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 마차가 어느 분이 타신 마차인 줄 아느냐!’ 같은 클리셰적 스킬을 쓰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클레멘츠는 별 저항 없이 마차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말고 황궁으로 직행하라.”
그러고 나서는 연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역시 그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걸까?
수심에 잠긴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님, 제가 님 계모가 짠 천을 찢었는데 어떡하죠.’ 따위의 새 고민거리를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말할 거야. 말할 건데! 좀만 더 이따가 하자.
찔리는 양심을 달래며 애써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번화가로 나온 마차는 상당히 속도를 줄여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뺘.(와아.)”
정신없이 복작거리는 거리가 있었다. 곳곳이 꽃과 깃발, 색색의 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평상시엔 없었을 법한 노점이며 임시 천막들이 넓은 공간 한가득 즐비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한눈에 축제 현장임을 알 수 있었다.
노점가 입구와 광장엔, 멋 부린 글씨체로 ‘칼로카이리’라고 쓰고 물감으로 꾸민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광장 중앙엔 나무로 짜 올린 무대가 있었다. 현수막과 비슷한 색의 띠를 두른 스태프들이 무대에 놓을 꽃과 장비를 쌓아 두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총체적으로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잠시 나가서 콧속에 바람만 채워 넣어도 에너지가 충전될 것 같았다.
“나가서 구경하고 싶나?”
어느새 이쪽을 봤는지, 클레멘츠가 넌지시 물어 왔다. 구경하고 싶냐고?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냐. 사실 유렌과 카렌이 축제 콘셉트로 꾸며 주겠다며 조잘거렸을 때 나도 구경할 꿈에 젖어 있었는데.
“삐!!(응!)”
수줍게, 하지만 기쁨과 긍정을 담아 폴짝거렸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이 자식이…….
“삑뺘!!(그럼 왜 물어봤는데!)”
뭐, 이해야 할 수 있다. 지금은 평범하게 놀러 나온 게 아니었다. 언제, 어느 시점에 황비의 음흉한 계략이 손을 뻗칠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나도 다 아는데, 저렇게 약 올리듯이 말하다니! 저 빙글대는 낯짝의 잘난 콧대를 날개로 팍 때리고 싶네.
“삑뺘뺘 규삑뺘.(댁은 확실히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불만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오늘만큼은 그냥 자리에 얌전히 붙어 있어.”
“삐흥.(흥)”
나는 부러 토라진 듯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단 늘어선 천막 가운데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진짜 마법사 마법 상담소]
[고민 상담/ 주문 / 마법 생물 / 저주 / 예언 풀이 전문]
물론 클레멘츠는 일 년 후에 내 저주를 풀어 줄 예정이지만, 혹시 날짜를 앞당길 방법이 있다면, 알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와의 계약에 여러 조건을 붙였지만, 역시 가장 원하는 건 저주를 풀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거였다. 로열 병아리이자 황태자궁의 아이돌 노릇도 좋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인간이 최고.
방법을 찾는대도 병아리 집착공 클레멘츠가 순순히 계약을 중도 해지해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마법 상담 외에 따로 법률 상담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 끙.
어쨌든 그런 것이다. 게다가 아카데미의 괴짜 총장에게 ‘이거 마수 아니냐.’ 소리까지 들었다. 내가 정확히 무슨 종인지 궁금해 죽겠다. 마법 생물 전문이라면 혹시 알지도 모르는데.
꼭 가 보고 싶은데, 언제 또 올 기회일지 모르는데 하필이면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니. 머리로 이해한 것과 별개로 진이 빠졌다.
“오필리어, 수도 구경이 하고 싶은 거라면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보마.”
“삐이삐이.(예, 예.)”
그런데 그는 내가 미동도 없이 돌아앉아 있자 무척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내 이름을 몇 번 부르며 눈치를 살피더니 급기야 내 시선을 알아챘다.
“저 천막을 보고 있나?”
“흥삐.”
“길거리에서 믿을 만한 마법사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 보나마나 사기꾼일 거다. 2황자의 귀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마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테니, 그걸 이용해 짧은 시간에 돈을 벌 생각이겠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더 짜증 났다. 내 까만 병아리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쳐다보려는데, 마차가 다시 멈췄다.
“뺙삐!”
이번엔 좀 전보다 더 큰 진동과 함께.
흔들리는 내 몸을 서둘러 안전하게 잡아챈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이냐.”
마부석을 향해 묻는 목소리는 이번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뭔가 자꾸 일이 생기네.
“저, 전하…….”
마부는 아까 공사 때문에 멈춰 섰을 때보다도 훨씬 당황한 듯했다.
“죄, 죄송하지만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웬 사람이 갑자기 앞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뭐?
말로만 듣던 마차 사고? 로판에서? 그것도 원작 남주가 탄 마차가 누굴 들이받았다고? 이게 무슨 일이람. 심장이 콩닥거렸다.
마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으니 생명이 위독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여든 건지 벌써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하, 클라우디아. 이토록 뻔한 수라니.”
