
“잠깐 들어 봐요. 보아하니 귀하게 자란 아가씨 같은데, 용돈이 떨어진 모양이죠?”
한시라도 빨리 내쫓으려고 부른 게 아닌 모양이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여전히 퉁명스러운 인상의 서점 아저씨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광장 중앙에 설치된 무대였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봤을 땐 그저 나무로 짠 임시 무대였는데, 부지런히 움직여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흰 꽃과 초록 잎새로 잔뜩 꾸며진 무대는 그야말로 여름 축제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슬슬 뭔가 진행할 모양인지, 조명 마법 기구와 음향 증폭 장치를 점검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진행자로 보이는 사람이 모여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귀족 아가씨들은 교양으로 어릴 때 성악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죠?”
“맞아요.”
그런 경우가 많은 수준이 아니라, 꽤 보편적인 유행이었다. 외진 변방인 혼우드에까지 퍼질 정도로.
어린 시절, 막 빙의해 벨라의 시녀로 들어갔을 때도 우리는 함께 노래를 배웠다. 백작령 바깥에서 노래 선생이 초빙되었다. 벨라가 내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기 싫어해서 강습이 조기 종료되긴 했지만. 그래도. 칭찬도 많이 받았고 몇 곡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혹시 아는 곡이 있으면 나가 봐요. 참가만 해도 이 책 몇 권 살 만큼은 받으니까.”
아.
한창 궁 밖으로 나갈 생각에 다 같이 들떠 있을 때, 유렌과 카렌이 말했었다.
“마지막 날 열리는 황궁 무도회도 근사하지만, 광장 쪽도 볼만하답니다. 밤까지 열리는 노점이며 여름 노래 대회며…… 그런 것들요.”
축제 기간엔 참가객의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노래 대회가 열린다고 했지.
일 년에 한 번뿐인 중요한 축제다 보니 예산은 풍부했다. 풍성한 우승 상금뿐 아니라 참가자 모두에게 참가 상금을 줄 만큼.
“카렌의 언니는 3년 전에 나가서 우승했대요.”
마치 자신이 우승했던 것처럼 수줍게 웃던 카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기저기서 꽃다발이며 선물까지 거하게 받아 온 언니가, 기분이라며 온 가족에게 상금으로 거하게 쐈다고 했지.
“그때 먹었던 랍스터 요리 맛을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카렌의 얼굴은 그 옛날의 만족스러움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귀여웠다.
음.
우승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책도 사고, 엔시와 밥도 먹으며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고. 어쩌면 황비와 거래할 생각을 단념시킬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껏해야 어릴 때 노래 강습을 받은 거랑 평소 노동요 삼아 흥얼거리던 게 전부인데. 무대에 올라가 봤자 창피만 당하는 거 아닐까?
그냥 아무거나 부르고 참가비라도 받아 와?
“누나……. 무리수 둘 생각 마세요.”
이 녀석은 내 노래를 듣기도 전에 벌써 무리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왠지 오기가 생겨서 나갈 거라고 대답하려는데, 무대 쪽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주의를 끌었다.
“자, 자! 곧 칼로카이리 여름 노래 대회가 시작됩니다!”
진행자였다. 무대 전체에 걸린 음향 증폭 마법에 의해 그 소리는 광장 전체를 넘어 상점가까지 울리고 있었다.
“무려 300크로나의 우승 상금이 걸려 있죠! 그동안은 참관객 즉석 거수투표로 우승자를 정했는데, 공정함과 형평성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 듯 객석 곳곳에서 은은한 야유가 흘러나왔다. 하긴, 언뜻 투명할 것 같지만 조작하기 쉬운 방식이기도 했다. 상금이 큰 만큼 분명 누군가는 조작을 시도했을 테고.
“하지만 여름 노래 대회는 클랏샤 칼로카이리의 백미 행사인 만큼! 결과가 공정하지 않다는 불명예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 특별히 분배된 예산으로 올해부터는 특수 고안된 전용 마법 판정을 도입합니다.”
“……마법 판정?”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죠?”
진행자는 무대 한쪽에 있는 피아노 연주자에게 눈짓했다. 연주자는 피아노의 보면대 위에 악보를 펼치고 연주를 시작했다. 누구나 다 아는 쉽고 간단한 동요였다.
그러자 파르스름한 빛이 무대를 둘러싸며, 하얀 빛으로 된 막대가 주변을 수놓았다.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진행자가 짧은 첫 소절을 부르니, 반주가 진행됨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빛 막대 몇 개가 연달아 찬란하게 부서졌다.
“보셨죠? 음정과 박자가 정확하면 막대가 빛을 내며 사라집니다.”
간주가 이어지는 동안 진행자가 간단히 설명했다.
“반면 노래를 틀리면…….”
다음 소절을 불러야 할 타이밍이 되자, 진행자는 일부러 익살맞게 틀린 음을 냈다. 음치 저리 가라 할 소리에 관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광경에 웃음소리는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틀린 부분의 음을 나타내는 빛 막대가 붉은색으로 변하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럴 수가…….”
“봐요, 누나. 무리라는 거 아셨죠? 저런 데 올라가서 틀리면 무슨 망신이에요.”
모든 사람이 새 ‘판정 마법’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달랐다.
불러야 하는 음정과 박자를 막대 형태로 가시화했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즉석에서 무대에 오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도록.
공개적인 대회임을 고려해, 무대 전체를 이용하는 화려한 마법이 되었다.
채점 결과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
개발비가 만만치 않았을 테지만, 칼로카이리의 백미라지 않은가. 전통 축제의 상징이면 제국의 상징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