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우리 누나는 저주에 걸렸어요.”
“저주라고?”
마법사의 낮은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기특한 엔시는 계속하여 그를 을러댔다.
“바깥에 그렇게 써 놨잖아요. 마법 생물, 저주, 예언 풀이 전문이라고. 그게 정말이라면 누나가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맞혀 보든가요.”
그럼 되겠구나.
순식간에 300실버 상당의 사탕을 뜯긴 마법사는 별로 도발당하거나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그동안 가볍기 짝이 없던 인상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돌변한 분위기는 마치 차갑고 깊은 호수 같았다.
“진작 말씀하시지. 자질구레한 고민 상담 따위로 영업할 게 아니었네요.”
“자질구레……? 방금 전까지 본인이 그 분야에선 최고라고 자신만만하지 않았어요?”
나의 지적은 진지해진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는 책상 안쪽의 서랍을 뒤져서 약병을 꺼냈다. 꼭 과학실에서 쓰는 플라스크처럼 생겼다.
단순한 모습이었지만 한쪽에 가득 쌓인 조잡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안에는 새카만 액체가 넘실거렸다.
“자아, 손을 줘 보세요.”
마법사는 내 손바닥에 그 액체를 조금 덜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그리고 제 손을 그 위에 겹쳤다. 차가운 액체 너머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곧 그 감촉들은 미지근하고 미끄러워지며 한데 뭉쳤다.
“어.”
하얀 손을 물들이고 있던 검은 입자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휙 날아갔다. 정확히는, 내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미세한 연필 가루처럼 휘날리던 입자는, 제자리를 찾으며 황금빛을 발산했다. 이내 나는 금빛 빛 무리에 휩싸였다. 황홀한 광경이었다. 엔시도 옆에서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감탄마저 잃고 숨을 죽인 채.
언뜻 그 윤곽이 무언가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뭐였더라?
맞아. 합체 마녀 꿈을 꾸고 엔시와 불량배들 앞에서 사람으로 변했을 때 느꼈던 ‘내 몸을 감싸는 무언가’.
마법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주에 금이 갔군요.”
“……네.”
“상당히 복잡한 저주예요. 균열을 그어 낸 솜씨가 예술에 가까워요. 이걸 당신이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법사는 내가 아니라, 금빛 입자가 지시해 주는 속박의 형태를 한참이나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집중하는 목소리에선 습관적인 장난기마저 사라져 있었다.
“혹시, 균열이 생긴 김에 어떤 힘을 가하면 아예 저주가 깨져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마법사의 입술이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이론적으론 가능해요.”
“오!”
“하지만 저주란 권위와 소망, 조건을 바탕으로 한 강제력이죠. 세 요소에 대한 고려 없이 외력으로 깨 버린다면…….”
“버린다면?”
“강제력에 의해 술자나 대상 중 약한 쪽이 함께 파괴될걸요. 높은 확률로 아마 당신이…….”
“아아…….”
저주의 뚝배기를 깨면 내 뚝배기도 함께 깨진다니. 함무라비 법전도 울고 갈 수준의 공정함이네.
그렇다고 클레멘츠의 뚝배기가 깨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한결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마법사는 아직도 내 손을 붙잡고 저주의 윤곽을 감상하고 있었다. 허공의 입자가 빛을 모두 발하고 사라질 때까지.
“어디서 술 드시고 오셨나요?”
“예? 아뇨?”
아무리 그래도 대낮에 낮술하고 돌아다닐 만큼 막장은 아니었다.
“축제니까 술을 마셔도 이상할 건 없어요. 달콤하게 졸인 와인 같은 냄새가 은은하게 나거든요. 당신에게선지, 저주에선지…….”
마법사의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은근하게 깔렸다.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이 인간 지금 나를 꼬시려는 건가?
가자미눈을 하고 쏘아봤지만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입은 무표정해졌다. 심지어 엔시마저 한 소리 했다.
“한참 손 꼭 붙잡고 뭐 해요? 혹시 누나를 유혹하는 건가요?”
“…….”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앉아 있던 마법사는 비로소 미소를 띠었다.
“알았다. 당신이 ‘오필리어’군요.”
“어?”
눈을 깜빡이다 엔시와 시선을 교환했다. 마법사는 그제야 손을 떼고, 이제는 투명해진 물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유명 인사잖아, 당신.”
물을 것도 없다는 투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수도에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기억나 버렸다. 이럴 수가. 세상 물정 어두운 마법사마저 내 이름을 알 정도라니!
“저, 저는! 딱 보면 아시겠지만 황태자 전하의 숨겨 둔 연인도 아니고, 베일리스 영애의 연인도 아니에요.”
“그런가요?”
그는 즐겁다는 투로 되묻고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댔다. 어느새 다시 원래의 가벼운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풀 수 있을지 말해 주세요!”
“좋아요. 아까 저주의 세 요소는 권위, 소망, 조건이라고 한 거 기억하죠?”
“네.”
마법사는 즉석에서 저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 들장미 공주의 세례식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공주는 열다섯 생일이 되는 날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다.’란 저주를 내렸을 때.
