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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2)화 (52/218)

52화

‘이건 아니야.’

물론 난데없이 병아리 납치용 주머니에 넣어질 때부터 줄기차게 해 왔던 생각이다.

카밀은 폭주 기관차였다. 사랑스러운 병아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주체 못 한 나머지 돈을 마구 써 제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그녀가 자본으로 키워 낸 새 새끼가 돼 버릴 것 같았다.

“나의 오필리어, 골라 보렴.”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보석이었다.

“너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싶은데, 보석이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어디 사시는 인색한 분과 나는 다르단다.”

그게, 그 인색한 분에게 보석 필요 없다고 한 게 접니다!

좌르륵 펼쳐진 보석의 휘황한 광채에 눈이 아팠다. 하나같이 병아리가 몸에 걸칠 수 있을 만큼 작게 세공되었다.

카밀은 그중에 투명한 노란 빛을 띠는 보석 두 개를 가리켰다.

“이것과 이것 먼저 목걸이와 머리핀 세트로 만들게.”

“삐야악!(안 돼, 만들지 마!)”

“앞으로 너는 매일매일 내가 걸친 종류와 같은 보석을 쓰게 될 거야. 색깔별로 골라야 하겠지. 우선은…… 페리도트가 좋겠구나.”

수줍은 미소를 띤 카밀은 연녹색 보석을 골라 들었다. 그녀의 머리핀에 장식된 것과 같았다.

호화롭게 꾸민 귀족 영애. 그리고 그녀와 같은 보석을 달고 손바닥에 서 있는 병아리라니. 실로 기이한 돈 지랄이 아닐 수 없다.

“삐휴욱…….”

후작가로 납치당해 온 이튿날이 되었다. 카밀이 한시도 빠지지 않고 곁에 붙어 있는 통에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고 있었더니 정말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뭐라도 해야 해.

클레멘츠 앞에선 예산안을 찢어발겼다. 이따위 짓 하지 말라고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여기선 보석을 집어 던지며 깽판을 치면 적당할 거다.

하지만…… 근데 왜 못 하겠지?

너와 같은 보석으로 장식하고 다닐 거라고 수줍게 속삭이는 저 얼굴. 차마 저 모습이 절망으로 일그러지게 만들 수 없었다.

왜지? 아, 그렇군.

클레멘츠에겐 쌓인 감정이 있으니 막 대했어도 카밀에겐 그럴 수 없는 거다. 어쨌든 그녀는 내게는 잘해 주기만 했다. 내가 병아리인 줄로만 알고 있다.

“오필리어, 그게 맘에 드니?”

아무 거나 하나 던질 태세를 하다가 굳어 있자, 단단히 오해한 카밀이 내가 물고 있던 자수정을 받아 들었다.

“오필리어가 처음 고른 보석이다. 무조건 최고의 디자인, 최고의 세공으로.”

“분부 받들겠습니다, 영애.”

“삐이이!(아니야아아!)”

젠장!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로 혁명의 불길에 담백하게 구워지는 수가 있다!

카밀은 클레멘츠와 달리 내 말도 못 알아듣는다. 뜻을 전하려면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해!

나는 포로롱 날았다. 막 카밀에게 건네 받고 있는 세공사의 손에서 자수정을 멋지게 빼앗았다.

“삐히!”

그리고 멋진 기합과 함께, 원래의 보석 더미 위로 가열하게 던졌다.

“……!”

여세를 몰아 그 빛나는 보석 더미 위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차르륵 소리를 내는 보석 속으로 파고들며 몸부림쳤다.

“삐요옥!!(이런 거 필요 없어!!)”

팔자에 없던 보석 목욕이란 걸 이런 식으로 해 보게 되는구나. 눈물을 삼키며 날개와 두 다리를 더 힘차게 휘저었다. 날이 갈수록 앙탈 부리는 실력만 늘었다.

“아아…….”

사방으로 보석이 흩어졌다. 몇 개는 영롱한 소리를 내며 멀리 굴러갔다. 카밀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쯤 되면 내 뜻을 알아들었을까? 차라리 호의를 망치는 멍청한 짐승이라고 화라도 냈으면…….

“내가 어리석었구나. 미안해, 오필리어.”

“삑?”

“너라면 누구보다도 귀족의 병아리다운 선택을 했을 텐데……. 내 생각이 짧았어. 짧았지.”

카밀은 보석 속에 틀어박혀 머리만 쏙 나온 나를 쓰다듬었다. 불안했다. 이 패턴은 마치…….

“세공사, 가져온 보석은 전부 계산하겠네. 가능한 빨리 작업에 들어가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후작 영애 만세! 베일리스 만세!”

“시끄럽다. 그럼 정리해서 나가 보고. 대기 중인 의상 디자이너들을 마저 올려 보내게.”

뭐!

아니, 뭐?!

“삐에! 삐힉, 뀩……!”

“쉬, 괜찮아. 괜찮아. 바로 디자이너들을 만나기엔 힘에 부치니? 그럼 우리 일단 특선 점심부터 같이하자꾸나.”

그녀는 나를 품 안에 넣고 달랬다. 아니야!!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으며 저항해도 카밀은 저 좋을 대로만 받아들였다. 그녀가 과거 왜 클레멘츠에게 꽂혔는지 알 것 같았다. 얘네는 성별만 다른 영혼의 쌍둥이들이었다. 지금 서로 싫어하는 거? 그거 동족 혐오다.

제발 살려 줘! 여길 빠져나가고 싶어.

