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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4)화 (54/218)

54화

지금 아주 작은 삐약 소리라도 낸다면, 클레멘츠는 반드시 날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상하군요. 분명 카밀은 여기 있었을 터인데……. 아니, 전하! 지금 어딜 보시는 겁니까!”

“……없군.”

듣자 하니 저쪽도 문제가 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레이디의 침실을, 거기다 드레스 룸이나 욕실을 허락 없이 침입하는 건 무도한 짓이다. 클레멘츠는 이미 어디 한 군데 마구 열어젖힌 것 같았다. 나를 찾든, 찾지 못하든 그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협조적이던 후작도 슬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제가 뭔가 오해한 모양입니다, 전하. 딸아이가 전하를 만나길 원치 않는 줄 알았다면……! 아무리 아비라 해도 딸의 방에 불청객을 끌어들일 순 없는 법. 어서 나가시지요.”

“……실례했군, 베일리스 후작.”

돌아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안 돼!

이대로 클레멘츠가 나가면 다음에도 찾으러 온단 보장이 없었다. 베일리스 후작은 황태자를 싫어하는 편이었으니 두 번은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으나 이미 카밀은 나를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꼭 끌어안은 채였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절망에 빠졌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 * *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황태자 전하.”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클레멘츠는 후작 저택을 다시 뒤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도 저 안 어딘가에서 작고 연약한 아기 새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제기랄.’

이렇게나 자신이 한심하고 무능하게 여겨진 적이 있었던가.

그날 이후, 카시스 듀프레를 후작저로 보내 다시 수색하게 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허탕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전하. 후작이 어찌나 완강하게 나오는지…….”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다시 오신다 해도 정당한 이유 없이 저택을 보여 드릴 순 없다.”

영악한 베일리스 후작은 그 말을 반복하며 동부 귀족의 대표자를 쫓아냈다.

자칫 소란을 피웠다간 황족이 연루된 귀족 파벌 간의 분쟁으로 비칠 수 있는 상황. 어쩔 수 없이 돌아온 듀프레 후작 역시 난생처음 연이어 겪는 임무 실패에 충격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든 전하께 도움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아니다.”

땅을 파고 들어가려던 카시스는 정신을 차렸다. 오필리어 님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지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하신 모습이었다.

‘과연 나의 주군이시다. 저분 옆에서 내가 풀 죽어 있을 수는 없지.’

“군을 이끌고 저택 앞까지 들이닥치면 아무리 그 늙은이라도 문을 여는 수밖엔 별수 없겠지.”

“저, 전하. 아무리 그래도 수도에서 무력을 동원하는 것까진 피하셔야 합니다.”

역시나. 겉보기엔 차분해 뵈셔도 속으론 지금 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찢어지실 것이다.

‘그런 주군 옆에서 내가 풀 죽어 있을 순 없지.’

실제로 클레멘츠는 전혀 침착해질 수 없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가 어떤 사람이던가. 황제를 상대로도 따박따박 맞서는 베일리스 후작은 또 어떻고?

그의 머릿속에선 뱀의 소굴에서 고통 받는 오필리어의 비명이 시시각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반드시 구해 내야만 한다.

이성을 잃기 직전인 이 상황에 카시스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나니 단 하나, 오필리어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떠올랐다.

얼마 후에 있을 베일리스 후작의 생일 연회였다.

베일리스 후작은 지극히 중부 귀족답게도 귀족으로서의 위신에 목숨을 걸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 연회만큼 재력과 인맥을 뽐내기 좋은 때는 없었다.

그간 후작은 매년 떠들썩한 판을 벌였다. 같은 파벌인 귀족파는 물론이고 상관없는 귀족들, 심지어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평민들까지 초대했으니. 황위 승계자인 클레멘츠의 방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뭘 준비하고 있건 상관없다, 베일리스.’

그날,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오필리어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 * *

시간이 빠르게도 흐르는구나.

그날 결국 클레멘츠는 날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카시스라거나, 황태자궁에서 사람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누구도 후작 저택의 정문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갇힌 것이다. 납치범의 스펙이 하필 귀족파 최고 권력자의 딸일 건 뭐람!

그녀는 나를 호의호식하게 해 주고 첫날처럼 온갖 선물과 놀 거리를 갖다 바쳤다. 하지만 나는 재벌 2세 악역 서브에게 납치 감금된 히로인처럼 하루하루 말라 가며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삐육힉.(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어머, 또 그 소릴 내면서 우네. 정말 귀엽구나. 무슨 뜻이니?”

카밀이 해맑게 웃으며 날 쓰다듬었다. 악의란 악의는 전부 지구 바깥으로 던져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나를 정말 아꼈다.

하지만 내 인간의 존엄성은? 저주는? 여기선 내가 인간이란 걸 나밖에 모른다고.