이때 권위는 술자인 마녀가 저주를 걸 당위성이 된다. ‘초대받지 못한 모욕에 분노하는 자.’ 그게 마녀의 권위다.
이어져서 소망은 ‘나를 모욕한 왕의 가족이 곤혹을 겪었으면 좋겠다’. 더 깊게 따져 들어가면 충분히 존중받고자 하는 마녀의 욕망이다.
조건은 실질적인 부분이자 주문에 해당한다. ‘열다섯 생일날’, ‘물레 바늘에 찔려’, ‘죽는다’.
“셋 중 하나만 완전히 허물어지면 저주는 풀려요. 권위와 소망은 술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조건은 상대적으로 다루기 수월하죠.”
내 경우 권위는 뭐고 소망은 뭘까? 술자를 밤과 낮의 마물로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클레멘츠로 생각해야 하나? 복잡하다. 이래서 상당히 복잡한 저주라고 하나 보다. 젠장.
“당신이 걸린 건, 어린 새로 변하는 저주. 이 균열은 조건을 수정하며 생긴 빈틈이에요. 그 틈을 통해 원래 모습을 잠시 되찾으신 거고.”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합체 마녀는 ‘진심을 담아 강렬히 염원하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흠집을 내어 주었다.
들장미 공주 역시 다른 요정이 저주의 조건을 변경해 주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레 바늘에 찔린 공주님은 죽는 대신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겁니다.’
“원하신다면 저 역시, ‘조건’을 파고드는 법을 연구해서 그 저주를 풀거나 완화해 드릴 수 있어요. 관심 있으신가요?”
“네! 네에!”
나도 모르게 마법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기꾼이라고 의심해서 미안해요!”
이런 마법계의 빛과 소금이 사기꾼 행세를 하며 숨어 있었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막막하기만 했던 저주 생활에 끝이 보인다.
‘저주를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풀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따위 계약서엔 없었다. 나는 무척 당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1년간, 클레멘츠와 함께 있을 때만 병아리 상태면 되는 거잖아?
완전히 풀 수 없어도, 하다못해 원할 때 클레멘츠의 개입 없이 모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 마법사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내 손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제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서부턴 유료 결제 서비스 되겠습니다.”
“……어째서.”
“말했잖아요. 오늘 하루 종일 허탕 쳤다고. 저는 장사하러 나온 거예요. 자원 봉사가 아니라.”
“얼, 얼마면 되는데요?”
엔시까지 긴장해서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보기 좋게 빙그레 웃는 입술이 영 불안했다.
“첫 손님이니까, 할인해서 200크로나.”
“…….”
“없어요? 그럼 가진 거 다 꺼내 봐요.”
역시 좋은 건 다 비쌌다. 나는 피 같은 돈주머니가 그자의 손에 넘어가는 광경을 허망하게 지켜봤다.
“흡…….”
“누나, 울지 마요. 돈으로라도 저주를 풀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엔시가 허심탄회하게 날 위로했다. 아주 어른스럽다. 역시 얘는 크게 될 놈이었다.
“이 돈은 선금으로 칠게요. 귀족 같아 보이니 잔금도 치를 수 있겠죠.”
마법사는 돌돌 말린 빈 종이가 여러 개 들어 있는 상자를 내밀었다. 그걸 통해 추후 자신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하…… 하하하. 200크로나짜리 편지지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내가 가진 모든 현금을 가로챈 마법사는 아주 기뻐 보였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와, 내가 장사해서 돈을 벌었어!’라는 들뜬 기분이 전해져 왔다.
엔시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천막을 나섰다.
클레멘츠와의 계약만 완료되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간사하게도 갑자기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거래는 성사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뽕을 뽑아 주겠어.
초여름의 긴 해 아래,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저마다 떠들며 거리를 오갔다. 볼거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호객하는 상인들도 여전히 열성적이었다.
아이는 들뜬 기색이었다. 물약의 입자가 둥실 떠다니며 빛을 흩뿌리는 장면은 확실히, 마법에 대한 아이의 환상을 충족시켜 줄 만했다. 설마 ‘진짜 마법사네 천막’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진짜 마법사가 있을 줄이야.
저주 문제도 해결책이 보이는데, 여전히 엔시를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니고 있던 돈도 다 써 버렸다. 저녁이 되려면 몇 시간은 남아 있었지만 초조해진 채 아이를 곁눈질했다.
“너무 걱정 마요, 누나.”
“으응?”
“저도 돈 있어요. 봐요.”
엔시는 호주머니를 짤랑거리더니 은화 세 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 개를 다시 넣더니 하나를 가지고 말했다.
“이걸로 우리 저기 가서 얼음 설탕 사 먹어요.”
소년은 내가 돈이 없어서 걱정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작은 손에 붙들려 가니 한쪽에서 설탕을 솜씨 좋게 가공해 얼음판처럼 만든 과자를 팔고 있었다.
설탕 과자는 입 안에 넣으면 약간 시원한 느낌이 났다. 한입 가득 베어 문 엔시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맛있어?”
“네. 헤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이게 녀석의 일상이어야 하는데. 글러먹은 어른들한테 휘둘리지 말고 과자나 먹으면서 행복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