클레멘츠 이 자식은 대체 왜 감감무소식이지? 병아리라면 애지중지하면서. 카밀이 날 데리고 달아났단 것쯤이야 진작 알아챘을 텐데!

설마, 인간으로 돌아온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예 정이 떨어져 버렸나? 그래도 내 저주를 풀어 주기로 했잖아. 이런 식으로 계약을 무시한다고?

“삐야악!(클레멘츠, 이 화상아!!)”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데? 밥은 잘 들어가고 잠은 잘 오던? 누군 여기 납치돼서 강제 사치형을 당하고 있는데?

그때였다. 보석 세공사가 나간 문을 누군가 거세게 열어젖혔다.

“카밀, 너 이녀석!!”

후작이었다.

카밀과 색이 같았을 백금발은 세월을 맞아 희끗희끗했다. 검은 정장을 걸친 깡마른 남성이 노성을 질렀다.

“그깟 병아리를 위해 보석을 죄다 사들였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제정신이냐?”

아, 그니까요!

드디어 상식인이 등장했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모양새는 이래도 절망적인 상황에 나타난 구원자였다.

“아버지! 왜 갑자기 들어오셔서 화를 내시는 거죠?”

카밀은 잠시 당황했지만 질세라 항변했다.

“전 이 집의 후계자이고 적녀예요! 어차피 예산 안에서 쓰고 있는데 왜 어디에 쓰는지까지 간섭하시는 거죠?”

“당연히 간섭해야지! 그럼 네가 어처구니없는 데 낭비를 해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도 가만있으란 말이냐!”

“흥, 방계의 자제들은 하룻밤 유흥에 크로나를 펑펑 뿌리고 다녀도 명예를 실추시켰단 비난은커녕 아버지까지 나서서 감싸 주시던데요.”

“그, 그건, 너…….”

기세등등하던 후작은 어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이보쇼, 후작 양반!

하지만 이내 다른 건수를 잡아챈 듯했다. 그건 바로…… 나였다.

“그 병아리, 안 그래도 수상쩍다 생각했다.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것이 틀림없어. 아니 그러하냐?”

“윽…….”

그녀는 꼼지락거리며 나를 등 뒤로 숨겼다.

“……그랬군, 그랬어. 전하께서 서부에서 데려온 ‘병아리’를 애지중지하신다는 소문이 있었지. 다들 금발의 연인일 거라고 넘겨짚었는데…….”

카밀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다.

“너 이놈 카밀, 네가 설마 전하의 애완동물을 훔쳐 온 게냐?”

맞습니다, 아버님. 바로 그겁니다. 따님 좀 말려 주세요.

“…….”

“이제 이해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전하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거로구나.”

“그건…….”

그건 아닌데. 하지만 카밀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부정해 봤자 후작은 믿지 않을 터였다. 근 몇 년간 그녀의 행동을 결정하는 동기는 오로지 클레멘츠였으니까.

“하지만 소용없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카밀. 그분은 제국의 국본이시다. 이까짓 작은 병아리 하나 없어졌다고 신경이나 쓰실 것 같으냐?”

상식인으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았다. 아마 클레멘츠는 지금쯤 많이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짜 이까짓 작은 병아리 하나를 데리러 후작가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저, 귀여우니까…….’

그저 귀엽다고,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감수하고 병아리 한 마리를 데려와 보호하는 사람이니까.

클레멘츠는 분명 이해득실이 철저했고 일의 경중을 알았다. 필요하다면 사람마저 도구처럼 이용하며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 태도가 그의 본질이었으며 그를 완벽한 황태자로 만들었다.

그러던 사람이 내게만큼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네가 귀엽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냐며 잠든 내 곁에 와 중얼대던 목소리. 벌떡 일어나 따지자 붉어지던 귓가. 그것들을 꾸며 냈다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쯤 되면 내가 그에게 특별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각박한 세상 속, 뿌듯한 온기가 주는 기쁨을 깨우쳐 준 귀중한…… 병아리.

그런 큰 의미를 가진 병아리라면, 내가 인간 모습일 때면 유난히 틱틱대고 낯을 가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까짓 작은 병아리 하나 없어졌다고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후작은 틀렸다. 상식의 완전한 패배였다. 비단 신경 쓰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클레멘츠는 계약에 의해 1년 동안 나를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고작 작은 병아리를 위해서 일국의 황태자가 대립 가문까지 찾아와 고개를 숙이거나 갈등을 빚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나 때문에 어그러진 건 러브 라인 하나로 족했다. 그 대신 클레멘츠의 목숨을 살렸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의 힘이라면 날 책임지는 것쯤은 간단할 거라 생각해서 계약에 응했다. 도리어 계약에 발이 걸려 클레멘츠의 입지에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는다.

‘오면 안 돼, 클레멘츠!’

어떻게든 스스로 탈출해 돌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잠깐이라도 인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면……. 아.

혼우드를 떠날 때, 꿈에서 합체 마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주가 완전히 옭아매지 않도록 흠집을 내어 줄게. 진심을 다해 강렬히 염원해. 흠집이 깨어지도록.”

그동안은 굳이 급하게 인간 모습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마녀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엇을, 얼마나 염원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지느라 부녀 사이의 언쟁을 잠시 놓쳤다. 그런데 갑자기 쿵쾅대는 소리를 내며 하인이 달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후작님, 큰일 났습니다!”

“뭐냐. 무슨 일이지?”

“아래층에……!”

헐떡대며 숨을 고른 하인이 말을 맺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그때만큼은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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