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 결과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글들이 수도에 범람했다.
[사실 황태자 전하와 베일리스 영애는 이미 교제 중이다. 그동안 일방적인 외사랑과 무시, 혹은 대립으로만 이루어졌던 관계가 대반전된 셈이라, 두 분도 갑자기 이를 공공연히 티 내기는 조금 겸연쩍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인이 될 후작의 생일연에 이런 일을 벌인 것으로, 우리 클랏샤 신문사에선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두 분답게도 다분히 전략적인 사랑 싸움인 셈이다.]
[그럼 왜 하필 병아리냐, 원래 전하의 연인이었던 오필리어 양은 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우리 황도일보에선 처음부터 오필리어 양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거울 기둥 속에서 나온 병아리는 얼음 같던 마음속에 싹튼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감정의 상징으로…….]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이것은 베일리스 가와 황태자 전하께서 벌인 일종의 정치적 연극이다. 아마도 귀족파와 황태자파의 화합이 내정되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여 베일리스 후작의 정확한 의중은 무엇인지 베일에 싸여 있는 가운데, 귀족파 인사들이 연이어 저택에 방문 요청을 넣었으나 후작은 와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어떤 추측은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또 어떤 신문사의 주장은 허점이 너무 많아 동의하는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사실 병아리의 정체는 그간 황태자 전하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던 오필리어 양이다. 우리 연맹일보는 전하께서 서부를 시찰하시고 귀환하셨을 때부터 갑자기 그녀가 등장했다는 데 착안했다.]
“이야, 요즘 기사는 정말…….”
식탁에 앉아 대충 사 온 신문을 읽던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서부의 사특한 마법에 걸려 병아리로 변해 버린 여인에게 전하께서도,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베일리스 영애도 모조리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덮었다.
“진짜 발로도 쓰는구나. 쯧쯧. 이런 식이면 나도 내일부터 기자 해도 되겠다.”
“거기 식탁에 뭐 좀 받쳐 줄래? 스튜가 다 끓었어.”
“아, 응.”
여자는 읽던 신문을 접어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 그 위에 아직 뭉근히 끓고 있는 토마토 스튜 냄비가 안착했다.
“아, 그 신문 나도 필요했는데. 벽난로 불이 꺼져 간단 말이다.”
벽난로 옆에서 뜨개질하던 노인이 불평했다.
“먼저 가져가는 쪽이 임자잖아요. 좀 더 민첩하게 사시는 게 어때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스튜를 맛있게 먹은 뒤, 연맹일보사에서 나온 신문은 벽난로로 직행했다.
* * *
“그러니까…….”
갈색머리를 틀어 올린 귀부인이 덤덤히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이스밀 자작 부인인데, 카밀의 친구였다. 그리고 결투의 심판을 봐 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베일리스 후작의 생일 연회가 그렇게 파투 나고, 카밀이 일방적으로 나를 납치한 정황이 명백했음에도, 클레멘츠는 굳이 모두가 잊어버렸을 결투 신청을 받아들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매달려 봤자였다. 나는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붙은 어떤…… 승부의 불길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내가 바로 그 분쟁의 씨앗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밀, 당신은 검술로 맞붙고 싶어 했어요. 맞죠?”
카밀은 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하는 승부는 뭐랄까, 정통파 귀족다웠다. 베일리스가에는 많은 가신들이 있었다. 주군의 영애를 위해 대신 결투에 응할 검사도 충분히 있었다.
그 이유가 병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카밀은 본인이 검을 드는 한이 있더라도 결판을 내야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그녀는 베이킹과 마찬가지로 몸 쓰는 일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뭐든 상관없다고 하셨고요.”
“다시는 오필리어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우기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승부야 뭐로 가리든 상관없다.”
한마디로 뭐든 일단 이길 자신이 있단 얘기였다.
하지만 결투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검이든 마법이든 카밀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니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다. 또한 심판 겸 중재자도 필요했다.
클레멘츠는 카시스나 글로리나 부인을, 카밀은 시엘로를 각각 심판이랍시고 내세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나마나 공정하지 않은 승부가 날 것이라며 열띤 비난을 했다.
실시간으로 그 꼴을 지켜보던 나도 점점 지쳐 갔다.
‘삐약(싸우지 마!)’
‘삐야악…….(좀…….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둘 다?)’
‘삐야흐흑…….(그냥 서로 화해하는 게 힘들어?) 삐흐윽…….(둘 다 성인이잖아…….)’
‘…….’
결국은 나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심판으로 정해진 이스밀 자작 부인은 카밀이 아는 귀족이었지만 그다지 친분이 깊진 않았다. 또한 구설이나 분쟁 같은 사교계의 이런저런 문제에서도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성품이 초탈하다고 할까.
