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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3)화 (53/218)

53화

“그래서.”

황태자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필리어는 어디 있지? 후작.”

“글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체 그 ‘오필리어’라는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전하.”

베일리스 후작은 가까스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문제의 ‘오필리어’가 바로 카밀이 주워 온 위층 병아리란 건 기정사실인 듯했다.

딸자식이나 황태자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동물을 길러도 말이라거나 사냥견이었다면 평범했을 텐데. 병아리라니. 황태자가 그런 귀여운 걸 좋아할 줄 누가 알았을까?

“오필리어는 병아리라네.”

“…….”

후작은 괴리감에 몸서리쳤다. 병아리를 찾아왔다고 말하는 황태자의 얼굴은 여전히 북국의 얼음 한 덩이를 떼다 놓은 듯 차가웠다. 자세히 보니 그린 듯이 완벽하던 눈가에 웬일인지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그것이 차가운 분위기를 섬뜩하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베일리스 후작은 눈을 의심했다. 차갑던 분위기가 눈 녹은 물처럼 조금 풀어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황태자를 지켜봐 왔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자그마하고 노랗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지.”

제법 아낀다는 이야긴 얼추 사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작은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당신의 병아리가 있노라고 말하면 애완동물을 훔쳐 온 여식의 죄를 시인하는 꼴이다.

‘네 이놈 카밀!’

그는 속 썩이는 딸을 떠올리며 내심 뒷목을 잡았다.

물론 잘못은 딸이 먼저 했다. 하지만 이미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훔쳐간 걸 돌려받기 위해 황태자가 직접 왔다는 것. 그리고 직계인 카밀과 가주인 후작이 직접 사죄를 올려야 한다는 것.

넓은 대지의 풍부한 소산을 가지고 수준 높은 귀족 문화를 발전시켜 온 중부 귀족들에게는 체면이 목숨처럼 중요했다. 고작 병아리 하나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구설수에 오른다는 게 치욕스러웠다.

더군다나 베일리스 가문과 황가의 관계를 고려하면 더더욱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이미 정치적인 사안으로 번져 있었다.

어지간하면 넌지시 서신을 보내 보상을 받은 다음 적절히 묻는 것이 관례이지. 베일리스 가에서 태자비를 납치한 것도 아닌데. 고작 병아리 한 마리를 돌려받겠다고 이렇게 직접 쳐들어오다니.

황태자가 미친 걸까?

“도시에 병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시치미를 떼겠다는 건가?”

“전하께서야말로 한사코 없다는데도 어찌 이리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까? 고작 병아리 한 마리로 저의 권위를 짓밟으시다니요.”

“고작 병아리 한 마리라?”

더없이 냉혹해진 시선들이 맞붙었다.

“영애가 오필리어를 데리고 있다는 건 내 추측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그녀가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을 황태자궁에 침투시켰다는 내용도 있어.”

오필리어가 사라지자마자 클레멘츠는 전후 사정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 영악한 영애는 황태자궁으로 물품을 들여오는 상단에 제 사람을 끼워 넣었다. 황궁 바깥의 상단을 조사하느라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애당초 황궁 사람이 아닌 납치범은 진작 유유히 빠져나갔다.

“무, 무슨…….”

“내가 그것을 철저히 파헤치길 원하는가?”

황태자궁에 출신 모를 사람을 침투시킨 정황.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제대로 문제 삼으면 일이 커지고도 남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후작은 내심 절망적으로 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 아이라면 그럴 만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배운 대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테니.

사실 딸아이가 그간 황태자궁에서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상단 매수 정도는 사소했다. 그런데 굳이 이번 사건만 거론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더 이상 눈감아 줄 생각이 없다는 것. 후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카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무슨 짓을 했느냐!’

더 뻗대고 들면 일이 얼마나 커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중부 귀족 특유의 우아함과 간교함을 무기처럼 갈고닦아 왔다. 그것을 아무리 잘 휘둘러도, 번번이 이 젊디젊은 황태자에게 밀리곤 했다. 허를 찔리거나, 섬찟한 기분에 물러서다 보니 막다른 국면에 몰리거나.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혹시…….’

막다른 길에서 후작은 문득 한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여기까지가 카밀 녀석의 계략이 아닐까?’

황태자는 꽤 화가 나 있지만, 보라. 결국 카밀의 의도대로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는 최근 수도에 퍼져 있는 소문을 떠올렸다. 카밀이 황태자의 숨겨진 연인에게 독을 먹였다가 발각됐다고.

하지만 그 애지중지 총애 받는 ‘오필리어’가 다름 아닌 그의 저택에서 호사를 누리고 있는 병아리로 밝혀진 이상, 이 일에는 숨겨진 사정이 있는 게 확실했다. 암만 그래도 카밀이 병아리를 독살할 린 없으니.

아마도, 최근 궁에 갔을 때 무슨 이유엔지 황태자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카밀은 대화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아리를 훔쳐 온 게다. 황태자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았다.

