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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62)화 (62/218)

62화

잠시 후 정체불명의 녹색 탕약 두 잔을 클레멘츠와 자신의 앞에 놓고, 가운데에 참깨 쿠키를 담은 조잡한 그릇을 올려놓았다.

시장했던 나는 클레멘츠의 주머니에서 뛰어내려 참깨 쿠키를 탐식했다. 클레멘츠는 얌전히 날 위해 쿠키를 잘게 부순 과자 부스러기로 만들어 주었다. 제 몫의 녹색 탕약은 건드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맛없는 건가 봐.

“그나저나 웬일로 메디프 황자님을 위해 움직이신담? 두 분이 함께 아카데미에 재학할 시절에도 함께 있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

허겁지겁 쿠키를 먹다가 귀를 기울였다. 둘이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었다고? 이건, 과거 떡밥!

“당연한 거지만 내 의지는 아니네.”

“그런가요……. 전하의 뜻이었다면 메디프 황자님께선 기뻐하실 텐데요.”

클레멘츠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릴 들었을 때 흔히 짓는 표정이었다.

“마탑의 인정을 받으신 게 페리윙클 혈통 덕이란 폄하 여론도 있지만요. 황자님 학창 시절을 지켜본 마법학부 교수들은 그분의 열의를 잘 알죠.”

하지만 총장은 기이한 냄새가 나는 녹색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추억 여행에 들어갔다.

눈치가 없는 편이구나.

“어쩌면 그분의 부모 형제보다 더.”

“……그럴 테지.”

…….

메디프의 부모 형제라 하면 황제, 황비, 그리고 눈앞에 있는 황태자를 뜻했다. 하지만 총장은 방금 자신이 황가를 통째로 돌려 깠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 천진한 눈빛이었다.

와…… 수도 한복판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갑자기 반작용으로 그녀의 마법 실력에 엄청난 신뢰감이 들기 시작했다.

눈치도 느려. 권력자인 당사자 앞에서 말을 조심할 재간도 없어. 사회생활 레벨이 제로에 가까운 그녀가 어떻게 아카데미 총장이라는 지위에 올랐겠는가? 답은 오로지 마법. 마법 실력밖엔 없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클레멘츠가 이 일에 산드라 총장을 선택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마법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도, 능력도 없는 사람. 당연히 누군가와 짜고 마법에 속임수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황비 쪽이든, 황태자 쪽이든. 한마디로 완전한 중립.

아카데미 총장쯤 되는 위치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그런 성정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고.

클레멘츠는 황비가 이 심부름에 깔았을지 모를 술책에 대비해 최선의 방어를 한 셈이었다. 음, 역시 내 남주인공이야. 똑똑해.

“전하께선 고대어에 능통하시지만, 그것을 오로지 편리한 도구로 생각하시죠. 하지만 메디프 황자님은 또 다릅니다. 그분께 마법은 다른 무언가였어요. 저나 다른 학자들에게 그러하듯이.”

총장은 티스푼으로 탕약을 휘저으며 메디프의 과거를 회상했다.

“마탑으로 가게 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뻐하시던 얼굴이 눈에 선하네요. 그날은 하루 종일 웃으셨어요. 저녁 시간을 놓쳐 가며 스펙트럼 분석을 하실 때마저도.”

그러곤 방금 전의 그 자료를 집착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어차피 몇 년 못 하고 관두실 거, 차라리 마탑 말고 제 옆에 있으셨다면……. 그럼 박사 학위도 얻으셨을 테고, 그분 스펙트럼 뽑는 솜씨는 정말 최고였는데. 아무도 못 따라잡았는데. 밀런 따위…….”

메디프를 조금 아끼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제국의 황자라도 자신이 부려 먹었어야 할 인력으로 보는 시선이 소름 돋았다. 저것이 교수의 광기인가?

불쌍한 밀런 씨…….

“아.”

산드라 총장은 뭔가 생각난 듯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오시면서 엘페노르 학장을 보셨는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아카데미에 오실 거라고 하니 엄청나게 흥분하던데.”

엘페노르?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라 기억을 되짚어 보니, 아카데미에 막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음침한 학생들이 속닥거리던 이름이었다.

“어서…… 엘페노르 학장님께 알려.”

“……아니, 보지 못했는데.”

“아, 잘됐군요. 아마 이리로 오고 있을 테니 곧 만나실 수 있겠지요.”

희한하게도, 그 말을 듣자 클레멘츠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어라, 자세히 보니 핏기도 싹 가신 것 같은데. 만나기 싫은 사람인가?

“이만 가 볼 때로군. 팔라스 총장, 신세를 졌어. 근시일 내로 보답하기로 하지.”

“삐힝?(벌써 가게?)”

아, 아직 참깨 쿠키가 4분의 1개쯤 남았는데!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고.

그는 다급하게 날 챙겨 일어났다. 책상에 펼쳐진 덮개를 다급하게 접더니 보관용 가방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채 대충 쑤셔 넣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으면 좋겠군.”

“어? 잠깐, 전하. 이 몸에도 좋고 머리에도 좋은 트롤 쓸개 차에 아직 손도 안 대셨-!”

쾅.

그는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그런데 무슨 차?

“삐빅?(무슨 일이야?)”

“역시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별로 좋지 않다.”

“삐?”

뜻 모를 대답을 하며 클레멘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침내 그가 돔형 건물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였다.

“황태자 전하……! 여기 계셨군요!”

“……!”

