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칼로카이리에 맞춰 그 애를 돌아오게 하려고 두 분께서 얼마나 애쓰셨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노옴…….”
클레멘츠는 묘하게 싸늘하니 대답했고, 황제는 분한 것 같긴 한데 웬일로 소리는 지르지 않으며 파들거렸다. 뭐야, 이 분위기는 또?
부자를 번갈아 두리번대던 나는 깔끔하게 그들을 포기했다.
그래, 싸워라. 싸우십쇼. 내가 뭐라고 황가 가족 싸움에 더 이상 관여하겠어? 그거야말로 고래 싸움에 병아리 등 터질 일이다.
한편, 친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황비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그득 떠올랐다.
“메디프가 글쎄,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과 제법 친분을 쌓은 모양이더구나. 작별 선물로 아티팩트를 하나 받았다지 뭐니.”
칼로카이리 축제 날, 황궁에선 무도회가 열린다. 찬란히 등장한 서브 남주는 사람들 앞에 아티팩트를 소개한다.
사물의 진실을 밝혀 주는 거울, ‘카트레프티스’.
클레멘츠와 춤을 추던 벨라는 비밀이 드러날까 봐 거울을 멀리한다. 그럼에도 메디프는 거울에 언뜻 비친 아름다운 흑 표범의 모습을 봐 버린다.
“거울의 형태를 띤 아티팩트라더군.”
황제 역시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아티팩트는 국보급 보물이었다.
“반사면에서 마력을 방출하기 때문에, 전용 덮개가 필요하다더구나. 듣고 나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지 뭐겠니. 정원 일 하는 틈틈이 솜씨를 부려 봤지.”
황비의 손짓에 시종 하나가 얼른 은쟁반에 놓여 있던 덮개를 펼쳐 보였다.
고르게 짜인 금빛 천에 일정한 간격으로 황실의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 당장 황궁에 걸어 두어도 손색없는 물건이었다.
누구든 이 덮개가 덮여 있는 물건을 보는 즉시 알게 될 거다. 이것이 바로, 황비가 몹시도 사랑하는 2황자가 가져온 물건이란 걸. 그 유난스러운 자랑이 바로 귀국한 아들에게 주는 황비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걸 굳이 왜 지금 보여 주는 거지? 황제는 이미 본 모양인데, 클레멘츠에게?
문득 저 반들거리는 천이, 우리를 부른 목적과 관계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마력이 방출되는 아티팩트의 전용 덮개라면, 흡수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야 합니다. 저 천은 아름답지만 아직은 평범한 직물에 불과하군요.”
“정확하구나, 황태자.”
클레멘츠는 형식적으로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고 황비를 보았다.
“페리윙클 가에 우글거리는 청마법사들이라면 비단에 마법 걸기쯤이야 간단합니다. 그러나 황비께서는 친정과 교류를 끊고 은거하고 계신 처지이니, 이런 일에 그들의 도움을 청하실 수 없었겠습니다.”
그는 이어서 아버지인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궁에도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가족’이 함께 메디프의 귀환 선물을 준비하는 게 의미 있다 여기시는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정중히 황제의 의중을 묻는 그의 태도는 제국민들이 그토록 칭찬해 온 ‘완벽한 황태자’의 모습 자체였다. 하지만 그 말투에선 왠지 차가운 분노가 느껴졌다.
“두 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마법은 쓸 줄 모릅니다만…….”
“삑?”
응? 마법을 못 쓴다고? 네가요?
그야 청마법은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손바닥 좀만 그으면 악마를 부르다 못해 악마 파티장을 차릴 수 있잖아? 걔네한테 시키면 흡수 보존 마법이 다 뭐야? 무지개 반사 마법까지 겹겹이 걸어 주겠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날 잠깐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부리 끝을 살짝 건드렸다. 꼭, 쉿-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 정성을 보이기만 한다면, 굳이 직접 걸 필요까지야 있느냐.”
황제가 대답했다. 부자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클레멘츠, 네가 책임지고 덮개를 완성해 오도록 해라. 황가를 위해. 메디프, 네 동생을 위해서.”
“황명을 받듭니다.”
클레멘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린 듯이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 * *
황태자씩이나 돼서도 부모님 심부름은 얄짤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역시 금수저도 결국은 수저일 뿐…….
로열패밀리 식사 자리래서 긴장했는데, 오히려 난 괜찮았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아버지란 사람은 입만 열면 소릴 질러 대질 않나. 새어머니란 사람은? 음흉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유모인 글로리나 부인이 훨씬 가족 같지만, 신분의 장벽이 너무도 크다.
“뺘뺙. 삐삐!(가족은 무슨! 그러는 본인은 가족을 위해 뭘 하셨대? 진짜 웃기는 아저씨야.)”
외출 준비를 마무리하는 클레멘츠 옆에서 씩씩대면서 돌아다녔다. 병아리인 게 이럴 땐 좋다. 평소 같았으면 목이 달아날 말도 시원스럽게 하고.
“뺘뺘!(황비 아주머니도 그래!) 뺙! 삑!(이게 단순한 심부름일 리 없어.)”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클라우디아는.
아무리 똑똑한 클레멘츠라도 밖에 나가서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역시 내가 같이 나가 보는 편이 좋겠지? 비록 나약한 병아리 몰골이지만, 나름 말도 통하……는 것 같고? 클라우디아의 실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말이야.
클레멘츠는 날 내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분노와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를 보고 살짝 발을 헛디딜 뻔했다.
