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해서 도출한 결론을……. 경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클레멘츠는 귀족들이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은발을 말끔히 빗어 넘긴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마저도 절경이었다.
그때였다.
“황태자 전하!”
잠깐 자리를 비웠던 카시스 듀프레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늘 냉철하던 얼굴은 다급해 보였다.
“……뭐라고?”
듀프레 후작의 보고를 들은 황태자는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귀족들은 덩달아 숨을 삼켰다.
“당장 가겠다.”
“화, 황태자 전하. 무슨 일입니까?”
“급한 일이 생겼으니 경들은 이만 해산하라.”
“그, 으음.”
채 처리되지 않은 안건들 사이에서 귀족들이 헤매고 있는 사이, 클레멘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작과 함께 나가 버렸다. 그 서슬에 의자가 나동그라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회의실 문이 쾅 닫혔고, 찬바람이 쌩 불어 종잇장을 날렸다. 문 너머로 빨라지던 황태자의 걸음걸이는 아예 뜀박질이 되면서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이 순간 그들은 수도의 극장에서 맥주와 함께 파는 옥수수 과자가 간절했다. 그 짭짤하고 바삭한 걸 원 없이 씹으면 이 흥미진진함이 배가 될 텐데!
“오필리어!!”
난폭한 기세로 문을 연 클레멘츠가 본 건, 핑 돌아 쓰러지는 오필리어였다. 직전에 웩 토해 냈을 빵 부스러기의 잔해가 보였다.
독살.
황실에서 흔한 사고인 만큼 클레멘츠는 즉시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리고 물구나무를 서고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뻔뻔스럽게도 아직 앉아 있었다.
“카밀 드 베일리스!”
이성은 이미 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그만둬라. 로메오, 그녀를 잡아 둬라.”
“영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글로리나 부인이 잡으려 하자 카밀은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 질렀다.
“이거, 이거 놔!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왜 오필리어를……!”
카밀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이들이 보기에 자신은 충분히 오필리어를 해칠 만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럴 마음을 먹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오필리어, 정신 차려 보거라. 오필리어! 젠장!”
그녀와 더 대거리를 하려나 싶었던 황태자는 이젠 오필리어에게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소환을…… 소환을 해야 해. 크렘시아? 아니, 전에 생각해 뒀잖아. 가누라, 벨틴, ……그래. 헤이에르테.”
쓰러진 병아리를 보며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주변의 환경이고 사람이고 더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클레멘츠는 떨리는 손으로 무작정 더듬거리다가 빵을 자르는 칼을 주워 들었다.
그때였다.
죽은 듯 누워 있던 병아리가 날개로 그의 손등을 톡 건드렸다.
“……!!”
희미한 삐약거림이 들렸다. 클레멘츠의 눈이 흔들렸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숨소리가 새어 나갔다.
‘오필리어가 죽었을 리 없어.’
정신을 차린 카밀은 글로리나 부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오필리어!!”
“그 뻔뻔한 입으로 오필리어를 부르지 마라!”
“제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하. 그래? 네가 아니면 누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이글거리는 보랏빛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눈을 보고 카밀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제가 큰 착각을 해 왔다는 걸.
아무런 희망도 단서도 없는 짝사랑을 이어 나갈 순 없는 법이다. 카밀은 또 한 가지 일에서 자신을 속여 왔다.
그가 자신을 보는 눈은 다른 영애들을 볼 때완 달리 조금은 상냥하다고.
방금 어느 영식과 대화를 나누고 마주쳤던 저 눈은 왠지 질투를 품은 듯 싸늘했다고.
그 모든 건 착각이었다.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할 수 있었을까.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감정이 몰아치는 저 뜨거운 눈동자에 비하면, 지금껏 그가 내비친 감정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無). 텅 빈 것이고 어떤 온도도 없는 것이었다.
그 온전한 허무에 목매고 내달려 온 어리석은 여자가 그녀였다.
우리는 제법 잘 어울려, 우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가끔은 그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었다.
전부 거짓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다. 조금이라도 애틋하게 여긴 일도, 친애의 감정 한 조각 품은 적도 없다. 그저 길거리에 구르는 돌멩이 가운데 조금 유용한 받침돌 정도였을까.
깨달음이 온 순간, 카밀 안에 한 조각 남아 있던 미련마저 모두 사라졌다. 대신에 그 자리에 생겨난 건 분노였다.
‘어떻게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을 얻으려고,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해칠 마음을 먹었을까? 내가 미쳤지!’
“저어…….”
쓰러진 오필리어와, 대치하는 두 남녀를 보며 머뭇거리던 메이드 카렌이 입을 열었다.
“베일리스 영애께서 스콘을 가져오신 건 맞지만, 독이 들어 있진 않았습니다.”
클레멘츠의 차가운 눈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더 설명해 보라는 눈치에 유렌이 끼어들었다.
“오필리어 님께 올리는 음식은 철저히 검증하라는 명이 계셨기에, 일전에 지급해 주셨던 기미용 스크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마법 분석 결과 검출된 건 평범한 스콘 재료뿐이었습니다.”
