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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4)화 (44/218)

44화

매끄러운 입술이 벌어졌다. 어찌나 모양이 좋은지, 그대로 시선을 빼앗겼다가 퍼뜩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입술이 다시 닫혔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 저주를 풀어 주고 안전을 보장한다고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잠시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 정적이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역시! 그는 내게 알려 줄 생각 따위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래요, 제가 주제넘었군요.”

며칠간 그를 피해 다니며 한 고민. 용기를 내어 한 질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열기는 이러면 안 된다고 외치는 이성을 간단히 녹여 버렸다.

“다아, 생각이 있으실 텐데. 감히 끼어들어선. 전 계약 내용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건데.”

신나게 삐약거렸더니 정말 내가 동물인 줄 아나 봐!

하긴 그렇지. 드높으신 황태자 전하 입장에서 보면 나와 가축 사이에 유의미한 거리가 있긴 할까?

더는 부딪칠 가치가 없었다. 그대로 홱 돌아서서 걸었다.

“너 지금…….”

말을 끝까지 똑바로 하시죠. 그래서 새 새끼 한 마리 붙잡을 수 있겠어요?

“……멈춰, 오필리어.”

아까도 말했지만, 서란다고 서는 사람 보신 분?

“…….”

가암히 황태자 전하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걷다니. 선량한 백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번 막 나가기 시작한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내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나를 따라잡았다. 나는 보란 듯 더 빨리 걸었다. 하지만 곧 따라잡혔다. 나는 질겁해서 더 빨리 걸었다.

나랑 대화할 의지가 없는 건 그쪽 아닌가요?

항의하는 시선을 던지곤 아예 뛰기 시작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뜀박질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대로 내 방까지 직행했다. 다행히 따라오는 소린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잠들려고 누워 있으니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알 만했다. 하지만 굳이 나가 볼 생각이 있을 리가.

* * *

늘어지게 한잠 자고 일어나니, 햇빛을 받은 몸은 무사히 다시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그 뒤로도 며칠간 방 밖에서, 혹은 멀찍이서 누군가 얼쩡거렸지만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으라지. 흥.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클레멘츠가 정말 계속 그러고 있진 않았다.

클레멘츠가 쓰러뜨렸던 마수가 꿈에 나왔다. 내가 소환하려던 건 혼우드 시내 가로수 길의 파이 집이었는데. 고대어를 발음 못하는 내 혀가 문제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크륵-.

마수가 마력 안개를 내뿜었다. 빨리 달아나야 했지만 병아리 다리로는 한 걸음이 너무도 짧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무리 팔다리를 허우적거려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게 다 망할 클레멘츠 자식 때문이다.

부디 그녀석이 말년에 탈모가 오길 기도하며 낑낑거리고 있으니 누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정신이야? 이 와중에 머리나 쓰다듬다니?

어?

생각해 보니 저 괴물은 클레멘츠가 없애 버렸다. 가만 보니 난 허우적대지도 않은 채 얌전히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꿈이었군! 다행이다. 가로수 길 파이 집을 소환할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아쉽지만…….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은 환촉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손가락의 이 각도와 섬세한 힘 조절. 나직한 숨소리와 은은한 향기. 그리고 며칠간 서성거리던 놈이라는 정황 근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레이디의 침실에 잠입한 이 무뢰배는 클레멘츠가 틀림없었다.

언제나 당당하게 사람을 오라 가라 하면서. 요즘은 좀 이상하게 굴더니 급기야 별일 다 보겠다. 앞에선 사람을 무시하더니 이렇게 쭈글거리며 찾아와 자는 모습이나 엿보고 있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뜸 눈을 번쩍 뜨고 ‘나가라, 이놈아!’라고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어쩔 셈인지 살펴야지.

아니나 다를까 거의 숨소리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깰까 봐 무척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널 이용할 거라니. 이용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체 어쩌다 그런 근거 없는 생각을…….”

그냥 지금 일어나서 한 대 때릴까?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평온을 가장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무시하듯이 말해서 미안하다. 널 어디에 이용하겠나. 그런 거 없다. 그저…….”

그저……?

“귀여우니까…….”

……예?

하지만 나지막한 속삭임은 거기서 끝났다. 내가 잘못 들었을 리 없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오필리어?”

“뺘아아앗?(그냥 귀여워서 이러시는 거라고?)”

클레멘츠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떨어졌다. 정말 희귀한 꼴 많이 본다. 클레멘츠가 놀라서 뒷걸음질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느냐!”

그는 큰 손을 가져다 얼굴을 가렸다. 희미한 달빛에도 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상황이 떳떳치는 않은가 보군. 다행이다.

“삐약!!(사과를 하려면!) 뺘비뱍!!!(깨어 있을 때 얼굴 보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깨워서 미안하다. 그럼 난 이만…….”

“삐얍뺘!(그리고 애당초 사람을 그렇게 멋대로 이용하고!) 뺘압삐빅뺙!(그럼 안 되는 거 알아요, 몰라요?)”