“삐힉…… 삐흐흑…… 삐흑!”

“착하지, 오필리어. 그런 재수 없는 남자는 잊어버리렴. 이제 내 집이 곧 너의 집이란다.”

“삐윽…….”

평소였다면 ‘재수 없는 건 동의.’라고 지껄였겠지만 이젠 그런 것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카밀은 틈만 나면 클레멘츠를 언급하며 이를 갈았다.

‘그 자식보다는 내가 잘해 준다.’, ‘그 남자보다는 내가 더 너와 어울린다.’ 같은 느낌의 대사들.

정말…… 끝없이 남주를 의식한 결과 하는 거라곤 자리에 없는 그를 끝없이 상기시킬 뿐이니 악역 서브 느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밀이 원래 악역 서브이긴 했지만. 남주에게 집착하는 쪽이었는데. 개과천선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어떻게 이렇게 급선회한 거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

그녀의 집착 감금 서브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서 널 빼앗을 계략을 세우고 있을 거라느니, 하며 불안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내일이면 그 악독한 황태자가 기어이 널 찾으러 오겠구나. 하아, 저택 문만 걸어 잠글 수 있다면 아무 걱정도 없을 텐데.”

왠지 모를 소름에 날갯죽지가 떨렸다.

내일이면 이 저택에서 후작의 생일연이 열린다. 카밀은 그 자리에 클레멘츠가 반드시 나타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자가 너처럼 귀엽고 과분한 아이를 쉽사리 포기할 리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괜찮단다. 이미 모든 조치를 끝내 놓았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조치까지 취해 두었단다.

카밀은 수도에서 취향이 고상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후작 부인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번 아버지의 생신 잔치도 직접 맡아 준비하느라 한참 바빴다. 그때 뭔지 모를 대비를 같이 해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난 클레멘츠가 반드시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에게 내가 중요한 병아리란 건 알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를수록 의혹은 더 커졌다.

그는 이미 후작저에서 날 데려가려다가 한차례 모욕을 당했다. 황급히 클레멘츠를 쫓아내던 후작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황태자가 드높은 자존심을 상하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다시 이곳에 들어올까?

또한 그는 날 데려온 이유가 ‘귀여워서’라고 말했다. 병아리 상태인 나에게 말하고 싶어서 밤중에 몰래 들어와 귀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널 어디에 이용하겠나. 그런 거 없다. 그저…… 귀여우니까…….”

단지 귀여워서 데려와 아끼던 나였는데, 모욕과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구하러 올 가치까지 있을까? 나에게?

믿을 거라곤 혼우드를 떠나면서 맺은 계약뿐. 하지만 계약을 강제할 힘도 없는 내게 클레멘츠가 알아서 의리를 지켜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소설 원작과 현재를 모두 고려해 봤을 때 클레멘츠가 그렇게 의리 있고 올곧던가? 음…….

미안하지만 아닌 것 같다.

“비이잇…….”

“귀여운 오필리어, 뭐가 맘에 안 드니? 따뜻한 우유죽을 가져다줄까? 아니면 폭신하게 짠 양털 방석을?”

“비익.(혼자 있고 싶어요…….)”

카밀은 클레멘츠를 생각하면 치를 떨다가도 날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난 그녀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아아, 이런. 내가 너무 피곤하게 했나 보구나. 병아리는 약한데! 미안해, 오필리어. 쉬도록 하렴.”

카밀은 이내 내 몸을 얇은 이불로 덮어 주곤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그 상태로 뜬눈으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충분히 어두워지자 방문 앞으로 가서 동태를 살폈다.

문 앞에서 날 지키도록 되어 있던 시녀들은 조용했다. 졸고 있거나 다른 일을 하러 간 모양이었다.

좋았어.

난 생각해 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심을 다해 강렬히 염원해. 흠집이 깨어지도록.”

꿈속에 나타난 합체 마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병아리 저주가 날 온전히 옭아매지 않도록 흠집을 내어 뒀다고.

내가 강렬히 염원한다면 그 흠집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문을 등지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잠시라도 인간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세요. 저 나름 착하게 살았잖아요. 제발요.

잠시라도 모습을 되돌릴 수 있으면 어떻게든 저택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다른 가문이나 상단에서 온 심부름꾼이라고 둘러대야지.

정말로 내일 클레멘츠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가 정말 버려졌다는 사실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그 전에 뭐라도 하자. 뭐라도.

…….

…….

하지만 아무리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일 때까지 빌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합체 마녀, 이 겉만 번드르르한 사기꾼 같으니라고! 다시 만나면 머리카락 색깔 방향을 바꿔 버릴 거야!

당신들을 믿다니 내가 바보였지. 날 이 꼴로 만든 게 댁들인데!

“삐야아아아악!”

분노에 찬 내 절규는 저택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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