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게 네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카밀 드 베일리스, 그 음흉한 여자가 계속 널 만나러 기어들어 온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군.”
애써 날 외면하던 클레멘츠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공명정대한 이스밀 자작 부인은 승부를 이렇게 판가름했다. ‘오필리어 양은 황태자 전하와 지내되, 매주 한 번의 점심시간은 카밀과 함께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클레멘츠는 그조차도 터무니없이 많다고 항의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나도 가끔씩 카밀이 잘 살고 있는지 보는 편이 좋으니까.
카밀은 만족한 눈치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채로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파란만장한 수도 생활의 하루가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클라티아의 황제, 코넬리우스 3세. 반백이 된 금발과 장대한 기골, 보랏빛 눈동자는 클레멘츠와 아주 비슷했다. 미간과 눈가에 팬 주름은 위엄 있게도, 신경질적이게도 보였다.
황비 클라우디아. 황제 옆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아담해 보인다. 푸른 머리칼에 군데군데 흰머리가 섞이니 꼭 거품 낀 파도 같다. 곱게 나이든 얼굴은 우아하고 평온했다.
이 두 사람이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고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 병아리가 그 ‘오필리어’냐? 네가 그리도 총애하여, 베일리스의 딸과 다투어 되찾았다는?”
“예, 폐하.”
왜…… 내가 이 둘 앞에서 식사를 하게 된 건데?
“삐약.(황송하옵니다.)”
베일리스 후작의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일파만파 퍼진 것까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황제와 황비마저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줄이야.
심지어 나와 클레멘츠를 함께 점심식사에 초대할 줄이야. 그 클레멘츠는 또 굳이 굳이 거절 않고 나를 데려와 여기에 앉힐 줄이야!
“오필리어 님께서 드실 식사입니다.”
소스와 함께 잘게 썰어 볶은 콩 줄기가 작은 접시에 담겨 내 앞에 놓아졌다.
“삐이.(가, 감사합니다…….)”
내 앞에는 황제와 황비, 옆에는 클레멘츠가 있었다.
나는 이 황공한 점심식사가 벌어지는 식탁 위, 장난감처럼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충 높이가 맞는 받침대가 작은 접시를 받치고 있었다.
모나한 백작가의 만찬에 낀 것만 해도 충분히 흑역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황가의 가족 식사에 껴 버리다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냐?
항의하려고 째려봤지만 클레멘츠는 정면만 보고 있었다.
정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넘긴 모습은 더할 나위 없었지만, 어딘가 긴장하고 굳은 태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는 부모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일단 황비는 친엄마도 아니었고. 황제는…….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군.”
언짢은 듯 낮게 깔린 지존의 목소리에, 가족 식사 자리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이윽고-.
탕!
“한심한 놈!”
“비힉!”
내친 김에 황제는 세 사람과 한 마리가 잘만 식사하던 식탁을 냅다 후려쳤다. 깜짝이야!
“이깟 병아리 때문에 베일리스와 척을 지고 평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다니. 네가 제정신이더냐?”
드, 듣는 이깟 병아리 심정이 좀 거시기 하지만서도!
황제의 지적은 틀린 곳이 없었다. 최근 있었던 소동은 클레멘츠에게 득은 없고 실만 가득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멀쩡한 황태자가 사실 병아리 광인이라는 게 만천하에 알려진 셈인데.
너무 엉뚱한 일이다 보니 다들 어리둥절해서 별 비난 여론이 없는 게 다행이지만.
그런데 클레멘츠의 눈빛이 좀 수상했다. 꼭 ‘아버지께서 대체 뭘 아신다고 그래요!’ 같은 대사를 외치며 대들 것 같은…….
“오필리어는 ‘이깟 병아리’가…….”
맞네! 심지어 말꼬리를 잡으려고 하고 있잖아? 안 되겠다. 아무래도 날 위해 저러는 것 같은데, 고마워서라도 막아야겠다. 황제가 들으면 더 화가 날 테니까.
“삐약!!!(난 이깟 병아리 맞아!!)”
“…….”
험악하던 분위기는 내가 갑작스레 난입하자 아예 싸해져 버렸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았다. 다 같이 식사하자고 모였으면 사이좋게 밥을 먹으란 말이야!
“뺘앗- 삐이.(좀 참으세요, 폐하.) 뺙삐삣. 삐이.(당신 아들이 뒤틀린 병아리 변태가 되고 있긴 한데 곧 괜찮아질 거예요.)”
일단 1년 한정이니까요.
“……오필리어.”
나를 부르는 클레멘츠를 시크하게 돌아보았다. 마치 차갑지만 마음은 따뜻한 도시 여자처럼. 누나가 해결할 테니 넌 스테이크나 썰고 있어, 요 깜찍한 얼음 포도 젤리.
“뿁. 삐빅.(자, 이걸 받으시고 부디 아드님과 저를 봐주세요.)”
“……허.”
어느 방향이로든 불을 뿜을 기세가 만만하던 황제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그에게 가져다준 건 식탁 가운데 꽂혀 있던 보라색 수레국화였다.
수레국화는 클라티아의 국화(國花)였다. 보라색은 이 세계에서도 황제의 상징. 그러므로 보라색 수레국화가 가리킬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한 명이었다.
“우두머리를 알아보는 새인가. 과연 보통은 아니로군.”
