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7)화 (57/218)

57화

음.

저기, 다들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장르가 좀 바뀌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간 카밀의 행적과 최근 수도에 퍼진 소문을 참작해 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쯤 되자 갑자기 나가기도 망설여졌다.

기대하시던 청순가련 절세미인이 아닌데 어떡하죠….

망설이는 사이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열어라, 카밀 드 베일리스.”

“하하……! 열다니요? 어디에 문이라도 있나요?”

“계속 잡아떼는군. 내가 이 자리에서 검이라도 뽑아 들어야겠나?”

“검이요? 하하, 그런…….”

“아니면 실종된 나의 오필리어와 납치범이 여기에 있다고, 이 자리에서 치안대를 즉시 출동시켜 대대적인 조사라도 벌일까?”

검? 실종 사건? 치안대?

중간중간 나오는 단어들에 흥분도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어떤 이들은 가지고 다니던 종이에 뭐라고 미친 듯이 휘갈겨 쓰고 있었다. 멀찍한 데서 카밀과 클레멘츠의 모습을 마법 영상 저장기로 담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전하! 이게 대체……!”

베일리스 후작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사람들이 제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걸 드디어 알아챘다.

게다가 뭣이라? 흉악 범죄 사건이 있을 때나 출동하는 치안대를, 연회장 한복판에 불러 조사를 벌이겠다니.

그건 차라리 칼부림을 놓는 짓보다 더한 훼방이었다. 기껏 생일을 맞아 후작가의 위세를 더하려고 기자들까지 불러 모았는데, 기사가 대체 어떻게 나겠는가! 그것만은 절대 안 되었다.

“진정하시지요. 카밀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오나 이 베일리스가 용서를 빌겠습니다.”

“지금 모르겠다고 했나?”

클레멘츠는 차갑게 비웃었다. 베일리스 부녀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을 천연덕스레 시치미 떼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클레멘츠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가식을 일일이 파헤쳐 줄 열의도 없는 듯했다. 말없이 카밀을 향한 보랏빛 눈에선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는 검이 뽑아지자마자 내가 있는 기둥을 제 몸으로 가렸다. 사실상 당신이 찾는 걸 여기에 두었노라고 고백하는 꼴이었다. 카밀은 파들거리며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오필리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그렇게 난폭하게 구실 수 있죠?”

클레멘츠는 헛웃음을 흘렸다. 검을 던지듯 떨어뜨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베일리스 후작, 저 기둥을 사고 싶네만. 지금 당장.”

“그……! 지금은 연회 도중인데……! 갑자기 중앙 장식물을 가져가신다 하시면!”

“장식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취향이 고상하기로 유명한 영애가 방금 자기 입으로 확언했네. 그럴싸하지만 별로 좋은 장식은 아니라 했지. 다 같이 저 서쪽 벽에 있는 유리 모자이크나 쳐다보도록 하게.”

그가 손짓하자 근처에 있던 수행원이 후작에게 백지 수표를 건넸다. 종잇장을 들고 넋을 놓은 후작의 모습도 절찬리에 찍히고 있었다. 그도 이런 식으로 매스컴을 탈 거라곤 절대 예상 못 했겠지.

“카밀…….”

후작이 중얼거렸다. 불과 어제 봤을 때보다 10년은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이 애비와 집안을 망신시키는 짓은 그만두거라! 요즘 들어 예전보다도 더 엇나가는구나!”

조용해진 연회장 안. 그 쓸쓸한 외침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져서, 애써 딸의 편을 들어주던 것까지 다 관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카밀은 마지막 아군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

“물러나. 네 손으로 오필리어를 내놓거라.”

카밀은 고개를 저었다. 부채를 떨어뜨린 손으론 내가 들어 있는 기둥을 생명 줄이나 되는 듯 꼭 붙잡고 있었다.

“그 기둥째 통째로 들어다 옮기기 전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순식간에 일이 이 지경까지 커질 수가 있나?

지금 당장 나가기도, 안 나가기도 곤란하기만 한 상황. 게다가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이 인파는 어쩔 건데?

다들 베일리스 후작 생일 축하하러 모인 거 아니었어? 구경났어?

구경났구나…….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만천하에 내 정체가 공개될 것이다. 하지만 나가지 않는 사이 카밀은 착실히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언제나 계략을 세우고 치밀하게 성공시켜 나갔던 악녀. 그 음험한 행실이 낱낱이 까발려질 위기. 원작 소설에서도 그토록 원했지만 보지 못했던 장면이 기둥 바깥에서, 클레멘츠에 의해 펼쳐지고 있었다.

