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7)화 (47/218)

47화

‘……가만. 저건.’

창밖의 뭔가를 발견한 카밀은 마차를 세웠다. 베일리스 가문의 백합 문장을 새긴 마차는 클랏샤 대로변의 어느 의상실 앞에 멈춰 섰다.

유리벽 너머 마네킹에 밝은 노란색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로 지어진 옷은 군데군데 나비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 색깔이 꼭…….

카밀은 홀린 듯이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직원들이 온몸으로 환영하며 튀어나왔다.

“걸려 있는 저 드레스를 보고 싶구나.”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영애. 이번 봄 신상인데, 나비 장식으로 포인트를 주고 보석 가루를 뿌려 반짝임을 더했답니다.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그러지.”

어차피 거적때기를 둘둘 말고 있어도 눈이 부신 외모였다. 직원은 칭찬을 늘어놓았으나, 스스로가 보기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평소 입던 스타일과 너무 달랐다. 선이 세로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옷은 늘씬한 키와 몸매를 강조해 주었다. 한 톤 어둡거나 차가운 색깔은 창백한 피부를 더 아름다워 보이게 했다.

반면 이렇게 선명한 노란색은 어딘지 그녀가 가진 색조와 어긋났다. 풍성하게 불어난 치맛단은 그녀의 몸을 떠나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드레스를 감히 입으라고 가져오는 이가 있다면 가차 없이 내쳤을 텐데. 왜 스스로 찾아와 꿰어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카밀은 그 드레스를 사기까지 했다.

수도에서 가장 큰 서점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알아보려던 내용은 조류의 약점이나 이용할 만한 특징이었다.

카밀은 그 아기 새의 식사에 어떻게 장난을 칠 수 있을지 구상하기 위해 반려 조류의 모이를 만드는 법을 읽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자신이 만들어 준 모이를 맛있게 먹는 그 아기 새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면 안 돼. 차라리 저 도감을 볼까. 그 병아리의 종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다면 공략에 도움이 될 터.

카밀은 두터운 하드커버의 도감에 손을 뻗었다. 값비싼 컬러 인쇄가 아낌없이 들어간 책이었다. 수십 가지 병아리의 향연을 접하려니 자기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 목적과는 별 관련도 없는 병아리 육성 서적만 한가득 저택으로 보낸 뒤였다.

터덜터덜 서점을 나오던 카밀은 놀라움에 눈을 치켜떴다.

‘이게…… 뭐야?’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저 이불 가게에서 파는 연노랑 커튼.

보석 가게에 진열된 노란 보석 시트린.

꽃집 앞에 다발로 묶여 꽂혀 있는 민들레와 수선화.

그 모든 것들이 포인트 조명을 켠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임에 눈길을 향하면 병아리와 함께하는 달콤한 상념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세상으로 느릿하게 발을 디디며, 그녀는 깨달았다.

아, 이미 늦었구나.

한동안 베일리스 후작가로 노랗고 화사하거나, 솜털처럼 보드라운 물건들이 날라져 왔다.

카밀의 친구들은 몇 차례 황태자의 소식을 물고 찾아왔다. 하지만 본인조차 신기할 정도로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가 황태자에게 연서를 보냈다는데도 카밀은 그저 심드렁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 병아리, 오필리어를 다시 봐야겠다.

거기에 집중하자, 그동안 경황이 없어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병아리를 복도에 패대기치지 않았던가.

천만 다행히도 날렵한 병아리는 포르르 날아 위험을 피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선택적으로 애교를 부릴 만큼 똑똑한 미물이었다. 상처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자그마한 발을 잘못 디뎌 접질렸을 수도 있다. 아기 손톱보다 연약한 발톱이 빠졌을지도. 어쩌면 그저 놀라서 앓아누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미쳤었나? 이를 어쩌지?’

그 아이를 봐야만 하는 이유가 늘었다. 다치지 않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답지 않게 과자를 굽겠다고 난리를 부린 게 바로 오늘이었다.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스콘을 데워 오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간 메이드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괜찮았다. 그동안 단둘이 이렇게 차를 마실 수 있으니까.

늙은 번견 같은 집사장이 감시라도 하듯 저만치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카밀은 글로리나 부인을 한차례 노려보곤 오필리어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오필리어, 그간 잘 지냈니?”

“삐삐!”

적당히 식은 찻물에 부리를 콕콕 박아 대고 있던 병아리는 얼른 고개를 쳐들고 삐약거렸다. 마치 제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찻물 한 방울이 아직 부리에 맺혀 있는 모습까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윽, 심장이 아파.’