당장 날 양계장에 넣어 버릴 기세이던 황제의 눈이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그렇겠지. 원래 어딘가의 수장이 되면 거들먹거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법. 사람도 아닌 동물이 ‘이분은 황제 폐하시다!’ 하고 알아봐 주는데, 당연히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서비스 차원에서 황제에게 눈도 한번 찡긋거려 주고 돌아서려는데, 이번엔 그 옆에서 나를 붙잡았다.
“사랑스럽고 영리하군요.”
‘서브 남주’ 메디프의 어머니. 클라우디아는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이면서도 황후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혹은, 오르지 않은 건가?
22년이 흐르자 많은 이들은 그저 분수와 겸양을 아는 황비가 제 자리에 만족하는 것뿐이라며 의문을 종결해 버렸다.
하지만 그건 다 모르는 소리! 황비는 보이는 대로 마냥 욕심 없고 순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었다.
원작에서의 일이다.
[저런.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제 편 하나 없이 얼마나 힘들었을꼬.]
황궁으로 온 벨라는 카밀의 계략에 연달아 빠지면서 금세 고립되었다. 연인인 클레멘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다가온 건 황비 클라우디아였다.
[이 클라우디아가 그대의 뒤를 봐주겠소. 어떤가?]
벨라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일단 손을 잡고 나니, 인망 높은 황비의 비호 아래 처음 몇 번은 유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카밀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사이다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부탁하네. 모나한 영애가 아니라면 나를 도울 이가 없어.]
황비는 그동안의 도움을 빌미로 한 가지 부탁을 한다. 황궁 구석의, 비석조차도 없는 초라한 납골당에 꽃을 놓아 달라고.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 여겨 찾아간 그곳은 알고 보니 황후의 무덤. 심지어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침입자가 있단 보고에 근위대를 끌고 들이닥친 황제는 미친 듯이 화를 낸다.
왜 전 황후의 무덤이 출입 금지 구역이었는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어찌 됐건 벨라는 벌을 받고, 그 여파로 클레멘츠까지 엮여 추문에 휩쓸리고……. 그러는 동안 황비 본인은 쏙 빠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자인 척한다.
[아아- 그 외로운 아이를 딸처럼 여겼는데, 독단적으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일 줄이야…….]
……에라이!
그러니 황비가 제국 사람들을 다 속인대도 날 속일 순 없었다. 사랑스럽니 어쩌니 칭찬해 줘도 그저 소름끼칠 뿐.
“이 아주머니의 정원에 놀러 오지 않으련? 넓고 흙이 풍부하니 네가 진흙 목욕을 하기도 좋을 거야.”
그러고 보니 자연 상태의 병아리들은 진흙에 몸을 굴리며 목욕을 한다던가?
하지만 당연히 나는 아니었다.
“삑빕.(필요 없는데요…….)”
혹여나 날 쓰다듬으려는 클라우디아의 손이 닿을까 슬슬 몸을 뺐다. 으으.
“어머나. 어쩐지 날 피하는 것 같아. 손에 바른 크림의 냄새를 싫어하나?”
황비가 중얼거리며 제 손의 냄새를 맡는 동안, 종종 달려 클레멘츠 옆으로 돌아갔다. 헹. 댁 손에서 뭔 냄새가 나건 내가 알게 뭐예요.
클레멘츠가 픽 웃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가립니다. 아무에게나 자신을 내맡기진 않는 법이죠, 황비 전하.”
“그렇구나, 황태자.”
클라우디아의 바닷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긴 황제 폐하도 알아보는 영민한 짐승인데. 적어도 저를 위해 온 수도를 뒤흔들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황비는 곧바로 농담이라는 듯 깔깔 웃어 댔다. 은근히 멕인 것 같은데.
“호, 호호!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도 없고. 덕분에 간만에 정말 재밌는 구경 했단다.”
맞네…….
순식간에 화제를 원점으로 되돌려 놨다. 무서운 인간!
다급히 황제 쪽을 뒤돌아보니 그는 황비의 말에 다시 클레멘츠의 잘못이 생각난 듯했다.
안 돼! 저 아저씨 또 소리 지를 거야!
내가 클레멘츠의 소맷부리에 딱 붙는 사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병아리 놀음에 빠져 정작 중요한 건 뒷전이구나. 너는 대체 가족을 위해 뭘 했느냐?”
후, 몸이 작아지고 나니 큰 소리가 유독 견디기 힘드네. 나는 클레멘츠의 소매에 처박았던 머리를 들었다.
그는 식사에 조금밖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상황에 입맛이 돌 리가 없지.
근데, 황제 폐하. 이 로열패밀리는 이미 단란한 가족 같은 것에선 진작 관심이 뜬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가족 타령을 하십니까?
아, 생각해 보니 이 자리에 없는 가족 구성원이 하나 있었다.
2황자,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
그가 원작에 등장하는 시점은 곧 있을 클라티아의 여름 축제, ‘칼로카이리’였다.
“곧 메디프가 마탑에서 돌아오잖느냐. 설마 잊진 않았겠지?”
역시나. 그럼 곧 서브 남주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건가?
2황자는 북대륙과의 경계에 있는 마탑에 유학했다가 돌아올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청마법의 선구자인 페리윙클의 핏줄다웠다.
그리고 그의 연애 플래그는 내가 다 뽑아 놨다.
당연하다. 벨라가 황궁에 없으니, 클레멘츠와는 다른 한량스러운 매력으로 접근하는 그와의 서브 로맨스도 안녕이다.
나는 이 세계를 삭막하게 만드는 사악한 병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