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뺙삐.(자네.) 삐약뺙삐?(혹, 글을 읽을 줄 아는가?)”
내 앞에 쭈그려 앉은 엔시의 바지 자락을 부리로 살짝 당겼다.
“뺘뺘삐이.(황태자께선 대충 자비로우신 분이라네.)”
지금이라도 돌아가 자수하면 용서받고 돈도 받을 수 있을지 몰라. 아니, 내가 주라고 협박할 테니까 내게 맡겨!
우선 되는 대로 이 진흙 바닥에 글자를 써 보기로 했다. ‘엔시’라고. 병아리가 대뜸 땅 위에 자기 이름을 쓰면 일단 놀라고 보겠지?
“왜 안 먹냐? 삐약아.”
하지만 소년은 병아리가 갑자기 이상한 궤도로 움직이는 것보단, 기껏 갖다준 음식을 안 먹는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땅에 떨어져서 싫어?”
병아리 발자국을 찍어 대충 한 글자를 완성해 가던 나는 흠칫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은근히 예리한 녀석이다.
“병아리 주제에 진짜 까탈스럽네. 귀족이 키우던 거라 그런가…….”
사실 소년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했고, 내가 우연히도 인간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애의 예상은 적중했다. 소년은 툴툴대면서도 고사리 손을 꼬물거려 밀알을 주워 모았다. 그걸 후후 불어 먼지를 털더니 내 앞에 좍 펼쳐 보였다.
“삐이…….(짜식…….)”
“굶지 마.”
얘는 왜 또 한낱 병아리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숨 쉬듯 도둑질하고, 중요한 물건을 두 번이나 바꿔치며, 입도 험한 소년을 순수하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닭이 될 때까지 키워 준다.’라는 약속은 진실해 보였다.
소년의 반대편 손등은 긁힌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났다. 물끄러미 그걸 보다가 밀알을 쪼아 먹었다.
“휴. 밥 먹이기 힘드네. 너 이러다가 어느 세월에 멋진 장닭이 돼서 홰도 치고 그럴래?”
내가 수평아리인 줄 알고 있구나. 암컷인데……. 하, 암컷수컷이 아니라…… 이거 참…….
굳이 정정해 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내가 땅바닥에 쓴 글씨를 다시 한번 톡톡 두들겼다. 그제야 소년은 ‘에’까지 써 놓은 글자에 주목했다.
“응? 이거…….”
그래! 그거!
긍정의 의미로 날개를 파닥이고 이어 쓰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불길한 발걸음이 울렸다.
“어어이, 엔시.”
“……뭐야.”
엔시는 금세 표정을 굳혔다. 은은히 빛나던 올리브색 눈동자가 또다시 흐린 그늘에 덮였다.
“왜 벌써 와?”
“응? 톰슨 저 자식이 칠칠치 못하게 돈지갑을 놓고 왔다고 하잖냐. 와하하!”
“망할 지배인 놈이 오늘은 외상을 안 해 주겠다잖아! 염병할 돈독 오른 놈.”
톰슨이라 불린 금발 덩치가 집으로 들어간 사이.
“근데 너 뭐 하냐? 야, 이 새끼 봐!”
“오오, 병아리 맘마 주는 거야?”
나머지 둘은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이름이 유진이랬나? 블랙 모히칸 헤어의 불량배는 방금 전 넘겨받은 가짜 태피스트리가 든 가방을 소중히 껴안고 있었다.
짝눈에 얼굴이 가무잡잡한 놈이 엔시의 내뻗은 손목을 걷어찼다.
소년이 한 알 한 알 주워 모은 밀알이 다시 요란히 흩뿌려졌다. 이쯤 되니 나도 화가 났다. 밥 먹을 땐 새도 안 건드리는 거 몰라?
“뺘익!!!(얀마!)”
쌀알 하나 수확하는 데 농부의 정성이 여든여덟 번 들어간단 말이다! 이건 밀이지만 아무튼…… 이름 모를 불량 청년의 발을 매섭게 걷어차 봤지만 전혀 타격이 없었다.
“오호- 새 새끼도 성깔 더럽네. 꼭 지 닮은 걸 주워 와선.”
그의 말대로였다. 소년의 성격이라면 벌써 일어나서 뭐라고 항의했어야 할 것 같은데, 조용했다. 엔시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안한 눈길로 판잣집 쪽과 옆의 둘을 번갈아 살폈다.
무슨 일이지? 덩달아 나까지 불안해졌을 때였다.
“야!!”
집 안쪽에서 성난 외침이 울렸다. 이어서 저급한 욕설도 몇 마디 튀어나왔다.
“뭐야? 왜 그래?”
“아, 망할 할망구가 없어!”
“뭐? 그 노망난 노친네가 가긴 어딜 간다고?”
“몰라!”
여유롭게 농담 따먹기를 하던 둘 중 한 명이 덩달아 뛰어 들어갔다. 한 명은 험악하게 돌변해 엔시의 어깨를 잡아챘다. 소년은 날 주워서 도망가려는 듯한 몸짓을 취했지만 너무 늦어 있었다.
“할망구 어쨌냐?”
이내 집 안에서 다른 비명 소리가 울렸다.
“짐도 싹 없어졌어! 돈도!”
“망할 노친네! 날랐나 봐!”
“멍청아,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할망구가 이렇게 깔끔하게 챙겨 날랐겠냐?”
막돼먹은 삼총사와 함께 나 역시 엔시의 큰 그림을 깨달았다.