누군가 그를 불렀다. 난 직감적으로 저 할아버지가 엘페노르라는 양반이리란 걸 알았다.

엘페노르 할아범은 이내 책상물림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왔다. 클레멘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문 방향으로 달렸다.

“전하아아-! 절 몰라보십니까? 언어학장 엘페노르입니다아-!”

“……제길.”

“뺙삐!(뭔데요? 왜 도망가?)”

교수에게 돈이라도 빌렸나? 영문을 모르겠다. 바람이 쌩쌩 불었다. 발톱에 힘을 주어 그의 주머니 속 옷자락을 꼭 쥐었다. 떨어질까 봐 무섭다고!

무서운 할아버지가 쫓아오는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언어학의 천재이십니다! 부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에 와 주십시오! 제발!”

이럴 수가. 클레멘츠도 납치당해 부려 먹힐 위기였다니. 소름이 돋았다.

엘페노르 학장은 잘 달렸지만, 역시 클레멘츠가 훨씬 빨랐다. 그는 후문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눈치 빠른 마부는 바로 말을 출발시켰다.

그의 주머니에서 기어 나와 뒤쪽의 창문을 보니, 엘페노르 학장은 이미 출발한 마차를 있는 힘껏 따라잡으며 ‘대학워어언!!’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아카데미,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이름인가.

귀족과 왕족, 황족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친분을 다지는 교육의 장. 로판 좀 읽어 본 독자라면 누구나 동경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름 높은 학자들의 광기. 파릇파릇하다가도 그 광기에 오염되어 서서히 초췌해져 가는 학생들…….

아카데미 쪽은 앞으로 쳐다보지도 말자.

클레멘츠는 오는 길에 탐독하던 언어학 책을 왠지 끔찍하다는 듯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 간이 탁자 위에 마련돼 있던 다른 일간지를 펴 보기 시작했다.

납치당할 뻔한 충격이 컸나 보다. 안쓰럽군.

그나저나 언어학의 천재라…….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확실히 그의 고대어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쟁쟁한 학자들도 풀지 못하던 이론을 해결했으니, 엘페노르 학장이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 귀하고 출중한 고대어 실력을 이용해 했다는 일이……. 지나가던 선량한 백성을 저주하는 일이었네? 이 자식!

부욱.

……?

뭘까? 지금 발밑에서 들린 이 소리는?

어째서 일이 아주 잘못 돌아갔을 때 특유의 싸한 느낌이 뒷덜미를 엄습하는 걸까?

아, 아냐. 아니야. 마차 좌석에 깔린 시트일 거야. 아니면 클레멘츠가 이 근처에 놔둔 가죽 장정 책 표지일 거야. 하다못해 뭐 가방이나 옷 따위일 거야.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바람이 무색하게도, 황비 마마께서 섬섬옥수로 직조하시고 아카데미 총장이 흡수 마법을 걸어 둔, 값으로 따지기 힘든 그 아름다운 직물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세운 발톱 아래 올이 나가 있었다.

안 돼!

클레멘츠는 엘페노르 학장이 온다는 소식에 급하게 도망치느라 보관용 가방을 제대로 여며 닫지 못했다. 나 역시 달리는 마차를 쫓아오는 무서운 모습에 전율하다가 대충 아무렇게나 착지해 앉았는데, 하필 그게 열린 가방 속이었고…….

아아, 젠장! 젠장!

아직 클레멘츠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거 말해야 하나? 말해야겠지? 하지만 아주 작은 흠집인데. 커어-다란 천에 난 아아주 작은 흠집.

하지만…….

‘네 이노옴! 가족을 위해 이런 사소한 일조차 제대로 못하느냐! 못난 놈!’

‘아, 아아……. 그토록 열심히 짠 덮개를 망쳐 놓다니. 황태자, 내가 그렇게 싫었니? 메디프! 미안하구나!’

다 잘해도 트집 잡히는 그가 옳다구나 하고 받을 질책이 눈에 선했다. 환장하겠네! 이, 이것 때문에 이제 다락방에서 자는 거 아니야? 마구간으로 쫓겨나는 거 아니야?

그가 그렇게 되면 내 신세도 장담할 수 없다. 마구간……. 나, 말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말이 내 모이 뺏어 먹지 않을까? 체급상 이길 자신 없는데…….

올이 나간 부분은 또 하필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이었다. 나는 실이 보기 싫게 빠져나온 다이아몬드를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조심스레 밀어 보았다.

당연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삐흐흐흑…….”

“왜 그러지. 오필리어.”

이 와중에 그는 신문을 내리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삐흑…… 삐흡…… 삐흐흐흐…….”

“……무슨 일 있는 건가.”

그의 표정이 걱정에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어마어마한 가책을 느끼며 모든 것을 고백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마차가 약간 진동하더니 멈춰 섰다. 벌써 도착했나 하고 봤지만 아직 길가였다.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전하. 앞에서 무슨 공사를 한다며 길을 막고 있습니다.”

아니, 이 외진 곳에서 공사를 한다고라?

마차는 황궁에서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벽을 따라 인적 드문 경로를 택해 돌아가고 있었다. 길이 막혔으니 거리는 더 짧지만 상가와 광장을 통과해 가야 한다.

“삐익.(수상해…….)”

하필이면 클레멘츠가 궁 바깥으로 나오는 날, 공교롭게 길이 막히고. 기가 막히게도 남은 유일한 길로 몰아넣어지다니. 전부 우연의 일치라면 참 좋겠지만, 황비가 뭔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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