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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50)화 (50/218)

50화

“오, 오필리어…….”

“목소리 좀 낮추지? 오필리어가 누워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참나. 방금 전까지 저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신 분은 대체 누구실까요?”

“억지 부리지 말고 이제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애당초 여긴 네가 있을 공간이 아니다. 오필리어가 깨어나는 걸 봐야겠다고 우기기에 들어줬을 뿐. 이제 봤으니 돌아가라. 가뜩이나 너 때문에 충격이 큰데 앞에서 얼쩡거렸다간 오필리어의 쾌유가 더뎌진다.”

“오필리어가 저를 만나 주었는데 전하께서 무슨 권리로 마음대로 쫓아내시는 거죠? 저는 오늘 오필리어의 손님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쾌유요? 오필리어가 쓰러지자마자 정신 사납게 굴면서 수습을 방해한 게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말 다 했나, 카밀 드 베일리스?”

“아뇨, 아직 덜 했습니다!”

그들은 한참 가시 돋친 말을 와다다 쏟아 냈다. 서로에 대한 일점의 배려나 인정이나 후퇴도 없는, 그야말로 개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아아, 청력이 손상될 것 같아.

“삐휴…….(그래, 싸워라. 싸워…….)”

귀를 충분히 못 막을 만큼 날개가 짧다는 게 한스러웠다.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돌아누웠다. 이불 너머로, 피차 엄청난 미성에 아까운 내용의 말싸움이 웅웅거렸다.

흠. 그래도, 저렇게 겉으로 싸우는 편이 보이지 않는 악감정을 쌓고 있느니보단 나을 것 같았다.

뭐가 됐든 카밀이 앞으로 두 번 다시 베이킹만 안 하면 된다. 그러면 대충 평화로울 것이다. 응응.

* * *

클랏샤 사교계 사람들은 언제나 새 소문거리를 찾아 티파티와 살롱을 배회하는 야수와 같다.

그 클랏샤의 야수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굶주려 있었다.

가장 인기 많은 풍문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황족이건만. 황후의 죽음 이후로 황제는 그 흔한 염문 하나 뿌리지 않았다. 새로 맞아들인 황비는 조심스럽다 못해 아예 정원에 틀어박혔다.

그나마 황비의 소생인 2황자 메디프는 잘생긴 데다 놀기를 좋아하는 한량이었고, 여성들에게도 곧잘 가볍게 접근하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법을 깊이 연구하고 싶다며 마탑으로 떠나 버렸다.

1황자이자 황태자, 클레멘츠는 확실히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위와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구설이 끼어들 여지조차 미리 차단해 버렸다.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범위를 넓히면 이야깃거리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버티고 있는 수도에서 함부로 황후에 대해 입을 놀릴 만큼 용감한 멍청이는 없었다.

결국 남는 건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 자리를 스스로 얻어 낸 카밀 드 베일리스였다.

중부 귀족의 수장인 베일리스 후작은 대표적인 귀족파. 그런 그의 영애가 황태자에게 목을 맨다는 건 꽤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우아하고 치밀하게, 때론 악독하게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모습은 수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서부에서 황태자가 미모의 여성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들의 기대치는 극에 달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 카밀이 황태자궁에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기대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드디어 황태자와 베일리스 영애가 뭔가 보여 주겠구나!

그러나 그 뒤가 너무 조용했다. 피 튀기는 견제나 여인들의 살벌한 싸움, 혹은 까다로운 왕실에서 인정받기 위한 소박한 시골 여인의 눈물겨운 분투는커녕, 웬 병아리가 애지중지 사랑을 받는다는 소식뿐이었다.

……병아리? 황태자가 들인 여자의 애칭인가? 그건 좀 귀엽긴 한데……. 왜 베일리스 영애가 가만히 있는 거지?

꼭, 갈등 과정이 홀랑 건너뛰어진 채 갑자기 잔잔한 일상 장면으로 넘어간 듯한 허전함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들이 원하던 소식이 일파만파로 전해졌다. 절치부심하며 은거하던 베일리스 영애가 드디어 손을 쓴 것이다.

황태자가 회의에 들어간 사이 문제의 ‘병아리’ 오필리어를 방문했고, 마치 동화 속의 마녀처럼 직접 독을 넣어 만든 과자를 먹였다지?

청순가련한 타입의 미인이 분명할 오필리어는 과자를 입에 넣자마자 쓰러졌고. 그 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귀족들이 모인 회의실을 내버려 둔 채 침궁으로 달려갔고. 베일리스 영애는 제 짓이 아니라며 황태자와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맥없이 쓰러진 연인의 곁을 지키던 황태자는, 분노한 나머지 베일리스 영애에게 황태자궁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몇 년 동안 황태자궁을 제집이라도 되는 양 들쑤시던 베일리스 영애는 그길로 쫓겨나 저택으로 호송되었다고 한다.

모든 정황을 전해 들은 야수들은 환호했다.

이거다! 바로 이거야! 삼각관계, 독살 시도, 총애에 눈이 먼 남자와 질투에 미쳐 버린 여자! 격정에 흐트러지는 기강과 극단적인 조치!

사교계의 백조 베일리스 영애는 과연 어떻게 반발할 것인가?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 있는 미녀 오필리어는 언제쯤 모습을 드러내어,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라는 타이틀을 가져갈 것인가?

근 이십여 년 사이 일어난 초유의 사건. 사교계는 뜨겁게 들끓었다.

* * *

거두절미하고 나는 지금 납치당했다.