약점이 될 수 있는 할머니를 미리 다른 곳으로 모셔 둔다. 황비로부터 의뢰받은 진짜 물건을 숨긴다. 감히 가짜를 가져와 고귀한 황비를 기만한 삼총사가 경을 치게 놔둔 뒤, 자신이 진짜 덮개를 가져다주고 돈을 받아 도망친다.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단 하나, 이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게 허점이었다. 평소라면 불량배들도 곧 의뢰비를 만질 생각에 부풀어 향락에 젖어 있었겠지만, 언제든 지금처럼 예외는 생기는 법이니까.
그리고 모든 계획이 들통났을 때 엔시가 당하게 될 일은…….
“야. 진짜 물건 어쨌냐? 응?”
유진이 가방을 내던졌다. 대충 훔쳐다 넣은 태피스트리가 흘러나와 흙바닥을 굴렀다.
곧 화가 머리끝까지 난 두 명 역시 집에서 튀어나와 소년을 둘러쌌다.
아, 어떡하지?
아무 잘못 없을 때도 무자비하게 맞던 소년이 무사할까? 아무리 영악한 도둑이라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안전은 지켜져야 했다. 아니, 애당초 저런 독버섯 같은 놈들 아래 있지 않았으면 엔시가 도둑이 되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화가 났다.
“뺙뺙. 삑!(아동 학대 그만둬라!)”
소년과 불량배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뺙삑! 끼익!!(너희 같은 놈들의 에너지를 만드는 데 낭비된 산소에게 사과해라!)”
하지만 최대한 당당하게 나서 봐도 나는 병아리. 초등학생을 위협하는 나쁜 심성의 불량배에겐 장애물조차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뭐야? 이건.”
“아, 시끄러워.”
그러고선 더러운 발로 홱 차는 게 다였다. 흥, 느려 터진 덕분에 가볍게 회피했지만.
그들은 작은 소년을 때리고 발길질을 해 댔다.
“저걸 그대로 갖다 바쳤으면 어쩔 뻔했어? 우릴 죽일 셈이었냐, 응?”
“짜식, 많이 컸다? 진짜는 어쨌어?”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장면에 나까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럴 때 병아리인 거야? 원래 모습이었으면 최소한 말려 볼 수는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그만두게 하고 싶어서, 무작정 뛰어들어 그들의 손과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씨! 뭐야?”
“뭔 병아리가 이래?”
“비싼 밀 먹고 미쳤나?”
“뺙!”
톰슨이었나? 덩치 좋은 금발 놈이 나를 잡아채더니 패대기쳤다. 카밀에게 당했던 공격과 유사했지만, 이번에는 스윙의 속도와 파워부터가 달렸다.
“뼉!”
흙이 약간 봉긋이 솟아오른 데 부딪힌 게 천운이었다. 정통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에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안 돼.
소년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리고 저대로 빼앗긴다면 흡수 보존 마법이 걸린 덮개는 고스란히 황비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 여자가 클레멘츠에게 무슨 장난을 칠지 몰라.
“삐이…….”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흐려지는 시야 한쪽. 마당의 닭이 꼬꼬거리며 밀알을 주워 먹고 있었다.
“삑비빅.(내 건데…….)”
고달픈 상황이다 보니 갑자기 너무 서럽게 느껴졌다. 이 와중에 성벽 너머로 보이는 오후의 태양이 찬란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좀…… 울어도 되는지…….
* * *
“흐어어어엉!”
눈앞이 하얗다. 하얀 공간이다. 아니, 까만 공간이다.
혹시 나는 죽었나?
“뭐 이 따위 개죽음이 다 있어…….”
빙의해서 고생만 하다가 이렇게 마감하는 생이라고? 고소하자. 상대가 누구든 고소하고 보자.
“개죽음?”
나타났다. 고소 대상!
이 맥락에선 아마 신이나, 절대자나, 뭐 그런 존재겠지.
“어린 새를 닮은 인간의 딸, 죽었어? 아닌데. 죽은 적이 없는데.”
아, 이 말투는?
나 죽은 거 아니었구나. 정신을 잃은 타이밍에 하도 절묘하게 연결되기에 영락없이 저승 온 줄만 알았지.
“합체 마녀?”
“그건 누굴 말하는 거지? 어린 새를 닮은 인간의 딸. 우린 닉타와 메라. 밤과 낮. 합쳐진 ‘시간’.”
마녀는 하얀 보석과 검은 깃털로 된 왕좌에 앉아 있었다. 눈높이 상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서 날 하염없이 내려다보는지라, 기분이 조금…… 별로랄까.
“갑자기 왜 부른 거예요? 필요할 땐 날 무시하고. 이…… 이!”
안 그래도 합체 마녀에겐 따질 게 남아 있었다.
“이 사기꾼!”
“사기꾼?”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장된 검은 바탕 가운데 박힌 하얀 홍채는 꼭 흐린 날의 태양 두 개 같았다.
“시간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 시간은 아무도 속이지 않아.”
“무슨, 무슨 균열을 내 줬다면서요! 간절히 염원하면 균열이 벌어지고 제 저주가 풀린다고 했잖아요!”
“맞아.”
단답형의 대답에 당장이라도 머리에서 김이 올라올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에요! 얼마나 간절하게 빌었다고요.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사람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정말로 염원한 게 맞아?”
“아니, 그럼 가짜로 염원했겠어요?”
“그럴 리가…….”
아무래도 여러 일을 겪으며 난 좀 폭력적으로 변했나 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합체 마녀를 때리고 싶었다.
실제로 흑백으로 된 옥좌를 향해 날아 올라가기도 했다.
“안 돼!”
합체 마녀는 내가 무슨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했다. 그렇게 동작이 신속했다니. 놀랄 일이다.
하얀 눈동자엔 순수한 사실이 어떻게 통하지 않느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저절로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베일리스 후작의 생일연 전날. 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내심 그 이후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것 같다.
여기서 인간이 되면? 모두가 낯선 사람인 이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또 어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