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카시스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준비하라고 일러두겠다. 금세 올 테니 궁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거라.”
“삐약삐약!(발병 걸리실 거예요!)”
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발병?’이라고 묻고 싶단 얼굴이었다. 역시 알아듣는 거 맞네, 이 발병 걸릴 놈아!
나는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갑자기 새의 몸으로 한 건물에 갇혀 사는 기분을 당신이 알 리가 없지!
“오필리어, 그러지 말고…….”
날 쓰다듬으려는 그의 손을 날개로 탁 쳐냈다. 이젠 내 날개에 부담이 가지 않으면서 충분히 임팩트 있게 쳐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클레멘츠도 예전 같으면 매몰차게 두고 떠났을 텐데, 이젠 이렇게 구는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
수려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한숨을 푹 쉬더니.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따라오거라.”
……!
“뺙.(역시…….)”
난 그의 어깨에 안착하며 삐약거렸다.
“삐약. 뺘삐.(이렇게 의리 있고 상냥한 분인 줄 전 진작에 알았습니다.)”
“…….”
“삐삐약(이러니 저러니 해도,) 삐귝.(좋은 얼굴에 좋은 정신이 깃드니까요.)”
“……하아.”
기분이 다시 좋아졌으니 그 한숨이 무슨 뜻인지 추궁하진 않도록 하지.
그가 입은 옷과 마찬가지로 마차 역시 단지 질 좋은 마감재에 검은 광택이 흐를 뿐, 황실의 문장은 붙어 있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치는 축제의 풍경을 볼 수 있으리란 내 기대와는 달리, 마차는 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지 않고 인적이 드문 변두리를 돌아갔다.
“삐익.(어, 어째서…….)”
실망스러움에 추욱 늘어져 있는 사이, 마차가 아카데미의 후문에 내려섰다.
“다 왔다.”
뾰로통한 기색으로 늘어져 있는 나를 클레멘츠가 꺼냈다.
아카데미는 제국 제일의 학술 기관답게 넓은 부지에 일곱 개의 웅장한 학관을 갖추고 있었다. 클레멘츠는 그 가운데 멀리서도 눈에 띄는 돔형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주변에는 가신이나 수행원도 없었고, 신분을 알려 줄 만한 번쩍거리는 물건도 없었다. 하지만…….
“누, 누구야? 저 사람은…….”
“와, 뭐지?”
“왠지 얼굴이 익숙한데…….”
정체를 숨기고 다니기엔 존재감이 너무 뚜렷했다. 역시 얼굴 때문인가? 남녀를 불문하고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웅성대며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 스타의 삶인가?
“신경 쓸 것 없다.”
이내 그가 나를 톡톡 쓰다듬고 보호하듯이 주머니 속에 옮겼다. 하지만 난 머리를 빠끔 내밀고 이쪽을 관찰하는 그들을 관찰했다.
“황태자 전하…….”
이 세계는 한국처럼 미디어가 활성화돼 있진 않았다. 카메라 비슷한 마법 영상 저장기가 있긴 하지만 마탑제 사치품이라 잘 쓰이진 않았다. 클레멘츠는 황제 본인이 아니다 보니 공식 석상 밖에선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귀족들이 모인 학교. 알아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 주위에 웅성거림이 퍼져 갔다.
“틀림없어. 황태자 전하셔.”
“며칠 전에 신문에도 나오셨잖아. 주머니의 저 병아리가 오필리어 양인가?”
“귀여워…….”
음, 신분을 숨겨 봤자 별 의미가 없군. 여긴 클레멘츠의 모교이기도 하고 말이지.
대충 보니까 모여든 이들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눈빛에 선망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면서 입으로 ‘우왕, 황태자 전하!’, ‘주머니에 오필리어 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른 한 부류는 좀 더 수상해 보였다. 어쩐지 얼굴이며 동작에 생기가 없었다.
“황태자님이다…….”
“언어학부의 최대 아웃풋…….”
그들은 멍하니 중얼거린 다음 가자미눈을 떠대며 저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렸다. 뭐야. 뭐라고 하는 건데! 수상쩍어!
“어서…… 엘페노르 학장님께 알려.”
그러곤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약간 신경 쓰였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마치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의연한 걸음을 재촉했다.
“산드라 총장은 가지고 있는 인간성마저 모조리 마법에 쏟아부은 자다. 만나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어.”
“삐빅.”
“보고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거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총장에 대해 설명했다. 오, 그럼 뭔가 공부하다 미쳐 버린 마법사 같은 느낌인 걸까? 본인도 만만찮게 이상한 클레멘츠가 남의 성격에 대해 경고를 다 하고.
“전하, 어서 오십시오. 총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돔형 건물 앞.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건물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깍듯이 인사했다. 행색이 멀쩡한데도 왠지 초췌하고 피폐한 기색이, 아까 수상했던 두 번째 부류와 비슷했다.
그를 따라 몇 번인가 복도와 계단을 통과하고 나니 번쩍거리는 자줏빛 문이 나타났다. ‘총장 산드라 팔라스’라고 적힌 금패가 문짝에서 빛나고 있었다. 안내인은 문을 두드렸다.
