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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5)화 (55/218)

55화

“지시한 물건은?”

“준비되었습죠. 누구 명령인데.”

어둠 속에서 여자의 백금발만 희미하게 빛났다. 투박한 모자를 눌러쓴 키 큰 남자는 거대한 물체를 가리고 있던 천을 벗겼다. 여자의 눈이 그 형태를 만족스레 응시했다.

“좋아. 나머지 준비도 차질 없이 부탁해.”

“당연합죠. 제가 누군데.”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여자는 도도하게 돌아서려 했다.

“저기 근데요, 아가씨.”

“왜?”

“그,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일’은 언제 합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시킨 건 제대로 된 일이 아니란 건가?”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모자를 벗어 만지작대다 다시 썼다. 그녀의 본질은 귀족이었다. 그와는 달랐고, 까마득히 높았고, 아랫것의 의문 따윈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걸 입으로 뱉고 마는 것도 그의 본질이었다. 이런 성질을 감수하고 오로지 실력을 보아 그를 받아들여 준 주인이었다.

“병아리 납치하는 일 말예요?”

“…….”

“전처럼 뭐…… 편지 바꿔치는 일이나 살인 미수 덮어씌우기 같은 일은 안 합니까?”

“황태자궁에 잠입해 봤잖아. 충분히 긴장감 넘치지 않았어?”

“글쎄. 말 나왔으니 한 가지 물읍시다. 저번 독살 건은 왜 직접 하셨소? 평소처럼 제 손을 빌리셨다면 황태자가 아가씨를 탓하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

왠지 모르게 그의 주인은 병아리 한 마리에 집착하고 있었다. 남자는 주인이 그 병아리를 붙잡아 둔 이유가 순전히 황태자가 애지중지하던 병아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문 속 황태자의 연인은 따로 있고, 그녀를 해하려다가 실패하자 애완동물이라도 손에 쥐고 황태자를 흔들려는 거라고.

어째 그 연인이나 병아리나 이름이 ‘오필리어’로 똑같긴 하지만, 그야 연인을 보호하려는 황태자의 연막작전 같은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쩐지, 그와 한마디 의논도 없이 진행돼 버린 독살 사건 이후로 뭐랄까, 주인의 독기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남자는 주인이 승리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웬만하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바라던 대로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르신 뒤에도 갖은 획책과 협잡이 그녀의 인생길에 가득하길 바랐다.

주인이 내놓는 계략은 하나같이 아주 교묘하면서도 악질적이었다. 그의 취향에 딱 맞았다. 그 추악하고 은밀한 일들을 뒤에서 척척 이뤄 내는 과정에서 남자는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그런 일들…… 아마 한동안은 시킬 일 없을 듯하구나.”

“…….”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 같았다.

“전에는 재밌었는데. 이제는 흥미가 확 사라졌어.”

주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그대로 어두운 방을 나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직한 건가……?

* * *

오후가 되자 베일리스 후작 저택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한 대귀족들, 어딘지 의기소침한 약소 귀족들. 신분은 낮지만 이런저런 일로 돈 좀 만진 신흥 부자들. 악사, 시인, 자선 사업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후작이 초대한 한 무리의 기자들이었다. 제법 이름난 신문사에서 온 이들은 값비싼 마법 영상 저장기로 연회장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생일 연회의 규모와 구성. 초대된 명사들의 목록. 그 위세 당당한 풍경을 낱낱이 써다가 퍼뜨리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기자들로선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화려한 연회 소식. 얼마나 돈을 썼고 어떤 메뉴가 올라왔는지. 누가 어느 자리에 앉았으며 어떤 음악이 연주되었는지.

사소해 뵈는 하나하나가 모두 기삿거리였다. 상류 문화를 동경하는 수도민들은 뭐 이따위 이야기가 궁금하댔느냐 불평하면서도 잘만 사다 읽으며 소일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그런 소소한 일거리를 바라고 모여든 게 아니었다. 그들이 바란 건 더 큰 뉴스였다.

황태자의 숨겨진 연인과 그를 질투하는 베일리스 후작 영애에 대한 소식은 최근 수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독살 미수 사건 이후로는 한동안 조용했다. 베일리스 영애는 뭔가를 피하려는 듯 집에서 칩거했다. 황태자의 연인으로 알려진 오필리어 양도 아직까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전부 폭풍 직전의 고요라는 게 실력 있는 사교부 기자들의 중론이었다. 오랜 시간 수도 사교계를 들개처럼 떠돌면서 이야깃거리를 주워 온 그들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바로 오늘. 바로 이곳. 베일리스 후작의 생일연에서 화제의 세 사람을 관통하는 대 사건이 터질 거라고.

“……그래서 저 서쪽 벽을 메우고 있는 유리 모자이크의 의미는……. 이봐, 듣고 있는 건가? 자네는 중요한 기사를 써야만 하지 않나!”

“예, 예. 물론이옵죠.”

