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곳은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삐히약.(뭐 나도 어쩔 수 없이 거기 있는 거긴 한데.)삐유휴?(일단은 계약상의 거처거든? 저기요?)”
“네 방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에 알았지. 내가 너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더 편하게, 더 어울리는 삶을 영위하게.”
“…….”
“베일리스의 이름을 걸고 그리해 줄 거라고 결심했단다.”
확신.
카밀의 귀족적인 얼굴 가득 흘러넘치는 확신에 남이 비집고 들어갈 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클레멘츠를 따라다닐 때도 저렇게 막무가내였을 거다. 이젠 알겠다. 벨라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던 그 집착은 일종의 광기였다.
벨라는 황궁에 오지 않고, 클레멘츠도 단념했으니 그 광기는 자연히 소멸할 줄 알았는데.
왜 고스란히 나를 향해 버린 거야?
그동안 보아 온 인간 중에 제일 미친놈은 클레멘츠다. 그는 곱고 멀쩡한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미친 소리와 미친 행동들을 했다.
카밀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치밀하게도 숨겨 뒀던 광기를 어느 순간 무기처럼 휘둘렀다.
둘은 남모르게 미쳤다는 점에서 동류가 분명했다.
“오, 아가…….”
고뇌에 차서 말을 잃은 날 그녀가 안타까이 감싸 안았다. 낯선 상황에 얼어붙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젠 다 괜찮아질 거란다. 후작저까지만 가면 모두 해결될 거야. 내가 보증할게.”
아니! 거기까지 가면 모든 일이 꽈배기처럼 꼬여 버리겠지!
후작가의 마차는 착실히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난 카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댔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니 황궁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됐던 거지?
방 안에 콕 틀어박혀 있었어야 했나?
카밀이 스콘을 가져왔을 때, 만나지 않겠다며 글로리나 부인의 치마폭에 얌전히 숨어 있었어야 했나?
아예 살기 위해 카밀 앞에서 애교를 부린 일이 잘못이었나? 아니, 누가 그거 좀 열심히 했다고 이렇게 날 좋아하게 될 줄 알았나? 뭔 놈의 악녀가 이래?
“삐야악!(클레멘츠!!!)”
당연하지만 내 절규는 황궁에 가 닿기는커녕 마차 바깥으로 넘어가지도 못했다.
“어떠니, 오필리어?”
내 앞에 펼쳐진 건, 손바닥보다 작은 접시가 육중한 테이블 가득 깔려 있는 광경이었다. 접시 위엔 각기 서로 다른 식재료가 담겨 있었다. 흡사 만한전석을 방불케 했다.
그 가운데 카밀이 내 앞으로 밀어 준 곡물을 한 입 쪼아 먹었다. 음…… 살짝 비린 맛이 나서 별로였다. 내가 먹는 둥마는 둥 접시를 외면하자 카밀이 손짓했다.
“다음.”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접시를 치우고 다음 것을 소개했다.
“이 열매는 남부 소레즈 지방 특산품 가운데서도 믿을 만한 재배자가 키운 품종으로, 블루 옌이라고 합니다.”
“자아, 먹어 보렴. 사랑스러운 오필리어.”
이게 대체 다 뭐 하는 짓인지.
주변을 둘러보면 더 탄식이 나왔다. 정말 여기가 세련됨과 우아함을 극도로 중시하는 카밀 드 베일리스의 방이 맞기는 한가?
소설에 잠깐 나왔던 그녀의 방은 뛰어난 감각과 그것을 돋보이게 해 줄 절묘한 사치, 장식을 만들고 마감한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가 삼박자를 이루었다고 묘사되었다. 수도의 최신 유행을 따른 게 아니라, 그녀가 방을 꾸미는 방식이 곧 유행이 되었다. 한마디로 트렌드세터.
아직 잡지사나 인테리어 전문가들이 카밀의 방을 방문하지 않은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지금 그녀의 방은 ‘병. 아. 리.’ 단 세 글자로 평할 수 있었으니까. 여섯 글자로 하면 ‘병아리 오타쿠’. 열다섯 글자로 하면 ‘왜 병아리에 이렇게까지 집착한 거야’.
벽을 빙 둘러 붙은 꽃병에 꽂힌 프리지어, 맑은 연노랑 포인트 벽지, 레몬 빛 시폰 커튼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었다.
병아리 패턴이 수놓아진 베개 커버와 다양한 색조의 황금빛 방석들……. 뭐 이것도 의외지만 귀엽다고 넘길 수 있었다.
나를 경악하게 만든 건 벽에 걸려 있는 쓸데없이 고퀄인 병아리 테마 태피스트리. 그리고 침대 위에 떡하니 놓인 거대한 병아리 인형이었다.
저런 건 대체 어떻게 구한 건데?
이쯤 되면 클레멘츠보다 더했다. 클레멘츠도 날 납치하긴 했지만 방까지 병아리 테마파크로 바꾸는 미친 추진력을 보이진 않았는데.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뭘 했다고? 그냥 날 죽일까 봐 무서워서 손바닥 위에 드러누워 애교 몇 번 시전했을 뿐인데.
소레즈 지방의 특산품답게 블루 옌은 당도가 훌륭했다. 과즙 한 방울 한 방울이 혀끝에서부터 ‘저는 고품질 과일입니다’라고 외쳐 댔다.
이런 호사를 바란 적은 없지만, 이 집에 잡혀 온 이상 내겐 거부권이 없었다. 먹으라면 먹는 수밖에.
“그게 맛있나 보구나.”