카밀이 어리석어져서가 아니었다.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시켜 나를 황태자궁에서 빼 온 그 순간부터, 그녀가 취해 온 모든 행동이 다름 아닌 무리수였다. 원래의 카밀 드 베일리스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

사실은 그 전부터였다. 황태자궁 후원까지 나를 찾아오고. 스콘을 구워 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이야. 혈관에 얼음이 흐르는 황태자가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지, 네가 알려 주었기 때문이야.”

이 모든 변화를 일으킨 게 나라고? 내가, 그날 정원에서 카밀에게 애교를 부렸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사교계의 무시무시한 백조는 지금 어쩌고 있나.

“……좋아요, 인정할게요. 제가 당신의 오필리어를 데려왔어요.”

술렁임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세상에…….”

하지만 카밀은 고개를 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정당해요. 그 아인 내 옆에서 더 행복할 거예요. 당신과 있었을 때보다 말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는군.”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투였지만, 클레멘츠의 눈은 확실히 도발당한 듯 일그러져 있었다.

“클레멘츠, 당신을 좋아했어요.”

카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초연한 목소리로 뱉어진 고백에 여러 사람이 숨을 삼켰다. ‘그런데 왜 과거형이지?’라는 의문이 웅성웅성 퍼졌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당신 같은 냉혈한이 오필리어를 진심으로 아껴 줄 거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

좌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뭐!”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건가? 꼭, 베일리스 영애가 오필리어 양을 좋아한다는 것 같은…….”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팔자 좋게 놀라고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하얀 손에 끼워져 있던 레이스 장갑 한 짝이 벗겨졌다. 다른 쪽 손이 그것을 기세 좋게 던졌다. 그 동작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에게?

황태자에게?

모든 상황을 안에서 지켜본 나는 부리를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황은 눈덩이 구르듯이 점점 커져만 갔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나의 오필리어를 지키기 위해 당신에게 결투를…….”

안 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모두가 내 정체를 두고 뭐라고 하든. 카밀이 클레멘츠에게 결투 신청을 하는 막장 상황을 막아야 했다.

훌쩍 몸을 띄워 위쪽에 붙은 마석을 건드리는 건 간단했다.

터엉-.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갑자기 뒤에서 열리는 문에 떠밀린 카밀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클레멘츠의 보라색 눈 한 쌍이 보였다. 다행히도 그는 확실히 날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감정이 용광로 속의 쇳물처럼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베일리스 후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경악. 경악. 경악. 모두 다르게 생긴 좌중의 얼굴 가운데서도 경악에 둥그렇게 뜨인 눈만큼은 다들 비슷비슷해 보였다. 침묵이 길기도 했다.

“삑.(다들…….)”

나는 포롱포롱 날아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삐야아아악!!!(나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 * *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그 있잖은가. 베일리스 후작의 연회에서.”

“아아…….”

그날의 일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황태자와 베일리스 영애가 어떻게 대치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가 긴장해서 쳐다보던 거울 장식 속에서 병아리가 튀어나온 순간, 객들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 버린 상황에 머리가 해석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방금 전 베일리스 영애가 황태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파격적인 진실마저도 한순간에 잊혔다.

좀 전까지도 흥미진진한 사건 같던 것이 한순간 무슨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특별히 보송보송하고 튼튼해 보이는 병아리가, 베일리스 영애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면서 ‘삐약!!!’ 그리고 ‘삐야악!!’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전면전이라도 불사할 듯 마주 보고 있던 남녀는 그 병아리를 보자 갑자기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누그러진 기세로 볼을 붉히고 허둥대면서, 갑자기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더니 유치한 인신공격을 던져 댔다.

그 모습이 꼭, 그 작은 병아리에게 저마다의 행동을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후작이 부른 기자들 중, 마법 영상 저장기를 지참한 이들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냅다 그 모습만 저장해 댔다.

그 꼴을 지켜보던 베일리스 후작은 의자 위에 처량하게 엎드러져 혼절했다. 그러나 누구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 자. 연회 끝났습니다. 다들 나가세요.”

어딘지 버릇없는 시종이 나타나 모두를 내보냈다. 참가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떠밀려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귀족파 대표의 딸과 황태자가 병아리를 두고 싸우는 진풍경은 즉시 각종 신문에 인쇄되어 호외로 뿌려졌다.

[속보 : 베일리스 후작 생일연에서 황태자 전하와 베일리스 영애가 병아리를 두고 싸워…….]

제목을 읽고 이미지를 보아도, 거꾸로 이미지를 보고 제목을 읽어도. 아무도 그것이 무슨 상황인지 해석해 낼 수 없었다.

“이게 뭔데……?”

어떻게든 이 난장판에 대한 설명을 내놓아야 했던 신문사들은, 당시 확보한 메모와 기억을 조합해 나름의 이야기들을 부연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