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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8)화 (48/218)

48화

그런데 기껏 회귀하고 한다는 게 ‘스콘을 싸 들고 병아리 방문’일 수가 있나? 그간의 행태를 보아 제일 후회되는 게 병아리 던진 일일 리가 없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관찰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밀은 더 이상 날 해치려 하지 않았다.

“미안해, 오필리어.”

그 사과는 진심이었다.

그간 프로 병아리 해코지러들 사이에서 고생하며 트인 감도 있고.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순간의 호흡이나 분위기에서 읽히는 게 있잖은가.

카밀의 눈처럼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환멸, 깨달음 뒤에 오는 슬픔. 클레멘츠에 대한 체념 등. 복잡한 감정이 한데 어우러진 눈물일 것이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을 등지고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을 떨구는 그 모습은, 마치 여신이나 성녀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뜻하지 않게 악녀가 백화하는 모습을 보다니. 나까지 정화된다!

대체 계기가 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뭐, 일단 과거를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괜히 피 볼 일 없어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행이지만, 뭣보다 카밀 스스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게 이로울 리 없으니.

잘됐다, 카밀. 너의 새로운 인생 응원할게! 그동안 네가 잘한 건 없지만, 어쨌든 고생도 많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다가, 그녀가 내민 손바닥에 슬쩍 뺨을 부볐다.

“……!!”

카밀은 지나치게 감동한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또 보석 같은 눈물을 쏟아 냈다.

“삑삐.(카밀.) 비이야악.(울지 마.)”

기껏 좋은 마음 먹어 놓고 왜 울고 그래?

기쁨에 주체 못 하는 눈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더 말리진 않고 그저 날개 끝으로 코를 쓱 훔쳤다.

클레멘츠와 둘이서 잘해 보려나 했더니. 막 샀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됐다. 뭐, 적어도 카밀은 자기 파괴적인 집착에서 벗어났으니까. 이렇게 배드 엔딩 플래그가 하나씩 사라져 가는 건가?

그렇지만 동시에 연애 플래그도 사정없이 뽑혀 나가는군. 벨라도 스치는 인연이 되고. 카밀에겐 손절당하고. 클레멘츠의 독거노인 엔딩이 점차 가까워 온다.

지금까진 클레멘츠가 내 혼삿길을 막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내가 그의 혼삿길을 가로막는 1등 공신이었던 걸까?

미안, 클레멘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도 나름 괜찮을 거야.

속으로 그에게 시답잖은 사과를 하고 있으려니 유렌과 카렌이 나타났다.

“베일리스 영애께서 구우신 스콘을 데워 왔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콘이었다!

일단 냄새가 정말 좋았다. 콩 종류를 넣은 듯 고소한 향이 일품이었다.

“오필리어, 내가 직접 잘라 줄게.”

내가 접시 근처를 기웃거리며 킁킁대고 있자, 친절하게도 카밀이 직접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데.’

카밀이 작은 나이프에 손을 뻗자마자, 먼발치서 서성대던 글로리나 부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옆에선 유렌과 카렌이 나를 향해 뭔가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뭐지. 혹시 ‘오필리어, 내가 직접 (네놈을 조각조각) 잘라 줄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가?

날 위해 이렇게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춰 주다니 뭔가 짠하다. 하지만 카밀이 제 손으로 그런 고어한 상황을 만들 인물도 아니고. 게다가 이제는 날 해치지도 않을 텐데 뭐!

“삐약!(여러분 안심하세요!)”

에이 괜찮다니까요. 얘도 구워 온 정성이 있는데! 악녀의 개과천선 기념 스콘 한번 맛이나 보자.

“자아, 여기.”

스으윽. 잘게 썰린 스콘이 담긴 접시가 내 앞으로 밀어졌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한입 쪼았다.

“…….”

아, 이건. 진짜……. 아, 이게 무슨 맛이지?

음식의 탈을 쓴 그것 안에는 태초 이전의 혼돈이 한 알갱이 들어 있었다.

그게 입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간과했던 사실들을 한꺼번에 깨달았다.

우선 이 몸 오필리어는 원래부터 미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맛있는 것도 잘 느꼈고, 맛있는 걸 찾아다니는 데 보람을 느꼈다. 병아리가 되면서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극히 절묘한 솜씨로 조합한 카시스 표 모이에 길들여지며, 내 입맛은 모르는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까다로워졌다.

마지막으로, 이 세계에서 나는 귀족이었다. 암만 몰락했다, 영세하다 하지만 어쨌든 귀족. 검증되지 않은 음식물이 식탁에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하다못해 모나한 백작가에서 대충 때웠던 식은 빵도 백작가 파티셰가 직접 구운 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망한 요리를 먹으니 몇 배로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재료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대귀족 가문에서나 구할 수 있는 질 좋은 밀가루와 버터의 향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이렇게 조합한 거지?

우유는 너무 적고 소금은 너무 많다. 뒤에서 입맛만 돋워야 하는 바질 향의 이질적인 존재감은 무슨 일인가.

