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 클라우디아.”
“허브 차 드시겠어요? 이 정원에서 직접 길러 말렸답니다. 삼촌의 급한 성정이 눌러질 거예요.”
“하, 됐습니다! 나 원 참.”
가주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서성거렸다. 흙바닥 가득 그놈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이기 짝이 없는 허브들이 잔뜩 가꿔져 있었다.
그는 한탄했다. 그 영민하고 야심 가득하던 소녀가! 누구보다도 페리윙클의 후손다웠는데. 그토록 바라던 황궁에서 원하는 것이 고작 이 따위 풀꽃 가꾸는 일이었나?
가주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이대로 아무 것도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메디프 전하를, 황위에 올려야 할 것 아닙니까!”
“아, 메디프!”
황비는 탄성처럼 제 자식의 이름을 불렀다.
“기특한 내 아들! 그 아이가 마탑에서 돌아오면서 선물을 가져온다지 않겠어요? 무슨 거울이라던데…….”
“…….”
“이 어미가 뭐라도 답례해야죠. 거울에 어울릴 만한 덮개를 직접 짜고 있어요. 국조 아다만티스 문양을 넣어 짜고 있는데, 어떤가요?”
가시덤불에 쓸린 흔적을 두르고도 우아한 손이 한쪽을 가리켰다. 나무와 골풀로 만든 의자 앞에 직조기가 있고, 거의 다 짜인 황금빛 큰 천이 걸려 있었다.
날개로 감싸인 다이아몬드 문양은 제국의 문장과 거의 흡사했다. 천을 짠 솜씨는 좋았지만, 조슈아 페리윙클은 자세히 보긴커녕 대꾸도 없이 유리 정원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며 쌩 일으킨 바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멍청한 삼촌. 그깟 병아리나 추문 따위로 그놈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황비는 제가 짠 천의 무늬를 손으로 훑었다.
“그나저나 병아리라. 나도 궁금하기는 하네.”
혼우드에서 돌아온 후로 확실히 황태자 놈의 행적은 이상했다.
그 녀석이 드디어 뭔가에 빠져 있는 게 확실한데.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 바치는 데다, 카시스 듀프레 후작까지 주군의 연애 놀음인지 보살핌인지에 가담하고 있다 하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카밀 드 베일리스는 그 흔한 난동 한번 피웠다는 소식이 없다. 단지 황태자궁 정원에 매일같이 눌러앉다가, 이젠 집에 틀어박혀 온 방 안을 노랗게 도배하고 있다던가.
“우리 황태자가 어디, 어미에게 새 애완동물을 보여 줄 만큼 살갑게 굴어야 말이죠.”
조용한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정원 안에서 흩어졌다.
* * *
“저를, 이용하고 계셨잖아요!”
기나긴 짝사랑의 대상에게 마지막으로 고하는 말로는 너무 궁색한 한마디였다. 카밀은 무너지는 마음으로 뛰쳐나왔다. 마침 집무실 근처에 문제의 그 병아리가 얼쩡거리고 있었다.
카밀은 이제 알았다. 황태자가 데려온 여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저 병아리뿐이었다. 그 남자가 움직인 시점은 모두 저 병아리와 연관이 있었다.
제게 아무 애정도 없으면서,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를 카밀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에게 성가시게 달려드는 불나방들을 잡아채 삼키는 거미. 날파리들을 차단하는 촘촘한 거미집. 그것이 그녀의 쓸모였다.
처음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는 차라리 죽어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용하는 거라도 그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데. 그의 곁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여자보다도 가까운 위치를 허락하겠다는데.
그런데 이제 그걸 포기하란다. 거미도 거미집도 필요 없으니 이젠 영영 물러가라고 한다. 그녀가 저 병아리를 가까이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이게 뭐길래! 우습지도 않은 새 새끼.
아름다운 사내는 미친 모습마저 독보적이었다. 그 광기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었을 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봐주지 않고 없애 버렸어야 했다. 고작 저 노란 솜털 따위에 놀아나다니.
카밀은 저를 빤히 응시하는 병아리를 들어 올려 던져 버렸다. 부드러운 감촉에 힘이 풀려 버려 제대로 던질 수는 없었지만. 다시 제대로 손봐 줄 여력은 없었다. 그저 급한 마음으로 궁을 빠져나갔다.
후작 저택에 도착한 카밀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오열했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랫것들을 모두 쫓아냈다. 3년간 그녀의 모든 걸 사로잡았던 감정이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이렇게 모든 게 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실을 부정했다. 전부 그만두라고 말하던 황태자의 단호한 어조를 일부러 지워 버렸다.
그래, 이건 또 하나의 시험인지도 모른다. 그가 내리는 마지막 시험. 사람뿐만 아니라 한낱 미물까지도 그의 옆에 가만두지 않는 악의 화신. 더 강력한 거미가 되라고.
그 새 새끼를 죽여 버리자.
아침이 되면 새로운 계략을 짜야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흥미에 사로잡혀 자신과 황태자의 이름을 웅성대도록.