“종목을 정하느라 정말 고심했어요. 두 분이 오필리어 양을 두고 다투는 것이니 오필리어 양의 의사도 조금쯤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너무나 초탈하신 나머지 병아리가 이 결투의 쟁점이라 하는데도 그런가 보다, 정도의 반응이었다. 심지어 진지하게 내 입장을 고려해 주시기까지 했다.
암만 소설 속이라지만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싶었다.
지금 내 앞에는 두 그릇의 병아리 모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릇의 모양, 색깔, 크기는 정확히 같았다.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 그릇은 이스밀 가에서 직접 제작했죠. 재료도 두 분이 요청하시는 걸 직접 준비해서 이곳에서 전달해 드렸어요. 이제 남은 건 오필리어 양의 선택뿐이에요.”
양쪽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내 마음 알지? 잘 골라.’
아, 정말 난감해 죽겠네.
누가 뭘 만들었는진 뻔했다. 클레멘츠는 내가 혼우드에서부터 잘 먹던 귀리와 산딸기를 조합해 내었다. 결투이니만큼 카시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만들었다는 것 같다.
반대편의 그릇엔 고급 중의 고급 과일인 소레즈 지방의 블루 옌이 파랗고 탐스러운 자태를 빛내며 알알이 들어가 있었다. 그 외에도 내가 카밀 앞에서 긍정적으로 반응한 재료들이 보였다.
물론 클레멘츠의 그릇을 고를 것이다. 돌아가야만 하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카밀이 너무 상처 받지 않을까? 그녀로서는 날 얻기 위해 모든 걸 걸었는데?
세 사람의 진지한 정도로 봐서는 여기서 해 넘어갈 때까지 고민하고 있어도 기다려 줄 것 같았다.
결정을 마친 나는 카밀을 보았다. 즉시 그녀가 반색했다.
“오필리어! 내가 만든 건 거기 그 오른쪽……!”
“헛수작 부리지 마라, 베일리스.”
“카밀, 결투에 정정당당하게 임해 줘요.”
“…….”
조금 시무룩해진 그녀에게 가만히 부리를 열었다.
“삐약뱌.(카밀,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 삐비뷱.(내게 잘 대해 주려 노력한 건 고마워.) 삡뱍.(납치는 좀 많이 아니었지만…….) 삐삐약.(이제부터 나 없이도 네가 잘 지내길 바라.)”
착하고 씩씩하게. 알았지?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카밀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였다.
맞은편에 앉은 클레멘츠는 벌써부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녀석…… 역시 알아듣는 거 같지? 합리적 의심은 점차 확신이 되어 간다.
어쨌든 결과는 이견 없이 클레멘츠의 압승이어야 했다. 왼쪽에 놓여 있는 클레멘츠의 모이를 남김없이 쪼아 먹었다.
“……!”
반 이상 먹었을 때부터 카밀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정말.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카밀의 그릇에 있는 블루 옌 하나를 콕 찍어 먹었다.
“……!”
눈물에 젖은 채 반색하는 얼굴이 눈부셨다. 그렇게도 좋을까? 이미 졌는데도.
“……하아, 오필리어.”
클레멘츠는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짜식아, 그렇게 꼭 무자비하게 이겨야만 하겠어? 앞에서 미인이 울고 있잖아.
“황태자 전하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밀 부인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흐음, 어렵군요. 오필리어 양은 분명 카밀이 만든 식사에도 관심을 보였어요. 심사의 초점이 오필리어 양의 의견인 만큼, 이 역시 어느 정도 결과에 반영해야 하겠죠.”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클레멘츠는 손바닥 위에 날 올려놓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인가, 이 손. 그의 몸 전체에서 올라오는 잔잔한 향기 역시 오랜만이었다. 포도나무를 닮은.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이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이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결국은 이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수도 클랏샤. 도시를 감싸는 밤. 흔들리는 마차가 지나는 길목. 이 사람이 있는 곳.
“미안하다, 오필리어.”
그 느낌에 부드럽게 녹아들듯, 클레멘츠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거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더없이 소중한 걸 대하는 듯한 말. 오롯이 나를 담으며 예쁘게 빛나는 눈을 보고 있자니 착각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 이건 착각이다. 조용한 밤 시간의 감성과 갑작스레 돌아온 환경이 빚어낸 착각.
나는 부러 이 분위기를 깨뜨리듯 부리를 좍 벌려 하품을 했다. 그리고 클레멘츠의 손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약.(알았으면 잘해라.) 뺙삐.(인기 많은 몸이니까 귀하게 모시라고. 앙?)”
“…….”
클레멘츠 쪽에서도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 그도 비슷한 착각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더 잘됐지. 어쨌든 난 1년 계약직 병아리고. 돌아갈 곳은 혼우드고. 돌아가면 벨라와 짱친 먹으며 레오라 가를 잇고. 누구와 결혼해 후사를 얻고 다 무너져 가는 남작가를 유지할 건지가 일생의 숙제가 될 텐데.
그때가 되면 클레멘츠의 눈에도 다른 게 담기게 되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