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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68)화 (68/218)

68화

설득해야 해.

“엔시가 스스로 거울 덮개를 돌려 드리게 할게요.”

회색 후드를 쓴 자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전하께서는 제국법의 공정한 집행자시잖아요. ‘법관의 선서’에도 먼저 잘못을 돌이키고 용서를 구하는 이에겐 선처를 베풀도록 되어 있고요.”

“……오필리어 님.”

“그분에게 전해 주세요. 제게 원하는 바를 말할 자격이 있다면, 저는 저 아이가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대답하곤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숨을 푹 내쉬자 온몸을 굳혔던 긴장이 소르르 빠져나갔다.

“엔시!”

빠르게 달려 따라잡자 소년은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시크하긴, 너 방금 죽다 살아났어. 이 녀석.

일단 큰소리는 쳐 놨지만, 어떻게 하면 엔시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이제 어쩔 셈이야? 그 불량배들이 깨어나면 널 찾을 건데.”

“아, 걱정 마요. 그 집으론 다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어디로 갈 거야?”

소년은 날 돌아보더니 픽 웃었다.

“알면 다쳐요.”

“너…….”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아이는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돌아섰다. 뒤를 쫓으며 캐물었다.

“너 설마 지금 치명적인 척한 거니? 비밀을 감추고 도시를 종횡무진하며 위험과 맞서는 고독한 한 마리 늑대…… 뭐 그런 콘셉트였니?”

“아니요!!”

걸음을 멈춘 소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기에 들뜬 눈도 처음 봤을 때처럼 반짝거렸다.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내 웃음기에 아이의 홍조가 더 짙어졌으니까.

“나는 너를 돕고 싶어서 인간이 됐어. 밤이 되면 다시 병아리로 돌아갈 테지만, 그 전까지는 힘이 닿는 한 도울 거야.”

“……네.”

점차 원래 색을 되찾은 얼굴엔 엷은 홍조만이 남았다. 소년은 시선을 비스듬히 떨어뜨렸다.

“너는 지금껏 한심한 어른들이 시켜서 나쁜 일을 해 왔어. 하지만 이번엔 네가 선택해서 옳은 일을 할 수도 있어.”

결국은 또 거울 덮개를 돌려 달란 말이었다. 엔시의 거부감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다급히 아이의 손을 잡아챘다.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 돌려주는 게 옳은 일이고, 본인도 살 길이니.

“대충 짐작은 돼. 높은 분이 그 천을 가져가기로 했고, 대신 많은 돈을 약속하신 거지? 넌 그 돈이 꼭 필요한 거고.”

“…….”

“내가 대책을 마련해 줄게.”

“누나 귀족이에요? 그래 보이긴 하지만…….”

아이는 나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그뿐인 것 같은데…….”

“…….”

“늦었지만 예를 갖출까요?”

“관두렴.”

일단 귀족이긴 할 뿐 아무 것도 없는 내 밑천을 잘도 꿰뚫는군.

나는 나의 쓸 만함을 입증하기 위한 자기 PR을 계속했다.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라 생각하니 별로 대수롭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있댔지? 당분간, 할머니를 모시고 누나 집에서 사는 거 어때? 수도에서 먼 곳이라 새 삶을 시작하기 좋을 거야.”

상식적으로 떠올렸을 때 아이는 가족과 거처를 가장 염려하고 있을 거다. 그 부분이 해결된다면 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

은근슬쩍 소매치기였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인생 살아 보라는 권유도 끼워 넣었다.

아무리 몰락했어도 작은 아이의 피난처 정도는 되어 줄 수 있는 집이었다.

“……어딘데요?”

“서쪽 끝. 혼우드.”

엔시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 참. 조상님, 입지를 좀 잘 잡지 그러셨어요.

“멀어도 너무 멀잖아요.”

“그, 그치……. 그래도 아름다운 곳이야. 물가도 싸고, 학교도 있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

도시를 누비는 고독한 아기 늑대에게는 너무 심심한 곳이겠지만…… 아무튼.

희망은 있었다. 아이는 분명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수도 생활이 맞아요. 혼우드 같은 변방에서 대체 뭘 하고 살아요.”

“그야…… 넌 아직 어리니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슬슬 궁색해져 갔다. 식은땀이 난다.

클레멘츠를 팔면 일이 간단해진다. 이미 그가 널 찾았고, 내게서 떨어지는 즉시 널 죽일 거라고. 그러므로 당장 그에게 훔친 물건을 돌려주고 용서를 비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하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둘 생각이다.

공포에 질려 따르는 것은 ‘스스로’ 한 게 아니다. 나는 엔시가 스스로 돌려주게 하겠다고 말했다.

협박에 굴복해 비는 모습에 과연 그가 승복할지도 의문이었다. 클레멘츠에게 연민을 바라 봤자 소용없었다. 싹싹 비는 나를 인정사정없이 병아리로 만들어 버린 걸 보라. 젠장…….

차라리 흥미를 느끼게 하는 쪽이 나았다.

대다수의 로판 남주들은 일단 ‘흥미롭군’이라고 말하면 뭔가 행동을 취하곤 하니까. 그러니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엔시의 마음부터 움직이는 걸 보여 줘야 했다.

그리고 난 충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절하긴 했지만 분명 고민했다.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너도 다 계획이 있었을 텐데, 바로 마음을 바꾸긴 쉽지 않겠지. 좀 더 생각해 봐. 응?”

“……네.”