답답해서 몰래 나와 돌아다닌 게 문제였다. 왜 답답했냐면 그건 클레멘츠가 답답하게 해서다.

단지 맛없는 스콘에 충격 받아 기절한 것뿐이었는데, 그 녀석은 걱정이 너무 심했다.

음식도 묽은 죽만 먹게 만들고.

조금 돌아다닐라 치면 근엄한 얼굴로 날 주워다가 침대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메이드들이 전해 주기론 카밀은 아예 황태자궁 대문도 못 넘도록 출입 금지령이 떨어졌단다.

내 방이 아무리 넓고 좋아도 하루 종일 방만 껴안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부탁해 둔 로맨스 소설을 카렌이 가져다주긴 했다. 그것도 발톱으로 책장을 넘겨 가며 다 읽어 버렸다.

정작 제일 읽고 싶었던 ‘황녀님은 꾀병쟁이야.’6권은 나오자마자 품절이라 못 구했다고 하고.

결국 클레멘츠가 황태자궁을 나갔을 때 보란 듯이 전용 문짝을 걷어차고 빠져나갔다. 나는 자유로운 병아리다 이거야.

가다가 마주친 문짝 앞에서 옆에 있는 사용인을 쳐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알아서들 문을 활짝 열어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낯선 얼굴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 사용인 친구가 대뜸 나를 들어 올렸다.

아주 익숙한 상황인데 이거.

혼우드에 살고 있을 알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카시스를 속이고 날 납치해 죽이려고 했었지. 원래는 그럴 애가 아닌데, 권력이 참 무섭다. 너무 큰 벌은 받지 않고 잘 살고 있기를…….

그 말인즉슨, 지금 이 납치를 사주한 자도 만만찮은 권력자일 확률이 높았다.

“자, 얌전히 계십시오, 병아리님. 그럼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

“삐, 삐약……!(이, 이러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아요?!)”

“의뢰인께서 털끝 하나 상하시는 일 없게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자, 이리로…….”

사용인, 아니 납치범은 바둥거리는 날 잡은 다음 미리 준비해 온 비단 주머니에 넣었다.

안쪽이 두터운 벨벳과 폭신한 양털로 누벼진 주머니 속은 아주 아늑했다. 꼭 병아리 납치에 최적화된 도구 같았다.

“휴, 이런 눈에 띄는 주머니를 사용하라고 성화기에 성가시다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물건이었구만.”

편안함에 취해 순간적으로 저항을 잊은 사이 납치범이 중얼거렸다.

“삐!(그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납치범은 주머니 입구를 끈으로 조여 검은색 황궁 시종복 안쪽에 숨기곤 급히 어디론가 이동했다.

꽤 멀리 가는 걸 봐선 벌써 황태자궁 권역을 벗어난 듯싶었다. 젠장. 클레멘츠가 오늘 저녁부턴 죽이 아닌 빵을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지?, 시엘로?”

“성공입니다. 여기…….”

풀숲에 숨는 듯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가 났다. 음산한 목소리들이 음침한 공모의 결과를 확인하곤 서둘러 흩어졌다.

잠시만. 누구? 시엘로라고? 왠지 익숙한데…….

폭신폭신한 주머니 속에서 진지하게 머리를 쥐어짰다. 아, 기억났다.

원작에서, 황궁에 온 벨라가 이런저런 권모술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산간벽지 출신이라 궁정의 음흉한 계략들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상대가 너무 유능했기 때문이다.

악녀 카밀이 음모를 꾸미면, 기똥차게 실행에 옮겨 주는 심복이 있었다.

이름과 평민 출신이란 신분 빼곤 베일에 싸인 인물. 하지만 수완이 엄청났다. 인공 지능계에 빛의 카시스가 있다면, 반대편엔 어둠의 시엘로가 있다고나 할까.

가볍게는 원하는 사람의 신상을 터는 일부터,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의 집에 흉악한 물건을 숨겨 놓는다거나. 둘도 없던 친구들을 이간질로 갈라놓는다거나.

그런 짓들을 마치 숙련된 사시미 장인처럼 가차 없는 손속으로 해내던 악당. 그자가 이번에 자행한 짓이라는 게…….

병아리 납치였다.

이쯤 되면 이 구린내 나는 음모를 사주한 자가 누군지도 뻔했다. 암만 속닥거려도 숨길 수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장르 소설 최초의 병아리 납치 주도자는 건네받은 비단 주머니를 갖고 마차에 올라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내가 숨 막힐세라 얼른 주머니를 조인 끈을 풀었다

“아가, 오필리어!”

환희에 젖은 얼굴이 날 반겼다. 물론 카밀이었다.

“아, 모든 게 잘되었어! 널 데려오기 위해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삐히유?(이게 무슨 짓이야?) 삐유극.(날 풀어 줘.)”

가능한 진지하게 말해 보려고 했지만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네가 내 마음을 제대로 깨우쳐 줬지. 마치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야. 이제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알았어.”

심지어 카밀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삐…… 삐구륵?(뭐, 뭘 할 건데?)”

그녀는 마치 나와 말이 통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사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가는 거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너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이야. 혈관에 얼음이 흐르는 황태자가 아니라!”

“삐잇.(악녀 역 그만둔다는 건 알겠는데.) 삐야악 뺩!(뭐냐고, 이 극적인 태세 전환은!)”

아군이 돌아서면 더 무섭고, 처음에 시큰둥하다가 빠지면 더 답 없다고 했던가? 카밀이 딱 그 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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