자리를 피하려는 클레멘츠를 따라다니며 솜털이 빠지도록 푸드덕거렸다. 보다 못한 그가 나를 잡아 올려 다시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자거라, 오필리어.”

“뺘뺘뺙.(흥, 댁이 이러신다고 내가…….)” 

“내게 실컷 화풀이를 했으니 이번엔 단잠을 잘 수 있을 거다.”

뭐지? 내가 악몽을 꾸는 게 다 티 났나? 나름 달래 준다고 쓰다듬은 거였고?

눈을 가늘게 뜨고 클레멘츠를 봤지만, 잘난 얼굴은 어둠 속에 숨어 버렸다. 그는 어느새 침착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냔 질문에, 그는 귀여워서 데려왔을 뿐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건 막다른 복도에서, 원래 모습이던 내게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근데 그땐 엉뚱한 소릴 해 놓고 이제 와서야 본심을 말하다니.

혹시 병아리 상태의 내가 본체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쪽이 더 익숙하기야 하겠지만. 내 원래 모습과 낯이라도 가리는 걸까?

* * *

제국의 황비, 클라우디아 페리윙클 뒤싱겐.

그녀는 황태자 클레멘츠의 모후가 죽은 후, 황제가 새로 들인 비였다.

시미크 교의 영향으로 제국에 일부일처제가 굳어지고, 첩인 ‘황비’와 정처인 ‘황후’의 구분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클라우디아는 이십여 년째 ‘황비’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왜일까. 사람들은 황제의 심중을 추측하기 바빴다.

페리윙클 공작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황태자인 클레멘츠의 정통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죽은 황후인 셀레네 디 샹그리아를 지금도 사랑하기 때문에?

논쟁이 어찌 흐르건 정작 클라우디아 본인은 침묵을 지켰다. 유유자적, 자애로운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황비는 정원의 꽃을 가다듬고 있었다.

작업에 알맞도록 편하고 수수한 드레스. 페리윙클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푸른색 머리는 장식도 없이 질끈 동여맸다.

“황비 전하, 들으셨습니까?”

“뭘 말입니까, 삼촌?”

페리윙클 공작가의 가주, 조슈아 페리윙클은 답답하다는 듯 연신 손에 쥔 지팡이로 애꿎은 흙바닥만 찍어 댔다.

“황태자……! 황태자가 최근 벌이는 기행에 대해 들으셨냔 말입니다.”

“아, 들었어요. 귀여운 새를 애지중지 기르고 있다지요?”

손에 가위를 든 황비는 부드럽게 웃곤 흰 장미 나무의 형태를 다시 살폈다.

흡사 친조카나 아들 친구의 소식이라도 말하듯 태연한 태도였다. 가주의 속은 한층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금 장미나 가다듬고 있을 때인가!

“새를 기른다고도 하고, 여인을 제 궁에 숨겼다고도 합니다.”

“…….”

“오필리어인지 뭔지 하는 것에게 빠져 궁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고, 귀족들까지 그 출신도 모르는 것에게 굽히라고 강요한다더이다.”

“어머나, 너무 바짝 잘라 버렸네.”

푸른 눈을 반짝이며 듣던 황비는 방금 전 잘라 낸 가지를 아쉬운 듯 매만졌다.

가주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제는 지팡이에 그치지 않고 숫제 발을 굴러 가며 이야기했다.

“그 요망한 것에게 어떤 선물을 바쳐 환심을 살지, 다들 온통 그 얘기만 떠들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그 빈틈없던 샌님이 갑자기 구설수에 몸을 던지는데, 이게 보통 기회입니까? 예?”

페리윙클 가주는 인내심을 끌어올려 숨을 골랐다. 저리 답답하게 굴어도 클라우디아는 황가의 일원이었고, 페리윙클의 희망인 2황자의 어머니였다. 황실이 관련된 계획에 그녀의 동의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 오필리어라는 새가 얼마나 부적절한 상대인지. 그 때문에 황태자는 얼마나 큰 실책을 저질렀는지. 하나를 캐내면 열을, 백을 뒤집어씌워 반드시 그놈을 추락…….”

“후후!”

느닷없는 웃음에 가주는 멍해졌다.

“명령, 명령을 내려요? 제가 삼촌에게? 24년 전에 이곳으로 저를 보낼 땐 제 의견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제 명령을 듣겠다…….”

“그건……! 너도, 너도 좋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가의 일원이 될 기회라면 놓치지 않겠다고!”

얼굴이 희게 질린 가주는 제가 반말을 내뱉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언뜻 비릿하게 변해 있던 황비의 웃음은 한순간 해사하게 갈무리되었다.

“아아, 아무튼 전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소박한 황비 클라우디아인걸요. 그리고 폐하께서는 이런 저를 사랑하시고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모르겠어요?’

잠시 치켜 뜨인 황비의 눈은 그런 말을 하다가 다시 유하게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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