역시!

나는 기뻐서 활짝 웃었다.

기한은 저녁까지였다. 밤이 되면 다시 병아리로 변할 테고, 그럼 설득을 할 수 없고. 클레멘츠는 날 황궁으로 데려갈 테고. 그대로 타임아웃이었다.

멋쩍은 듯 긴 머릴 긁적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혼우드가 말이지. 별 볼 일 없어 보이겠지만 꽤 살 만해. 일단 영주 후계 1순위에 있는 아가씨가 엄청 좋은 분이고.”

혼우드의 장점을 설명해 줘야지. 또 아이가 혹할 만한 영업 포인트가 없을까? 고민하는데, 거짓말처럼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코를 찔렀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입은 이미 움직여 그 냄새의 정체를 말하고 있었다.

“시내 가로수 길에서 파는 레몬 크림 파이가…… 끝내주게 맛있단다.”

“파이요? 고작?”

“고작이라니! 입맛에 맞는 간식거리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 주는데.”

“뭐, 혹시 저거 말인가요?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하네요.”

저거?

설마. 아니 그럴 리가- 하면서도 엔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진짜였다. 어느새 광장에 진입한 우리 앞에 ‘가로수 길 파이집’이라는 임시 간판이 서 있었다.

‘화제의 레몬 크림 파이집, 서부를 휩쓸고 드디어 수도 상륙!’이란 광고판도 보였다. 냄새 때문인지, 광고 문구 때문인지. 돌아다니며 배가 고파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은 꽤 길었다.

“응…… 저거야. 저게 맞아.”

난 소년의 손을 잡아끌고 줄 끝에 섰다.

그래, 이거다. 아무리 엔시가 세상에 찌들었다 해도 본질은 어린아이 아닌가.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꼭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혼우드의 숲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시장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인심 좋은 상인들과 엔시 또래의 귀여운 아이들도 소개해 주고. 잘생긴 형이 맞춤 책 소개 서비스를 해 주는 시몽 씨네 서점도 얘기해야겠다.

“그런데 왜 그래요?”

“뭐가 말이니?”

“표정이 굉장히 아련해 보여요. 첫사랑이라도 봤어요?”

“응.”

“노점에서 파이를 굽고 있는 저 아주머니요?”

“아니. 방금 지나갔어.”

방금 어떤 사람이 두 개 사서 포장해 갔어.

“그럼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여기 줄 서고 있어요?”

“이미 지나간 인연은 미련 없이 놔줘야 하는 게 어른이란다. 대신에 맛있는 거나 사 먹고 기운을 내야 해. 그래야 새로운 인연을 잡을 수 있게 되는 법이란다.”

정말 멋진 어른인 것처럼 날조해 내며 줄어드는 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뭔 소리예요…….”

엔시는 전혀 이해 못 했지만…… 괜찮다. 일단 맛을 보여 주면 녀석도 첫사랑에 빠지게 될 테니.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앞으로 겨우 대여섯 사람 정도 남았을 때, 갑자기 앞사람들이 불평을 쏟아 냈다.

“뭐예요?”

“뭐야? 없대요?”

“못 산대. 누가 구워 둔 걸 다 사갔다나 봐.”

“아니. 그럼 다시 구우면 되잖아?”

그들은 툴툴대며 흩어졌다. 우리 뒤에 섰던 사람들도 그 소릴 들었는지 맥없이 갈 길들을 갔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 먼 곳에서 어떻게 만난 기회였는데. 웬 상도덕 없는 사재기꾼이 그걸 다 사 버리다니.

“인정할 수 없어…….”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요?”

정말 불필요하게 학습이 빠른 친구였다.

“내가 그깟 파이 좀 먹자고 이러는 줄 아니?”

“아니었어요?”

“아니야. 다 너에게 혼우드의 멋짐을 알려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잖아.”

파이를 맛있게 먹고. 혼우드가 좋다는 걸 알게 되고. 자수하고 광명 찾고 안전해지고. 알겠니?

“아, 네에…….”

쯧쯔. 믿음이 약한 자로다. 난 가판대를 정리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필리어 양!”

“안녕하세요. 나파르 아주머니. 오랜만이에요. 수도는 어쩐 일이세요?”

나의 영원한 존잘님. 레몬 크림 파이 파티셰 나파르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반겨 주었다.

“오필리어 양은 여전하군요. 사실 딸이 수도에서 공부 중이거든. 만나러 왔어요.”

“와, 따님이 엄청 똑똑하신가 봐요!”

“오호호호! 절 닮아 그렇지요.”

“그럼요! 그럼요!”

나파르 아주머니. 당신은 제과제빵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잖아요. 따님이 당신 닮아 우수하신 건 당연합니다. 암요.

진정성을 듬뿍 담아 열렬히 긍정하는 날 엔시가 묘하게 쳐다보다 속삭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남은 파이가 먹고 싶었어요?”

“조용히 해. 내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지 마.”

다행히 아주머니는 엔시의 불손한 소릴 못 들은 듯싶었다.

“수도에선 파이 반응이 어떨까 해서 한번 팔아 봤는데, 꽤 좋네요. 축제 기간이 겹쳐서 그렇겠죠. 클랏샤의 칼로카이리는 확실히 남다르네요.”

“축제도 축제지만요……! 미각이 손실되지 않은 이상은 아주머니의 파이는 누가 먹어도 맛있어요.”

“어머.”

나파르 아주머니는 호호 웃다가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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