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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6)화 (56/218)

56화

‘조금만 기다려라.’

쉽사리 찾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그는 모든 방법을 준비했다.

연회란 본디 경계가 허술해지는 자리. 예기치 못한 사람이 흘러들기도 쉬웠다. 이미 초대받은 이들 사이에 제 사람들을 다수 끼워 넣어 두었다.

그들은 화장실을 찾는단 핑계로, 더러는 길을 잃었단 핑계로, 혹은 짝지어 밀회하는 체하며 저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의 병아리를 발견했단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는 성급하지만 멍청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는 자리에서 귀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구석진 곳에 꽁꽁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눈 닿고 손 닿는 곳에 교묘하게 숨길 것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악한 카밀 드 베일리스가 일부러 오래 눈길 두지 않으려 애쓰는 곳.

문득, 클레멘츠의 눈에 홀 중앙의 커다란 장식이 들어왔다.

육각형은 시미크 교의 상징. 육각기둥은 땅에서 뻗어 오르는 신앙과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

즉, 천지간의 소통을 상징하여 교세 내에서 자주 사용하는 장식물이었다.

가장 위에는 카밀의 상징인 백조. 그리고 중간 부분에는 베일리스가의 문장인 곡식의 이삭.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크리스탈과 거울이었다.

투명하고 찬란한 느낌이 홀의 분위기를 확실히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미크의 순결함을 의미하는 얼음을 연상시키는 소재라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그 기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

연회가 열리기 전, 카밀은 모든 게 준비되었다며 나를 연회장으로 데리고 갔다.

홀 중앙에는 아주 커다란 육각기둥 장식이 놓여 있었다.

맨 위에는 카밀의 별명이기도 한 백조가 수정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기둥 아랫부분은 베일리스가의 밀알 이삭 문양이 두르고 있었다. 가문에서 맞춤 제작한 모양이었다.

거울로 된 기둥 표면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아름답게 반사되었다. 나는 잠시 처지도 잊고 그 우아한 모습을 감상했다.

그때 카밀이 육각기둥의 한쪽 면을 열었다.

“삑삐규?(열리는 거였어?)”

병아리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열리고 나니 안쪽에 빈 공간이 있었다. 기둥 안에 공간 있어요.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렴. 여기 있으면 안전해.”

“삐이익.”

대비해 뒀다는 게 이거였나?

안쪽 공간엔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내가 좋아하는 온갖 음식들과 장난감들이 늘어져 있었다. 향기로운 꽃으로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또한 안쪽 천장엔 온습도 조절 마석이 붙어 있었다. 언제나 쾌적한 공간을 유지해 주는, 에어컨을 능가하는 사기 템이었다. 나도 실물은 처음 본다.

한시라도 내가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불편하지 않을까 온갖 배려를 한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혹시 나와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이 돌을 건드리렴. 오필리어는 영특한 병아리니까…… 아마도 알아듣겠지?”

반쯤 혼잣말을 하며 카밀은 위쪽에 붙은 마석을 톡 건드려 보였다. 그러자 키잉- 하는 소리가 나며 이미 열려 있는 문이 더 젖혀졌다. 오오…….

온습도 조절에다가 자동문 기능까지? 이것이 대귀족의 자본력인가?

“삐육.(알았어.)”

안쪽에서 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다니! 아마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배려한 모양인데, 덕분에 나는 탈출의 기회를 얻었다.

아무도 이쪽을 안 보는 사이 나가야 하나? 연회엔 사람이 많이 올 테니 거의 불가능하겠지. 어떻게든 인파에 섞여 카밀의 눈을 피하는 건 가능할까?

“나는 계속 근처에 있을 거란다. 잠시라도 널 가둬 놓아야 해서 마음이 찢어지지만…….”

“삐익꾸우.(그동안 이미 절 가둬 두셨는데요.)”

“나는 이렇게라도 너를 지켜야만 한단다.”

이 병아리가 호시탐탐 탈출을 노리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결연히 말을 맺은 카밀은 문을 닫았다.

기둥은 바깥에서 볼 때만 거울이었을 뿐, 안에선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카밀은 잠시 뒤돌아서서 눈가를 훔쳤다. 시종 한 명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아가씨,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바깥의 소리는 약간 먹먹하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곧 초대객들이 입장하고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연회의 시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이 모이는 이런 화려한 연회를 직접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한참 혼우드에 살 때는 언제쯤 벨라를 데리고 이런 곳에 올 수 있을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는데.

이젠 딱히 연회를 기대할 이유가 없어졌다.

