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한 남자가 광장에 서 있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었다. 평소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 신분을 숨긴 지금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은 존재 자체로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장소로 옮기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태도로 있는 데엔 이골이 난 사람이, 어딘가 안달이 난 모습으로 이곳저곳 시선을 던져 댔다. 혹여 거기에 찾는 이가 나타날까.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흡사 작고 어렸을 때에 유모를 놓쳐 어딘지도 모르는 황궁 부지를 헤맸을 때와 같았다. 그런 난감하고 하잘것없는 기억이라니. 불쾌했다.
“너무 걱정은 마라. 충분한 대비는 해 두었으니.”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또 그따위였다.
클라우디아가 어떤 식으로든 손을 쓰리란 건 예상했다. 하지만 대담하게도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차를 열고, 그의 사랑스러운 아기 새마저 데려가 버릴 줄이야.
대비를 해 둔 건 사실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림자들이 즉시 뒤를 쫓았다.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소년은 빠른 속도로 골목 사이를 누비며 사라졌으나, 덮개를 담아 둔 가방에는 마력으로 동작하는 추적기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추적 신호가 감지된 도박장엔 소년도, 아기 새도 없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했다. 오필리어를 납치한 소년도, 대낮에 가방을 지닌 채 도박이나 하고 있다는 사내들도, 그들을 고용했을 클라우디아도, 심지어는 무능한 그림자들이나 무력한 자기 자신조차도 끝장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필리어를 무조건 되찾아야 했고, 방법은 쉬이 떠올랐다.
그 놈팡이들은 뻔하게도 입장료조차 체납하는 악성 고객이었다. 지배인을 위협해 놈들을 쫓아내게 하고, 그들이 향하는 집을 다시 추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 닿는 곳에 아기 새가 없다는 사실이 시시각각 신경을 갉아먹었다.
“어떻게 됐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전하.”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가까운 구조물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대답했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분노. 그림자는 주군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쉬이 찾거나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늘, 사냥감을 몰듯이 여유를 두는 분이었다. 그러나 어찌 이러시냐 묻지 않았다. 그림자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황족을 따르는 존재.
“……소식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다행히도 때마침 수도 변두리까지 갔다 온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분을 찾았습니다.”
한낱 동물을 예우하고 경호하는 것쯤이야 놀랄 것도 없고, 놀라워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림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에.
“그런데…….”
설령 그 동물이 백주 대낮에 사람으로 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는 목적지에서 위험에 처한 오필리어 님을 보았고, 명령에 따라 모두 처리하고 덮개를 회수하려 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이어진 보고에 클레멘츠의 표정은 써늘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묘하게 일그러졌다가 풀어졌다. 끝은 헛웃음이었다.
* * *
꽤 멀리 떨어진 골목으로 와서야 우리는 한숨을 돌렸다. 숨을 고르자마자 엔시는 질문을 던져 댔다.
“누나 뭐예요? 아니, 삐약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떻게 대답하면 좋지? 물론 나는 부업으로 병아리를 하고 있는 오필리어다. 그건 그거고.
왜 클레멘츠의 물건을 훔치고 날 납치했냐고 화를 내야 하나?
괜찮냐고, 그 나쁜 놈들 때문에 기죽지 말라고, 할머니는 잘 계신 거냐고 걱정해야 하나?
아니면 방금 우리 좀 괜찮은 콤비 아니었냐며 친근하게 굴어야 하나? 어째야 하지?
흠, 어쩌긴 뭘 어쩌나. 인간으로 변하면서 뭘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내 이름은 오필리어야. 원래는 사람이지만 저주를 받아 병아리가 되었어.”
“와!”
소년의 눈동자가 금세 선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역시 처음 본 모습이 맞았다. 이 아이의 눈은 유독 풍부하게 빛났다.
“혹시 누나는 공주님이에요?”
“아, 아니…….”
“못된 마법사가 결혼을 강요했어요?”
“아니…….”
“진정한 사랑만이 누나를 구할 수 있나요?”
“아니…….”
애늙은이 같으면서도 의외로 읽을 동화는 다 읽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럼 뭐냐고 투정을 부렸다.
“나는 널 돕고 싶어서 사람이 된 거야.”
“……정말요?”
“그럼! 그리고 나 역시 엔시 너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떤 걸 도와 드리면 되죠? 저주를 푸는 일인가요?”
아직 동화 메타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쉽게도 그건 소년이 해결해 줄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저은 다음 아이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눈높이를 맞췄다.
“네가 마차에서 훔쳐 간 덮개, 내가 아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거란다. 돌려주겠니?”
덮개 얘기가 나오자마자 아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엔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저도 꼭 필요해요.”
“하지만 네 것이 아니잖아. 그게 없으면 그 사람은…….”
“마차에서 나왔던 키 큰 은발 머리 형인가요?”
클레멘츠 얘기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요?”
황태자 전하시란다……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걸 빼고 나니 이건 뭐 할 말이 없었다. 친구? 내가 언제 걔랑 친구를 먹었다고……. 남주인공? 대낮에 잠꼬대 하는 걸로 들리겠지. 고용주? 아, 이거다.