이성적인 황태자가 고작 병아리 따위에 이렇게 화를 낸다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진짜 화가 난 원인은 카밀일 테고. 카밀은 병아리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려는 거였다.

‘역시 내 딸이로군.’

그것도 모르고 딸을 타박한 게 부끄러웠다. 총애 받는 병아리에게 잘해 주어야 나중에 황태자에게 할 말이 더 생길 터인데. 카밀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매수 사건까지 거론된 이상, 이쯤에서 베일리스 가문은 발을 빼야 했다. 후작은 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디 한번 직접 찾아보시지요.”

후작은 황태자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전하께서 이 방까지 들어오시게 해서는 안 돼. 절대로!”

“예? 하지만…….”

카밀의 하녀 에밀리는 의아했다.

“들어오시면 좋은 게 아닌가요? 외람되옵니다만 아가씨께서는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시니까…….”

“하! 좋아해? 누가? 언제?”

“예?”

에밀리는 넋을 놓았다. 분명 아침에 눈만 뜨면 황태자 전하의 자취를 쫓으셨는데? 주요 관심사셨는데?

갑자기 아예 좋아한 적 없다는 듯 구시는 게 이상했다.

‘아, 혹시…….’

부끄러우신 건가? 전하께서 집에 찾아오시는 경사스러운 일은 처음이니까!

“예에, 알아요. 알겠습니다.”

카밀은 찝찝해져서 대꾸했다.

“뭘 알았다는 건지 몰라도, 내 말 곧이곧대로 들어, 에밀리. 그러니 절대로 결단코…….”

그때 한 무리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곧장 가면 카밀의 방입니다.”

“그렇군.”

카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아버지라면 시간을 끌어도 훨씬 더 질질 끌거나, 혹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황태자를 그대로 돌려보내실 줄 알았다.

그런데 도리어 끌고 들어오시다니? 딸이 떳떳치 못한 짓을 저지른 걸 알면서!

‘감싸 주실 생각이 없단 의미인가?’

그들의 걸음 소리는 성킁성큼 가까워져 왔다. 낭패였다. 클레멘츠를 마주하고도 오필리어를 지켜 낼 자신은 없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곁에 둔 오필리어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도로 빼앗길 순 없었다. 절대로.

“내 말 명심해, 에밀리. 알았어?”

“예? 그치만.”

대답이 시원찮은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카밀은 방으로 들어서며 문을 잠갔다. 어차피 열릴 거라도 시간을 벌어 두기 위함이었다.

“삐?”

카밀은 소파 테이블에 앉은 병아리를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금목걸이를 두른 병아리.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나의 병아리. 오필리어를 보자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지켜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납치범에게 그런 얘길 들어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안 듭니다만…….

병아리 납치는 중범죄입니다. 범죄 신고는 112.

하지만 간절하게 날 바라보는 카밀의 얼굴을 보자 또 약해지고 말았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녹색 눈. 유려한 콧날과 슬픔에 약간 일그러진 입매. 어디 명화에 나오는 장면 같다.

내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붙잡는 거지?

이런 식으로 또 얼굴에 설득되면 안 되는데…….

그녀의 방은 거실 겸 응접실과 침실, 침실에 딸린 욕실과 드레스 룸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 스위트룸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카밀의 손에 들려 안쪽에 있는 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방문 너머에서 두세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익숙한 울림. 하나는 분명 클레멘츠였다.

“삐이이!(클레멘츠!)”

아무리 카밀이 호화로운 대접을 해 줘도, 여기 있으면 난 그저 병아리일 뿐이었다.

황태자궁에선 겉모습은 병아리라도 인간으로 있을 수 있었다. 내 비밀을 알고 지켜 주는 사람들. 글로리나 부인, 카시스, 유렌과 카렌. 그리고 클레멘츠가 있었다.

“아가!”

하지만 문을 향해 뛰던 것도 잠시. 허겁지겁 날 주우러 온 카밀에게 붙잡혔다. 이제 열쇠로 문을 열려는 듯 덜컥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는데. 정말 바로 저 앞까지만 가면 되는데……!

“삐이븁……!”

카밀은 날 끌어안고 침실로 몸을 던지며 문을 닫았다.

“방금 삐약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전하?

잠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것과 동시였다.

욕실과 드레스 룸, 침실의 열린 창문을 번갈아 보던 카밀은 잽싸게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비이.(날 보내 줘요.)”

“쉬이, 오필리어. 지금은 아주 조용히 해야 해.”

카밀은 조심스레 속삭였다. 곧이어 클레멘츠와 후작이 들어왔다. 난 어쩔 수 없이 부리를 다물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수도 사교계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아가씨였다. 그런 사람이 켕기는 걸 숨기려고 침대 밑에 구겨져 들어간 상태로 발견된다니. 그것도 한갓 병아리를 훔치려다가?

캐붕도 캐붕이거니와 그날로 카밀의 명성은 바닥을 뚫고 추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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