아니 이건?
평소 제복 차림의 그는 누가 봐도 황태자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다른 귀족들 틈에 섞여 있어도 자연스러울 법한 차림이었다. 옷깃엔 황실의 문장이 없었고, 신분을 드러낼 만한 어떤 표시나 장신구도 없었다.
그저 검은색 위주의 사복이었는데, 언뜻 단순해 뵈면서도 자세히 뜯어보면 상당히 멋있었다.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마치 유행에 민감한 디자이너가 장인 정신을 다해 만든 듯했다.
한마디로, 무심한 듯 시크한……. 꾸민 듯 안 꾸민 듯…….
그 모든 것이 그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믿어지지 않게 잘 어울렸다.
“삐, 삐비익.(왜, 왜 그렇게 입었어요…….)”
본인의 잘생김을 광고하러 가는 건가? 이 이기적인 남자.
클레멘츠는 나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시종이 그의 앞머리를 세심하게 만져 무심한 듯 시크한 룩의 화룡점정을 시도 중이었다.
“폐하께선 내가 황궁 바깥으로 나갔다 오길 원하신다. 그쯤은 되어야 가족을 위해 애썼다 인정해 주실 모양이야. 사실 그 생각은……”
그가 눈짓하자, 외출 준비를 돕던 시종이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황비가 심어 두었겠지.”
그럴 거다. 원작에서는 죽은 황후의 무덤. 지금은 가족애. 그녀는 황제가 움직일 만한 상황을 만들어 두고 본인은 뒤에 숨었다. 결국 그는 황비의 뜻을 수행하러 가는 거다.
“뺙.”
“마탑에도, 페리윙클가에도 인연이 없는 내가 아는 마법사라곤 아카데미의 산드라 팔라스 총장뿐이지. 비공식 업무로 궁 밖을 나서는 건데 굳이 요란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나갈 필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잠시만?
지금 이거 꼭, 내 말에 대답한 것 같지 않나? ‘왜 이렇게 입었어요.’에 대한 대답 아녀?
이 녀석 역시 내 병아리 언어를 알아듣는 게 분명했다! 그동안 잘도 안 들리는 척 내 고통과 항의를 무시했겠다!
그간의 답답함과 몸부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클레멘츠, 드높은 신분으로 참아 주기 힘든 말을 밥 먹듯 들었을 텐데 딱히 문제 삼을 생각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눈앞의 잘생긴 모습이 나의 너그러움을 한없이 증폭시켰다.
그래, 병아리한테 막말 듣는 게 취향인 것 같으니 앞으로 더욱 성심껏 말로 까주지 뭐.
원래 화제로 돌아와 보면, 클레멘츠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전공은 언어학.
특히 고대어에 엄청난 능력을 보여서, 난해한 고문헌 몇 가지를 간단히 해석하고, 내로라하는 학자들조차 의견 일치가 안 되는 고대 문법 난제를 종결시켰다고 한다. 한마디로, 문과 천재.
한 줄 정도 언급되고 마는 설정인데, 그 아카데미에 직접 가 볼 기회가 생기다니!
오타쿠 답사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오랜만에 꽤 들떠서 클레멘츠의 책상 위를 방방 뛰었다.
“전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외출이다 외출! 합법 외출!
그러나 그는 피식 웃은 다음 날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세 다녀올 테니 잘 놀고 있거라.”
“삣?(엥?)”
야, 이게 무슨 소리야. 너 혼자 가냐?
나의 어처구니없는 기분은 말이 없어도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외투를 챙겨 들고 일어서던 클레멘츠는 내 시선에 묶여 그대로 멈췄다.
“……왜 그러지.”
“뺘?(나는?)”
“같이 가겠다는 거냐?”
“삐.(다, 당연히…….)”
너만큼이나 외출 준비가 단단히 완료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니?
클레멘츠가 궁 밖으로 외출한다는 소리에, 유렌과 카렌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새로 단장했다.
“궁 바깥사람들이 처음으로 오필리어 님을 보게 되는 날이군요!”
“후후. 누구나 한번 보고 나면 사랑에 빠지고 말도록 만들어 드릴 거예요. 아, 이미 그렇지만요!”
프릴이 들어간 앙증맞은 줄무늬 리본을 목에 달았고, 은은한 금가루가 날개 끝에 뿌려졌다.
“바깥은 칼로카이리 축제가 한창이니까, 콘셉트에 맞게 꾸며 드렸어요!”
“비익.(칼로카이리…….)”
“마지막 날 열리는 황궁 무도회도 근사하지만, 광장 쪽도 볼만하답니다. 밤까지 열리는 노점이며 행사며……. 특히 노래 대회가 압권이죠!”
“카렌의 언니는 3년 전 우승자래요.”
“삐익!(굉장해!)”
겸사겸사 오늘은 밖에서 축제가 열린다 하니, 마차 안에서라도 구경할 수 있겠지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날 떼놓고 가겠다고?
제가 먼저 맨날, 나 없으면 일이 안 된다, 한시라도 곁에 없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어쩌고저쩌고 그랬으면서! 이제 와서!
그는 배신감에 파르르 떠는 내게 눈높이를 맞췄다.
“……이번엔 안 된다. 무슨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어. 더군다나 너는 전에 납치까지 당한 전적이 있잖나.”
이보쇼. 내가 무슨 납치범 트랩도 아니고, 번번이 납치당할 리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