“대답이 순 건성이로군! 나 같은 대귀족이 직접 인터뷰에 응해 주는 흔치 않은 기회건만!”

후작에게 잡힌 기자는 물론 홀 인테리어에 대한 장광설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 특종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지 모르는데. 에휴. 말 많은 아저씨 같으니.’

그는 여전히 집중하지 않고 이곳저곳 힐끔거렸다.

“오, 나타났다.”

기자는 흐리멍덩하던 눈을 반짝 빛내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이보게! 자네 지금 뭐 하자는…….”

후작의 노성은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과연…… 저분이 오시는군!”

“오오……!”

“예상대로야!”

홀의 입구에 황태자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를 빗어 넘기고 연회복을 입은 모습이 근사했다.

물론 후작은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목받을 목적으로 연 파티에 무려 황족이 참석해 주었으니 환영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자리를 빛내 주시어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후작, 만나서 반갑군. 생일 축하하네.”

이보다 성의 없을 수 없는 인사가 오갔다. 클레멘츠는 즉시 떨어져 나가 누군가를 찾는 듯 연회장을 배회했다.

‘베일리스 후작, 생일연에서 황태자 전하 접견……. 정견 차이에서 비롯된 냉전 계속되는 듯.’ 같은 소소한 헤드라인을 적어 나가는 기자도 있었다.

나머지는 약속이나 한 듯 카밀 드 베일리스 쪽을 주시했다.

그녀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흠칫했다. 그리고 넓은 연회장 안에서 그를 슬슬 피해 다녔다.

평소였다면 그가 문간에 나타나자마자 아비보다도 먼저 달려가 인사했을 카밀이었다. 그리고 자리에 참석한 모든 여성을 그의 곁에서 차단하려 안간힘을 썼을 터.

“하지만…… 평소와 다르군.”

“역시……!”

“예상대로야!”

이대로 넘어갈 리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날 것이다. 기자들의 눈은 이미 특종에 대한 꿈에 젖어 번들거렸다.

기다릴 틈도 없이 그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

“……!”

“……!”

황태자가 베일리스 영애에게 먼저 다가갔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에 있는 일인가?

그것도, 애써 외면하며 뒷모습을 보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역시나 연인을 독살하려 한 베일리스 영애의 악독함을 질책하려는 거겠지! 베일리스 영애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기껏 먼저 이름을 불러 준 이유가 다른 여성 때문임에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에 눈이 먼 그녀답게 그저 자신을 보아 줌에 기뻐할 것인가?

수십 쌍의 눈이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왜, 왜 그러시죠? 전하.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

“……!”

상상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다는 듯 눈을 피한다. 늘 당당하던 그녀가 말을 더듬기까지. 그사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시치미 뗄 생각은 않는 게 좋다.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그대도 알고 후작도 알고 있을 터.”

어느덧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납치된 나의 오필리어를 되찾으러 왔다.”

뭐라고! 납치?

기자들뿐 아니라 자리에 모여든 모두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후작 영애가 수도에서 납치를 자행하다니?

짝사랑 상대의 귀애 받는 연인을 확보했는데 영애의 잔혹한 성격에 고이 모셔 놓진 않았을 터. 모진 고문이라도 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근래 공식 석상에 나타날 때마다 수심 가득했던 황태자의 얼굴도 다 설명이 된다. 끼니까지 거른다는 증언도!

“납치요? 후후……. 무슨 말씀이신지. 이 카밀 드 베일리스, 전하의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카밀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떤 혐의라도 즉시 미끄러져 버릴 법한 뻔뻔한 얼굴이었다.

과거, 감히 황태자와 저보다 먼저 춤을 췄다는 이유로 어느 귀족 영애의 발톱을 뽑아 놓았을 때, 그 가족 앞에서 지었던 표정과 정확히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후작 영애는 그 자리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어느 기자가 녹음 마법이 걸린 마법구에 속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카밀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 놀라 마법구를 떨어뜨렸다.

“아, 안 돼……. 내 두 달치 월급…….”

가엾은 중얼거림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거대한 호기심 속에 묻혀 버렸다.

“부정할 생각이로군. 그대라면 그럴 테지. 난 오늘 오필리어를 되찾기 전까진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다.”

“어머나. 황태자궁에 있어야 할 오필리어를 왜 여기서 찾으시는지. 저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답니다……. 뭐, 꼭 찾으셨으면 좋겠군요. 후후.”

카밀 자신마저도 스스로의 가증스러운 연기에 치를 떨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내가 그동안 이렇게 살아 왔구나…….’

과거는 부끄러웠지만 지금의 행동은 부끄럽지 않았다. 오필리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거짓말쯤이야.

아직 그가 앞에 있었다. 카밀은 오필리어를 숨겨 둔 곳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만만하군. 하지만 내가 그 아일 찾아낸 뒤엔 뭐라고 변명할지, 미리 생각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클레멘츠는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돌아섰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그 주변에 모여들었던 인파가 길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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