카밀은 생긋 웃으며 기뻐했다. 시종은 눈치 빠르게 접시를 집어 다른 테이블에 잘 분류했다.
“오필리어. 예전엔 듀프레 후작이 직접 식사를 담당했다지?”
“삐약.”
“후후. 매일 서류를 뒤적이거나 아니면 검이나 휘두르는 자가 음식을 만들어 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그깟 어설픈 사료 따윈 아예 잊어버리게 만들어 줄게!”
카밀은 호기롭게 외쳤다. 하지만 그건 카시스가 얼마나 요리 존잘인지 모르고 하는 얘기였다.
하긴 그의 요리를 맛본 건 나뿐이니 아무도 모르겠구나. 왠지 씁쓸하다. 그가 만든 특식을 잊어버린다니.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
“삑삐.(잘 안 되겠지만…….) 삐약, 삐비이.(음, 힘내 봐…….)”
“듣자 하니 황태자는 네게 열매와 곡물만을 먹였다지?”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카밀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졌다.
잠깐. 저 말은 어째 새로운 카테고리의 음식을 선보이겠다는 뉘앙스인데?
“새는 벌레로 꼭 필요한 영양을 보충하는데, 무신경하게 말이야. 그렇지?”
뭐? 잠깐!
“나는 달라, 오필리어. 암만 거부감이 들어도……. 으으, 너에게, 윽. 너에게 좋은 것이라면 빼지 않고…….”
다음 접시를 바라보는 카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음 순간에는 그녀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너 괜찮니? 무리하지 마- 라고 하기엔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게 들어가야 할 주둥아리는 내 거니까. 으아, 미친!
“다음은 엄격한 품질 관리를 통해 생산된 갈색 거저리…….”
“삐히이이이에엑!!!”
나는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오, 오필리어?”
테이블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가능한 먼 곳까지 내달렸다.
무력하게 끌려온 내가 그렇게 우수한 기동성과 발군의 날갯짓 능력을 가졌을 줄이야, 카밀은 절대 몰랐겠지.
낮은 가구와 장식품 사이를 포로롱, 포롱 딛는 내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멍하니 흩어졌다.
“어쩜 좋아, 또 반하겠어…….”
* * *
중부 귀족의 수장이자 귀족파의 대표인 베일리스 후작은 아침부터 지끈지끈한 머리를 짚었다. 때 아닌 두통의 원인은 다름 아닌 그의 외동딸이었다.
안 그래도 정치적 반대파인 황태자를 죽자고 쫓아다니는 걸 말리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건만, 이번에는 심지어 사람도 아닌 날짐승이었다.
“카밀, 대체 그게 뭐냐?”
갑자기 초상화를 새로 그리겠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무심코 생각난 김에 보러 갔더니 화가가 딸 대신 웬 병아리를 그리고 있었다. 어찌나 황당하던지.
“보시면 아실 텐데요, 아버지. 오필리어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뭐라고……?”
아비가 황당해하건 말건, 카밀은 병아리의 정수리 솜털을 톡톡 쳐서 좀 더 위로 올렸다.
벨벳 방석 위에 앉은 병아리는 더욱 가관이었다. 제가 뭐라도 되는 양, 가슴을 부풀리고 앉아 있었다.
“오필리어만의 이 오묘한 털빛을 잘 살려 주게.”
“옙, 후작 영애.”
“황금빛 도는 윤기와 동그란 몸매도 말이야. 이 작품을 통해서 그대의 실력과 열정 전부를 평가하겠네.”
“옙, 후작 영애!”
저 화가 놈. 제 앞에선 ‘예술가의 긍지가…….’ 어쩌니 저쩌니 하며 비싼 척을 하더니. 알고 보니 돈만 주면 다 그리는 모양이었다.
기묘한 열기가 방 안에 흘렀다. 이해할 수 없는 열정에 섞여 들지 못한 채 둥둥 떠 있던 후작은 견디다 못해 소리쳤다.
“카밀! 내 말은 대체 저 병아리는 뭐냐는 뜻이다!”
그러자 카밀, 화가, 심지어는 건방진 병아리마저도 후작을 쳐다보았다. 견디기 힘든 어색한 시간이 지나갔다.
“이 아이요. 제 병아리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저만의……. 후후.”
딸의 눈빛이 먼 곳을 보듯 아득해졌다. 순간 병아리가 흠칫 몸을 떨었지만, 충격에 휩싸인 후작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듯 딸의 방을 나왔다.
카밀이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언제나 냉철하던 딸이 기행에 빠진 이유. 생각해 보면 답은 단 하나였다.
‘황태자!’
황태자를 향한 기약 없는 짝사랑을 견디다 못해 망가진 것이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분명했다.
‘처음 그를 따라다닐 때부터 억지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말로 타일러도 보고, 꾸짖어도 보고 애원도 해 봤다. 하지만 카밀은 아비 말은 곧 죽어도 듣지 않고 더 악착같이 황태자를 따라다녔다.
‘일찍이 어미를 여읜 것이 안타까워 마음대로 하게 놔둔 것이 문제였나.’
부인이 살아 있었다면 저 아이가 이렇게 엇나가진 않았을까? 후작은 장식장에서 크림 리큐어를 꺼내 술잔에 부었다.
‘그 겉만 반드르르한 놈이 뭐가 좋다고! 게다가 그의 출생은….’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
저 아일 어떡하나?
귀족 문화를 상징하는 중부 귀족들을 호령하고, 그들의 힘을 규합해 황실마저 압박하는 후작마저도 자식 앞에 무력해졌다. 때 아닌 낮술을 홀짝이는 그의 뒷모습은 조금 처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