카밀은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세월 수도 없이 클레멘츠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렇게 심장이 아픈 적이 있었나?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무겁게 뛰고, 공기는 달콤해지고, 천상의 종소리가 울려 댄다고 하던가?

아무리 황태자의 모습을 봐도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아서, 그저 허풍 떨기 좋아하는 시인들의 과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뺙. 뺘아. 삐이?”

저 영롱한 소리가 천상의 종소리가 아니면 뭘까. 카밀은 달콤한 기분에 젖어 턱을 괴었다.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아무리 사람처럼 차를 마시며 마주하고 있다 해도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저 삐약거림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밀은 그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어쩌다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걸까.”

“삐이, 삑……?”

“너도 당황스럽겠지. 바로 저번에도 나는 너를 해치려고 했으니까. ……후회하고 있어. 정말로. 고맙게도 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삐히익…….”

병아리는 부리를 좍 벌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한쪽 날개를 펴서 그녀를 삿대질하듯 가리켰다. 마치 이제야 그때의 일이 기억난 것처럼.

“삐삣!! 삐야앗!”

“변명이지만 그땐 너무 절망적이었어. 모든 게 네 탓인 것만 같았어. 아, 내가 미쳤지. 그럴 리가 없는데…….”

“흥삣.”

병아리는 아예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흡사 토라진 듯한 반응이었다.

“반성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카밀은 쩔쩔맸다.

자신이 황당한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았다. 병아리가 화난 것처럼 보이는 건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꼭 다 이성적이진 않은 법이다.

저 아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오필리어가 좋으니 어떻게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병아리의 언어를 모르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언어를 풀어놓을 뿐이었다.

“그래. 분명 나는 원래 반성 따위는 몰라. 뒤돌아보지 않아. 황태자 전하를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여자였지. ……최고의 남자. 최고의 지위. 최고의 인생.”

최고의 여자. 그 자릴 얻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카밀은 앞만 보고 폭주하는 기관차와도 같았다.

“그걸 위해선 아무리 잔인한 짓이라도 할 수 있었어. 설령 말 못 하는 동물을…… 너를, 해치는 거라 하더라도. 해야만 했어.”

어느 순간 오필리어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쿵, 카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쩐지 그 까맣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맑고 순전하고 부드러운 것.

“지금은 아니야. 너를 보지 못한 며칠 동안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를 거야.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때 네가 다쳤다면 난 절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란다.”

카밀은 속삭이듯 덧붙였다.

“미안해, 오필리어.”

창가로 들어온 바람이 흰 뺨을 간질였다.

옷을 고르고 유행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적과 아군을 가르고. 이용하고 징벌하고. 보여 주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들.

그것이 자신의 재능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힘의 우위를 확인할 때 희열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그중 일부가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 앞의 병아리처럼, 굳이 짓밟을 필요 없는 약자를 짓밟은 행동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을 수 없는 남자를 위해 바친 시간들.

“솔직히 이제는 계속 전하를 쫓아다녀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구나.”

속에서 올라오는 말들을 뱉어 내던 카밀은 너무도 놀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한 생각은 계속 내달렸다.

클레멘츠. 그는 아름다웠고, 그가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영화는 더욱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간은 행복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오필리어 옆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인지 비교해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었어. 오랫동안. 이제는 그 시간이 고통이었다는 걸 안단다, 오필리어. 왜냐하면…….”

카밀은 천천히 병아리에게 손을 뻗었다. 이쪽을 한껏 경계하고 있는 로메오 글로리나조차 매섭게 쳐다볼 뿐 다가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진정한 기쁨이란 무엇인지, 네가 알려 주었기 때문이야.”

* * *

아주 조용한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복도에 날 던지려던 카밀이었다.

절대로 내가 단순해서 잊고 있었던 게 아니다. 본디 너그럽기 때문에 괘념치 않고 있다가 굳이 카밀이 언급했기 때문에 떠오른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

직접 스콘을 구워 왔다고 했을 땐 사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스콘에 무슨 짓을 했구나.’

그 정도로 카밀은 명불허전의 악녀였다. 클레멘츠를 차지하기 위해서란 명목 아래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그런데 갑자기 날 좋아한다니. 클레멘츠를 포기하겠단 얘긴 또 뭐고. 이렇게 극단적인 태세 전환이라니. 며칠 사이 카밀이 회귀라도 한 것일까?

이곳이 소설 속이란 걸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 회귀를 한 경우 이전과는 반대로 행동하며 뭇 사람들의 궁금증을 사게 된다.

카밀처럼 신바람 나게 나쁜 짓을 하던 악녀가 회귀한 경우, 그간의 악행을 돌이키고 근신하는 게 보통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