유렌은 비율이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요, 라는 말을 꾹 삼켰다. 클레멘츠의 눈에 혼란이 가득해졌다. 오필리어는 간헐적으로 경련하며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글로리나 부인도 아연해서 힘이 빠진 사이, 카밀은 붙잡힌 팔을 세게 떨치며 벗어났다.
“봐! 내가 직접 먹어서 결백을 증명해 보일 테니!”
그녀는 오필리어에게 주었던 스콘 그릇을 들어 한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러지 않곤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푸합!”
궁정 예법을 목숨처럼 지키던 카밀마저도 입에 들어온 즉시 분출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클레멘츠가 끔찍하단 표정을 지으며 오필리어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대체 뭐야, 이게!”
카밀의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들 가운데는 베이킹이 없었다.
그렇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안 하던 행동을 한다. 카밀은 제가 뭘 잘하고, 어디엔 소질이 없는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베이킹에 소질이 없었다. 하필이면 베이킹에만큼은 지독하게 소질이 없었다.
“너, 너…… 너희들. 25만 크로나짜리 기미 스크롤까지 썼다면서! 직접 먹어 볼 생각은 하지 않은 거야?”
남아 있던 캐모마일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 입가심을 한 카밀이 유렌과 카렌을 향해 기세 좋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들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먹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맛대가리 없는 걸 오필리어에게 대체 왜 준 거지?”
메이드들의 잿빛 눈에 허망함이 그득 차올랐다.
“한갓 메이드일 뿐인 그들이 어떻게 기호에 대해 후작 영애께 참견하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글로리나 부인이 말했다. 짧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 * *
살다 보면 이상한 음식을 먹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유치원생 때 친구가 강요해서 먹었던 길가의 잡초.
중학생 때 급식으로 나왔던 김치 치즈 팬케이크.
멀쩡한 줄 알았던 음식이 상해서 배앓이를 심하게 한 적도 있었고. 유명 SNS 맛집이래서 가 봤더니 곤죽을 씹는 식감과 혀끝을 때리는 진한 즉석 조리 식품의 풍미에 싸늘하게 식은 적도 있었다.
먹을 것 못 먹을 것 다 먹어 가며 강하게 큰 내가, 고작 잘못 구운 스콘 좀 먹었다고 맥없이 쓰러지다니. 어쩌다 이렇게 나약해진 거지? 좀 부끄럽다.
정신을 잃기 직전, 어떻게 소식을 들은 건지 헐레벌떡 들이닥친 클레멘츠를 보았다. 빵 칼을 집어 냅다 손바닥을 째려고 하기에 마지막 힘을 다해 말렸다.
“삐약.(얀마, 너 그러다 파상풍 걸려)”
알아 들었는지 말았는지, 떨리는 보랏빛 눈동자에 절박함과 황당함이 섞여 있었다.
식중독도 아니고 그냥 맛없어서 충격 받은 건데……. 으음, 카밀 미안해. 아무튼 이런 일로 또 크렘시아라도 불렀다간 이번엔 얼마나 놀림을 당할지 안 봐도 선했다.
그런데…….
“오필리어! 미안해, 미안해! 흐으윽…….”
“가식 떨지 말아라, 베일리스. 아직 네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혐의는 벗어지지 않았으니. 정말 선의의 선물이었다면 왜 정작 만든 네가 맛을 몰랐지?”
“그, 그건…… 후작 저택에서 물어봤을 땐 다들 맛있다고 해 줬는데…….”
후작 저택의 사용인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 A를 A라고 말도 못 하는 서글픈 을이여.
나는 병아리 오백 마리쯤 누워도 괜찮을 내 침대에 덩그러니 눕혀져 있었다. 보드랍고 얇은 이불 아래로 내 몸의 볼록한 실루엣이 보였다.
보아하니 황태자 전하와 후작 영애께서 나란히 앉아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신 것 같은데.
어째 본인들끼리 네가 잘못했니 내가 잘못했니 싸우느라 이쪽을 보지 못하고들 계셨다.
게다가 클레멘츠, 너 지금 일할 시간 아니었냐? 귀족 회의가 있다고 한 것 같았는데.
“웃기는군. 그들에게서 객관적인 평가를 바라다니. 그 정도로 판단력이 흐리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나는……. 그래요, 전 그때 한시라도 빨리 오필리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비웃을 가치조차 없군.”
“전하! 어떻게 오필리어에 대한 제 진심을 그렇게 매도하실 수 있죠?”
그들은 서로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분명 오늘 이전까지는 서로 체면 차리고 예의 차려 가며 거리를 두고 대했을 텐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앙숙이 되었을 리는 없고. 그동안 서로에게 시달리며 쌓인 앙금이 폭발한 것 같았다.
그런데 꼭 그걸 내 앞에서 터뜨려야만 할까? 갓 깨어났는데 시끄러워서 머리가 아프구나.
“삐이익…….(조, 조용히 좀…….)”
“…….”
“…….”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비이익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도와 경이로움에 가득 찬 보라색과 녹색 두 쌍의 눈이 나란히 나를 응시했다. 이내 혼자 보기 아까운 그들의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