“내 고용주이자 계약자랄까!”
“무슨 내용의 고용 계약인데요?”
“아, 그러니까 그건…….”
기한부 동거? 유희 제공? 입 밖에 내려니 왠지 떳떳하지 않게 들리잖아!
“쌍무적 계약…….”
“얼버무리지 말고요.”
“…….”
만만치 않은 아이였다. 결국 날 병아리로 만든 게 클레멘츠란 것까지 알아낸 엔시는 팔짱을 끼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결국 누나를 변신시킨 못된 마법사가 그 형이네요.”
“어, 어…… 응.”
“그럼 제가 누나를 구해 준 거 아닌가요?”
“어……?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단다.”
난 설명하려고 애썼다. 억지로 잡히긴 했지만 기한을 채우면 풀어 주기로 했으며, 일단 그 사람이 생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단 얘기를…….
아이의 얼굴은 점점 짜게 식어 갔다.
“어른의 사정은 복잡하군요.”
“으응…….”
“뭐, 알았어요. 그럼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제가 괜히 누나를 주워 왔네요. 실례했어요.”
“그, 그래.”
엔시는 마차가 서 있던 곳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덮개를 돌려줄 순 없다고 못을 박았다.
뭔가 사정이 있어 반드시 황비와 거래하고 돈을 챙겨야 하나 본데, 해결해 주마고 이야기를 들을 만큼 신뢰를 주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우린 초면이니까.
어쩌지?
걸음이 빨라 벌써 저만치 떨어진 소년을 따라잡는데…….
“오필리어 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처음엔 내가 무슨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금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필리어 님.”
고개를 돌리니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사람이 있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니, 왜 남의 집 발코니 난간에 앉아 있는 거예요!
“누, 누구신지……?”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클레멘츠가!
그 사람은 후드가 달린 잿빛 망토를 입고 있었다. 날 향해 내보인 팔목 안쪽엔 황태자궁의 상징인 아다만티스와 검의 문신이 있었다. 움직임에 햇볕 안쪽으로 들어간 망토 자락은 순식간에 질감을 잃으며 반투명해졌다.
세상에…… 비싸겠다.
“그분께서 몹시 걱정하고 계십니다.”
목소리마저 잿더미에 넣었다가 금방 빼낸 듯 버석거렸다. 특색을 뭉개 없앤 듯한 음색. 아니,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특징이 휘발된 건가? 아마 망토와 마찬가지로 마법의 일종인 듯싶었다.
소설 속에서 밤중에 으슥하게 뭔 일을 명령하거나, 보고받거나 할 때 나오는 그런 사람인 거겠지? 어둠 속에서 뭔가를 슥-삭 하고 해치우는 그런 사람!
클레멘츠의 신분이 신분이니 이런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간만에 로판다운 상황을 겪으니 조금 설렜다. 그가 무사히 나와 엔시를 찾아냈다는 안도감도 함께였다. 이제 모든 일이 잘 해결되겠지?
“저 도둑은 저희 선에서 해결할 테니, 이대로 조금만 더 떨어져 계십시오. 이후 전하께서 계신 곳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상당히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떨어져 있으면 알아서 해결한다니? 정말 말 그대로 슥-삭 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잖아.
“잠시만요.”
식은땀이 났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엔시처럼 낮은 신분의 아이가 황태자의 물건을 훔쳤으니, 그 자리에서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리고만 싶었다.
열심히 학습지나 풀 나이가 아닌가? 고민이라 해 봤자 키가 안 크는 거나 같은 반 좋아하는 아이 정도가 끝이어야 할.
그런데 일찍부터 범죄에 연루되고 일상적인 폭력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없이 목숨을 잃게 생겼다.
엔시가 정말 죽을 만큼 잘못했나?
신분제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이쪽 세상의 법도에 맞춰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데 막상 한 아이의 목숨이 걸리자 그 믿음은 세차게 흔들렸다.
“아이를…… 엔시를 죽이라고 하셨나요?’
“…….”
회색 망토를 걸친 심복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 고통스러운 끝은 아닐 겁니다.”
흡사, 주사 맞을 때 조금 따끔할 테니 안심하라는 듯한 투였다.
“……안 돼요.”
“……오필리어 님.”
클레멘츠는 날 반려동물로 아꼈다. 난 그에게 기고만장하게 굴며 저주를 당한 억울함을 자잘하게 풀어 왔다. 하지만 본래의 내 위치를 잊은 적은 없다.
그는 황족이고 나는 변방의 약소 귀족. 그는 이 세계의 주연이고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조연.
이게 무슨 어디 놀러 가자거나 무슨 간식을 달란 것도 아니고, 황비와의 정쟁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를 불리하게 만들 뻔한 소년을 대뜸 살려 달란 요구를 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래도 나는 이미 엔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 그가 시키는 대로 돌아가면 아이는 죽는다. 그걸 알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