마치 실수로 한 포대씩 섞어 버린 소금과 밀가루를 한 알씩 분리해 내고 있는데 창밖의 풍경으로 있어야 할 나무들이 난입하여 가지를 흔들며 팝핀을 추는 것 같았다.

맛도 없지만, 멀쩡한 고급 재료로 이따위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허탈함과 정신적 충격이 더 큰 종류의 맛없음이었다.

거기다 겉보기엔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게 만든 것이 완전한 사술의 영역이었다!

“어떠니? 오필리어?”

카밀의 목소리는 설탕처럼 달았다. 그 설탕, 여기에도 한 숟갈만 뿌려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내 고개가 삐그덕대며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유렌과 카렌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 그런 뜻이었나요. 아까 그 필사적인 눈짓은…….

“비익…… 욱!”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백작가에서의 만찬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먹은 게 얹히다 못해 역류했다. 몸이 휘청거렸다.

“오필리어니임!!”

“오필리어!”

네 여자의 비명과 경악을 맞이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황태자궁의 회의실.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의 대회의실이었다면 좀 더 엄숙한 분위기였겠지만, 햇살이 비쳐 드는 이곳은 좀 더 편안해 보였다.

서류와 펜, 지도와 책들이 목을 축일 차와 함께 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다수는 명분과 전통, 충성을 중요시하는 동부 출신이었다. 황태자의 최측근인 카시스 듀프레 후작이 바로 그들의 리더 격이었다.

다음으론 황태자의 모후의 출신 가문인 샹그리아 공작가 휘하의 몇몇 중서부 가문들이었다.

“샹그리아 공작은 아직 오지 않았소?”

“몸이 좋지 않다는군.”

“아…….”

음울하고 병약한 샹그리아 공작은 얼굴을 비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황후 셀레네의 죽음 이후 그들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중서부 가문들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다음은 귀족파의 기치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부 귀족들.

끝으론 지역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게 특징인 남부 가문들 가운데 몇 명이었다.

이 궁중에서 이들은 모두 황태자 지지파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그들끼리 불가피한 갈등이 있을지라도 큰 분쟁이나 분열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였다.

상석에는 그들의 주인, 황태자가 자리했다.

“하여, 무엇보다 북쪽 신성 왕국의 움직임에 주의를…….”

그림 같은 외모와 설득력 있는 언변, 적절한 시선 처리와 제스처. 매번 보는 모습임에도 감탄스러웠다.

그에겐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기고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요즘 머릿속을 계속 파고드는 딴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태자가 ‘오필리어’라는 여자를 숨겨 두고 애지중지하며, 무슨 말이든 들어준다는 소문.

심지어는 그녀를 빼앗아 가려 한 혼우드의 모나한 백작을 뼛속까지 가루 내어 버리려 한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요즘 황태자는 회의 사이의 휴식 시간에 지나가다가 멍하니 멈춰 서는 일이 많아졌다. 그 시선의 끝엔 보통 노란 들꽃이 자리했다.

“전하께서 왜 저런 보잘것없는 들꽃을…….”

“휴식이 필요하시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아니겠소?”

“잠깐, 듀프레 후작이 가는군.”

눈치 빠르게 주군에게 다가간 보좌관이 물었다.

“꺾어서 오필리어 님께 보낼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의 표정을 보고 귀족들은 넋을 잃었다.

저분이 과연 우리가 알던 그분이 맞나?

한번 의심이 시작되자 평소와 다른 그의 모든 행동이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로 보였다.

그는 회의 중 귀족들의 말을 부쩍 자주 놓쳤다. 그 ‘오필리어’란 여자와 돌아오기 전까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본디 황태자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주 산책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산책하는 황태자를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틈만 났다 하면 침궁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아끼면 제 궁에 가두어 두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려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의 여자가 기거하는 곳이 황태자의 침궁이라는 사실은 품위 없는 자들의 발칙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황태자는 대인 관계에 능숙하지만 누구도 그가 직접 그은 선을 넘어가지 못했다. 특히 사적인 친분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그는 냉혹했다.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이 굴던 카밀 드 베일리스조차 그의 마음을 한 톨도 얻지 못했다.

은빛의 고고한 얼음 같던 그를 녹인 건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흥미. 그랬다. 수도에 발을 붙인 귀족이라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스캔들과 가십에 대한 열띤 호기심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누군지 짐작하는 사람은 수도에 없었다. 황태자가 유독 노란색에 얼빠진 듯 반응하는 걸로 보아 금발일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할 뿐.

초기엔 혼우드의 아가씨인 레이디 모나한이란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수도의 정보통들이 조사한 결과 그녀는 흑발인 데다 이름도 오필리어가 아닌 벨라루시아였다.

이쯤 되면 귀족들은 지금 회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궁금했다. 너무나!

당장이라도 그 여인이 누군지 알려 주시라고, 황태자의 바짓자락이라도 붙들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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