카밀이 준비해 준 산딸기 하나를 콕 쪼아서 대충 주저앉았다. 여긴 구경의 명당이었다. 중앙에 위치해서 연회장 구석구석이 잘 보였고, 반면 아무도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후작 아저씨는 굉장히 과시욕이 심해 보였다. 자리에 초대된 이들이 전부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 중 일부는 생일을 맞은 주인인 후작에게 굽실대는 대신 어딘가 다른 곳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꼭, 누가 오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처럼.

설마 다들 클레멘츠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카밀처럼?

물론 나도 그가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하지만 만약 오지 않는다면…… 탈출 성공 가능성은 한없이 떨어진다. 일단은 이 집 병아리로 계속 살아야 하는 건가? 어떻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내가 인간인 걸 밝힐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심코 그쪽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삑! 삐!(클레멘츠!!)”

클레멘츠가 정말 왔다.

안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앞으로 어째야 하나 하는 걱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짜식, 잘생겼네! 뉘 집 자식이냐!

연회장은 넓고 넓었다. 내가 있는 기둥 장식으로부터 그에게 닿기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떨어져 있었던 후작 저택과 황궁의 거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삡삐!(기다려! 내가 갈게!)”

저 수많은 사람들의 발쯤은 가공할 순발력으로 다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천장의 마석을 건드릴 타이밍을 재고 있자니 그가 분주히 어딘가로 걸어갔다.

카밀이 있는 곳이었다. 마주친 둘은 뭔가 기 싸움 같은 걸 벌이기 시작했다.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이 팝콘이 간절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구경했다.

설마, 지금…….

물론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아 하니 저들은 나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람.

한 병아리를 사이에 둔 살벌한 기 싸움 뒤, 남자와 여자는 각기 추종자들을 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클레멘츠가 조금만 더 이쪽으로 가까이 와 주면 좋을 텐데.

“삐악삐.(조금만…….)”

그는 얼마간 주변을 살펴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이쪽을, 기둥 장식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수정 백조가 달려 있을 위쪽에서 시작해서, 그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왠지, 그가 정확히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 저쪽은 거울인데 눈이 마주쳤을 리가.

작아진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 아닌가? 클레멘츠는 워낙에 베일에 싸인 설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악마도 소환할 수 있고, 신비로운 문신도 있다.

본인은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능력도 막 쓸 수 있다. 거기다 갑자기 투시가 가능하다고 해도 지금은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다. 황태자님은 어쩌면 축지법도 쓰실지 몰라.

“뺙! 뺙!(그래! 여기야!)”

나는 열심히 파닥거렸다.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드디어 클레멘츠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고대해 오던 구출이 코앞이었다.

“전하!”

웅성대는 소음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초대객들을 안내하고 있던 카밀이 잽싸게 튀어왔다. 그들은 바로 내 코앞에서 대치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드높으신 분께서 자리를 빛내 주신 건 감사합니다. 제 아버지의 생일연에 오신 만큼 다른 이들과 대화도 하고, 여흥을 즐기시는 편이 더 즐거우시지 않을까요?”

카밀은 불안해했다.

태연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같이 지내 본 결과 그녀의 감정을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말하는 템포가 조금 빨라졌고, 부채를 쥔 손을 자꾸만 바꾸었다. 식은땀이 나는 모양이었다.

클레멘츠는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는 이미 말했을 텐데. 빼앗긴 오필리어를 되찾으러 왔지, 여흥 따위를 즐기러 온 게 아니다.”

“오필리어를 찾으시는데 왜 이쪽으로 오시는 겁니까? 보시다시피 여긴 장식용 기둥뿐입니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보잘것없는 물건이죠. 차라리 서쪽 벽의 유리 모자이크를 보시지 않겠어요?”

“아니, 필요 없다. 그대, 방금 전만 해도 날 슬슬 피하더니 내가 이 기둥 근처로 오자 부랴부랴 떼어 놓으려 하는군. 수상하기 짝이 없어.”

사람들의 무리는 이번엔 이쪽을 반원형으로 둘러싸며 커졌다. 그들이 중얼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캐치되었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저 육각기둥 장식을 눈여겨보고 계시는군. 베일리스 영애는 그분의 주의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소용없군. 소용없어.”

“저 거대한 기둥 안에 오필리어 양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허어…….”

좌중이 경악에 빠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였다. 아니, 님들…… 뭔데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막 부르시죠?

나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에 퍼졌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저 표정들만 봐도 알 만했다.

질투심으로 악명 높은 후작 영애. 연적을 납치 감행.

얼마 뒤 저택 연회에 전시된, 베일리스의 상징으로 장식된 크고 아름다운 거울 장식.

하지만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 빛나는 모습 저편에, 황태자의 실종된 연인이 끔찍한 꼴로 감금되어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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