병아리가 잡혀 오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낼 것이다. 샛노란 몸은 아무런 힘도 없겠지. 두 손으로 꼭 쥐고 따뜻한 목을 누르면…… 아, 얼마나 말랑말랑할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카밀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새가 그 위에서 바르작거리던 감촉이 아직도 간지러웠다.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자. 독을 쓸까? 그녀의 서랍장 한 칸에는 말 한마디 잘못한 이들을 한 방에 시미크 곁으로 보내 줄 약병이 들어 있었다.
병아리가 좋아할 만한 좁쌀을 쏟아 놓고 그걸 한 방울 섞어 놓자. 멍청한 새대가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잘도 쪼아 대겠지. 그 조그만 주둥이로 콕콕 찍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뭐?”
카밀은 번쩍 떴던 눈을 다시 감으며 돌아누웠다.
진정하자. 제아무리 사랑스러워 봤자 1분 뒤에는 싸늘한 털 덩어리일 뿐. 눈을 감고 나동그라진 사체 너머로 표독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자신이 상상되었다.
“……우웁.”
카밀은 몸을 웅크렸다. 혐오감이 치솟았다. 온기가 떠나 더욱 너절하고 하찮아질 병아리가 아니라, 상상 속 자신에 대해서.
‘왜 이래, 카밀 드 베일리스. 너 미쳤어? 그 병아리는 죽여 마땅해. 네게서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았어. 미물 주제에 건방지게 말이야!’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아마 빛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벌떡 일어났다가 스스로를 다잡으며 누웠다가를 반복하며 잠을 설쳤다. 그러나 마침내는 완전히 지친 채로 아침이 밝아 버렸다.
그래, 이건 인정했다. 기약도 없고 멈출 수도 없는 집착 속, 그 병아리나 쓰다듬고 있는 시간은 아무 고민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병아리는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날 선 눈으로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선뜻 제 손 위로 올라와 온기를 전해 주었다.
감기는 눈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잠들기 직전, 카밀은 생각했다.
‘저 빛. 꼭 그애의…….’
* * *
불청객이 뛰쳐나간 황태자궁은 얼마간 평화로웠다. 물론 총애받는 병아리 오필리어와 황태자 사이에 냉전 비슷한 게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나갔다.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활발한 병아리는 오늘도 봄볕을 즐기며 걷고 있었다.
아끼는 병아리가 불손한 사람과 마주칠 것을 걱정한 황태자 클레멘츠는, 오필리어의 산책 시 반드시 집사장 글로리나를 대동시켰다. 그리하여 사람 몇몇이 꼬리처럼 붙은 행렬이 조그만 병아리 한 마리를 졸졸 쫓아다녔다.
이윽고 황태자와 집사장이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얼마 전 쫓겨났던, 황태자궁의 영원한 불청객, 황태자가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불손한 사람’ 카밀 드 베일리스가 오필리어의 행렬 앞에 나타났다.
“베일리스 후작 영애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납시었는지요.”
글로리나 부인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그 미소와 말속에 칼이 있었다.
“더는 이곳에 오셔 봤자 원하시는 만남을 기대할 수 없단 것쯤은 알아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장. 나는 여기에 오필리어 양을 만나러 왔네.”
“오필리어 님을……? 황태자 전하가 아닌 오필리어 님입니까?”
“로메오 글로리나,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한낱 집사장에다 귀족조차 아닌 그대에게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는가?”
고귀한 신분으로 찍어 누르는 태도는 카밀을 따를 자가 없었다.
“말씀대로 저는 종이며 귀족조차 아닙니다만, 집사장으로서 황태자궁의 법도를 세울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황태자궁의 법도에 따르면, 전하의 손님은 외부인의 압력과 상관없이 본인의 거취를 결정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글로리나 부인 역시 고귀한 사람이 발에 채는 황궁에서 잔뼈가 굵어 왔다. ‘황태자궁의 법도’, ‘손님’, 그리고 ‘외부인’에 특히 강한 악센트를 실으면서도 공손한 말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오필리어 님을 부탁하셨는지 모른다면 집사장의 자격이 없었다. 모욕을 받고 뛰쳐나간 베일리스 영애가 이렇게 금방 다시 찾아올 줄이야. 모르긴 몰라도 좋은 목적으로 오필리어 님을 보자고 할 리가 없다.
“흥. 늙은 번견.”
한쪽은 지엄한 신분을, 한쪽은 손님과 불청객의 도리를 들고 호각으로 맞붙었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하여, 그 귀하신 손님의 입장은 어떻다고 하던가?”
“만나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쯤 대치했을 때, 메이드들의 치마폭에 가려져 있던 당사조(鳥)가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꽁지깃에 매달린 흰 새틴 리본이 우아하게 흔들렸다.
“비약.”
“……!”
“오필리어 님!”
‘그만하면 됐어요.’라는 뜻을 이들이 알아들었을 리 없다. 어쨌든 날개를 휘저은 병아리는 카밀에게 다가갔다.
“삐익삐?”
“오, 오필리어.”
“뺘아?”
작은 병아리를 마주치고 안절부절못하던 베일리스 후작 영애는, 레이스 가방에서 준비해 왔던 종이 꾸러미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