클레멘츠가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아무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하필이면 클레멘츠가 가족 심부름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궁을 나서는 날, 다니던 길이 막히고 사고까지 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앞구르기를 하면서 생각해도 함정이다.
“그냥 가지.”
“삑삐…….(클레멘츠.)”
“일일이 반응해 줄 가치조차 없군. 즉석에서 보상금을 지급하고, 최대한 빨리 출발하라.”
“예, 알겠습니다.”
일견 냉혹하게까지 보이는 명령이었지만 마부는 토 달지 않았다. 이내 보상금 이야기를 꺼내는 듯 앞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원스럽고 빠르게 결단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이번엔 다른 게 걱정되었다.
……만에 하나 저 사람이 황비의 사주를 받은 공갈꾼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차에 황실의 문장이 없으니 클레멘츠의 신분이야 드러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물쩍 현금 박치기를 하고 사과 없이 넘어가는 게 올바른 대처는 아니었다.
“뺘아.(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마차에 받히기는 했잖아?
혹시 피해자가 보일까 싶어, 클레멘츠가 열어 둔 창문 쪽으로 뛰어올라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뭐가 보이기도 전에 그가 즉시 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제발 위험한 짓 마라. 너까지 말려들면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성마른 음성이었다. 하여간 과보호는…….
너나 걱정하라고 한마디 해 주려고 입을 열려는데, 더 큰 소리가 내 가냘픈 삐약거림을 묻어 버렸다.
“아이고오-!”
어딘지 불량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컸다. 모여든 사람들뿐 아니라 멀리서 축제를 즐기던 이들까지 이쪽을 흘깃거릴 정도였다.
“사람 죽네! 귀족 나리 마차에! 아이고, 허리야! 집에 먹여 살릴 자식 놈들이 한가득인데!”
…….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저 사람은 공갈 사기범이 맞았다. 왜, 전생에도 그런 거 있잖은가. 일단 부딪혔다, 아니 스치기라도 했다 하면 일단 차를 세우고 나와서 드러눕는 사람들.
“삐익.(아이고, 골치야…….)”
“……하아.”
함정 각이 날카롭게 섰다. 클라우디아가 놓아둔 함정은 신물 나도록 뻔했지만,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한탄하기 무섭게 밖에선 나오라고 쐐기를 박아 댔다.
“아이고오-!! 너무 귀하신 나리님이라 그런지 나와 보지도 않으시네! 미천한 인생 깔려 죽든 말든!”
차라리 황궁 마차를 타고 왔다면 권위로 해결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름 모를 귀족’으로 보이는 상황이니 이런 식의 역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이 촘촘히 마차를 둘러싼 덕에 이제 마구잡이로 출발할 수도 없었다.
“물러나시오! 물러서시오!”
마부가 구경꾼들을 향해 열심히 외쳐 댔지만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클레멘츠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나가 봐야겠군. 너는 여기 있어라.”
“삐빅.(동감이오.)”
이미 충분히 이목을 끌었는데 나까지 따라나서면 얼마나 눈에 띄겠어. 게다가 한창 병아리 사건으로 매스컴까지 탄 직후인데.
지금으로썬 클레멘츠가 나서서 재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황궁으로 돌아가는 게 최고였다.
클레멘츠는 마차 문을 닫기 전, 문틈으로 내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은 마라. 충분한 대비는 해 두었으니.”
다행히도 그는 다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나 때문에 더 신경 쓰는 모습에 약간 미안해졌다.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저주받은 뒤 처음으로, 클레멘츠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그 흑막 황비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아주 즐거운 외출이 될 수도 있었는데, 뭐냐고. 함정과 공갈 협박 따위로 엉망이 돼 버리다니.
좌석 위에서 솜털을 부풀리며 씩씩거리고 있는데, 철컥 하고 마차 문이 열렸다.
벌써 담판을 짓고 온 건가? 아무리 클레멘츠라도 너무 빠른데…… 응?
“삐빅?(누구세요?)”
처음엔 마부인 줄 알았다. 오늘 우리를 태우고 다녀 준 마부는 키가 좀 작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낯선 얼굴의 조그만 소년이었다. 행색은 초라했고, 아무리 봐도 허락받고 들어온 것 같진 않았다.
바깥의 시선이 클레멘츠와 공갈꾼으로 모여 있을 때 슬쩍 무단 침입을 감행한 듯했다.
자를 때를 넘긴 머리칼. 유난히 반짝거리는, 올리브 빛 눈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쳐 당황했던 소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그건 황비의 거울 덮개가 든 가방이었다.
“뺙삐!!(안 돼!!)”
네 이놈! 요놈 봐라 요놈! 나이가 몇 갠데 벌써부터 도둑질에 발을 담근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나는 최선을 다해 녀석을 저지했다. 클레멘츠의 머리칼을 쪼던 솜씨를 아낌없이 발휘해, 손을 쪼고 발톱으로 긁고 날개로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