“총장님,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왠지, 클레멘츠에게 인사했을 때보다도 배는 비굴하고 조심스러웠다. 번듯한 문 앞에서 그의 어딘지 모를 초췌함이 끝을 모르고 확장되고 있었다.
“그, 그럼 전 이만……. 아직 논문 작업이 한참 남아서 말입니다.”
초췌한 사람이 복도 너머로 도망치듯 멀어졌다.
뭐지, 저건…….
어쨌든 문이 열리고 클레멘츠가 들어섰다.
“어서 와요, 우리 황태자 전하.”
번듯한 문짝과 달리 내부는 아주 지저분했다.
책, 문서, 지구본같이 생긴 것.
각종 표본, 모형, 크고 작은 실험 기구.
흰 가운, 외투, 벨트가 걸린 채 벗어 놓은 치마.
먹다 말고 반쯤 종이로 싸서 팽개쳐 둔 샌드위치. 세면도구.
그런 것들이 아무런 체계나 규칙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방에 늘어져 있었다.
애매한 위치에 놓인 허브 화분은 관상용인지, 즉석으로 따서 샌드위치에 끼워 먹으려는 건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방금 여기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사람은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머리카락이 푸들처럼 곱슬거리는데, 다양한 짐승의 털 뭉치 표본 사이에 있으니 한 번에 안 보일 수밖에.
“산드라 총장.”
그는 보아하니 이런 모습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산드라 총장은 씩 웃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개중에 그나마 깨끗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5년 만인가요? 앉으세요. 밀런, 여기 차와 다과를…… 어라. 밀런이 어디 갔지?”
“여기까지 안내해 준 조교라면 논문을 쓰겠다며 급히 가더군.”
“도망갔네요. 마석 스펙트럼 분석 결과를 뽑아 오게 하려고 했건만…….”
학장은 못마땅한 눈길로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응시했다.
도망갈 만했다.
“앗!”
산드라 총장은 클레멘츠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내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 유명한 오필리어 양이로군요. 혼우드 출신이라는?”
“삐빅.(안녕하세요.)”
“앗! 대답도 하는 거 아니야? 제법 똑똑하네요!”
“웬만한 사람보다 낫지.”
……각도상 어렵지만 클레멘츠의 얼굴을 노려보려고 애썼다. 목소리에서 갑자기 흐뭇함이 뚝뚝 떨어졌다. 이 녀석, 어디 가서 일단 내 칭찬만 하면 다 넘어가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농장에서 주워 오셨나요? 숲에서?”
“숲 쪽이다.”
“벌써 데려오신 지 한 달이 넘게 흘렀는데도 갓 태어난 모습 그대로라…….”
총장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안경을 추어올렸다. 커다란 벽안이 집어삼킬 듯 날 바라보았다.
“삑삐.(저기, 그만 쳐다볼래요?)”
학자의 호기심이 발동한 걸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서, 설마 나를 해부해 보고 싶어 한다거나.
“단순한 새가 아니라, 어쩌면 새끼 마수가 아닐까요?”
응?
어째서 병아리 상태로 있는 동안 전혀 자라지 않는지는 나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마수라니. 그런…… 상상도 못 한 정체인 걸까? 내가?
커도 단순히 닭으로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몹시 흥미로워졌다. 뭘까? 나의 종족은? 속명은? 학명은?
“이럴 게 아니라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요. 최신판 마수 대백과사전이…….”
으음. 모든 물건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방에서 책을 찾으려면 과연 얼마나 걸릴까?
“찾다가 날 저물 게 뻔하잖나. 일단 마법부터 걸지.”
“아, 맞죠.”
쳇. 그래도 궁금했는데…….
덮개를 받아 든 총장은 가장 큰 책상 위에 좍 펼쳤다. 물론 가장 큰 책상 위가 깨끗할 리 없었다.
“이게 황비 전하께서 짜신 건가요? 와, 솜씨 좋으시네.”
대충 깨지는 물건들을 치우고, 어질러진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류들은 한 번에 밀어내 또 다른 종이 산으로 만들었다. 숫자로 가득한 ‘바다와 육지에서의 마법 좌표계 보정 값’과 ‘1학기 학부 수강생 명단’과 이면지가 한데 뒤섞였다.
이 사람, 믿어도 될까?
“스크롤이 어딨더라…… 아, 여기 있다. ‘흡수 보존 마법!’”
다행히도 서랍을 뒤져 스크롤을 찾는 시간은 1분을 넘기지 않았다. 산드라 총장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펜을 주워 스크롤 위에 몇 가지 선을 찍찍 그었다.
정말이지 공포스러울 정도로 마구잡이인데도 클레멘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산드라 총장은 가지고 있는 인간성마저 모조리 마법에 쏟아부은 자다. 만나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어.”
그게 이런 의미였나?
아무튼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빛이 한차례 빛나더니, 마법은 끝났다.
“자, 됐습니다!”
그리고 총장은 그대로 덮개를 버려두고 빙글 돌아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잠깐 이야기나 하고 가요, 황태자 전하.”
“……그러도록 하지.”
아무래도 돈도 안 받고 마법을 걸어 줬는데, 잠깐 말동무나 해 달란 부탁을 거절하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클레멘츠가 그나마 깨끗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총장은 이미 용도가 구분되지 않는 가구들 틈을 한참 뒤진 끝에 찻잎과 과자를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