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내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평소처럼 클레멘츠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보기엔 그저 똑같은 병아리겠지만.
“자, 오필리어 님. 오늘도 너무 귀여우세요. 전하께 데려다 드릴게요.”
유렌의 손바닥에서 폴짝 도로 뛰어내렸다. 어리둥절해하는 유렌에게 고개를 설레 저어 보였다.
“삑.(오늘은 안 갈래.)”
“오필리어 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유렌은 공손히 인사하고 나갔다. 나는 평소처럼 유달리 매끈매끈하고 탐스러운 병아리가 되어 방에 홀로 남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카밀이 설치고 다니도록 내버려 둔 이유는 편의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 대 최고 권력자가 될 남자에게 필연적으로 붙는 각양각색의 사심 짙은 관심들. 카밀은 그 모두를 가차 없이 끊어 놓기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거기에 벨라를 끌어들인 이유는 카밀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신나게 독주하는 그녀를 막기 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카밀이 이대로 실질적인 황태자비 자리에 가까워지면 곤란하니까.
혹은, 카밀의 출신인 귀족파 세력을 의식한 반응일 수도.
‘벨라…….’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으니. 원작의 벨라가 그렇게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귀가 딱 들어맞으니 아닐 거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끝에서 자신을 돌이켰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충분히 막을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벨라에게 목숨을 내주었다.
그저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다면 그럴 수 없다. 시작은 악질 계략 남주였어도, 함께 지내며 이슬비에 젖듯 진정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지, 썩을 놈아!’
평행 세계 너머의 원작 클레멘츠에게 욕을 퍼부었다.
혹시 나는 벨라의 마음을 돌려놓음으로써, 클레멘츠가 인간적인 마음을 얻을 기회를 영영 박탈한 게 아닐까?
지금 내게 보란 듯이 과도한 애정을 퍼붓는 것도 뭔가 목적이 있는 행동 아닐까?
대체 병아리 광신도인 척해서 어떤 이득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 짓지? 그는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사람마저 이용하는 남잔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도저히 클레멘츠를 예전처럼 볼 수 없어졌다. 나는 그 뒤로도 계속 그를 피해 다녔다.
“오필리어 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오전에 만나지 못해 전하께서 걱정하셨어요. 궁의를 부를까요?”
“비익.(아뇨, 괜찮아요.)”
고개를 젓고 쿠션 위에 엎어졌다. 카렌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다음부턴 클레멘츠가 직접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문짝에 붙어 있다가 그의 발소리를 들었다. 황급히 살짝 열려 있던 서랍장 속에 몸을 구겨 넣었다.
얼마 안 가 그가 들어와 방 안을 어슬렁댔다.
“오필리어, 어디 있느냐?”
“…….”
숨을 죽이고 있자 그가 이곳저곳 꼼꼼히 살피는 소리가 들렸다.
숙녀의 방을 뒤지다니…….
실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악질 계략 남주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서랍장 안쪽까지 살펴보진 않았다. 당연하다. 서랍 속에 병아리가 구겨져 있을 거란 상상은 보통은 하지 않는다. 한참 후에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돌아갔다.
아침엔 그를 만나러 가지 않고, 찾아오면 숨거나 피하기를 며칠.
이래도 되나? 조금 찔리긴 했어도 계약서에 ‘매일 만나 줘야 한다.’ 같은 조항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되어 있었지. 그리고 지금 내가 원하는 곳은 클레멘츠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여긴 그의 궁이었다. 영원히 피해 다닐 순 없었다. 어느 늦은 저녁, 외진 복도에서 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젠장!
여긴 집무실에서도 그의 침실에서도 꽤 먼 곳인데. 일부러 날 찾아다녔나? 실로 집요한 계략 남주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오필리어.”
“……삐히익.”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 아닐까? 이대로 지나쳐 주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희망은 사라졌다. 그는 곧장 날 향해 걸어왔고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병아리 걸음아 날 살려!
“멈춰라. 거기 서!”
“삐육.(서란다고 서는 사람 보신 분?)”
“대체 왜 날 피하는 거지? 그렇게나 날 보는 게 싫었나?”
님이야말로 이렇게까지 병아리를 봐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대체 무슨 계략이길래!
“이런다고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런 순간에조차 그런 대사 안 쳐도 네가 로판 남주인 건 알아!
짧은 추격전은 바로 끝났다. 내가 향한 곳이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점점 어두워지며 은색 머리가 유달리 밝게 빛났다.
나는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제 살을 찢고 주문을 외우자 검은 포대 자루를 쓴 마물이 나타났다. 이젠 별다른 말로 지시하지 않아도 마물은 내 모습을 바꿔 놓고 사라졌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또 사람이 되었다. 그와 나, 단둘뿐인 복도에서.
“아…….”
“말해라.”
높아진 시야며 바뀐 모습에 적응하느라 눈을 찌푸렸다. 그사이 그가 성큼 한 발짝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기세에 움츠러들었다.
“갑자기 도망 다니는 이유가 뭔지, 무슨 생각인지 말해.”
그는 뭔가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가까워졌다. 물러서는 내 등 뒤로 복도 끝의 차고 딱딱한 벽이 닿았다. 강렬한 눈빛이 나를 압박하고 들어왔다. 난 어물거리며 그 눈을 피했다.
“말할게요. 말하는데, 이렇게 무섭게 안 하시면…….”
말하다 보니 갑자기 뭔가 울컥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나를 궁지에 몬 게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도 칼을 들이밀며 위협했고. 계약할 때도 치사하게 약점을 잡았고. 부모님 집에서도 멋대로 날 엮어 장대한 스토리를 진행시켜 버렸고.
얼 빼 놓고 있는 동안 그에게 휩쓸리는 건 이제 싫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기도 싫었다.
이제 와서 무서울 게 뭐가 더 있을까. 오기로 눈을 치뜨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가 살짝 움찔했다. 하얀 목에 솟은 울대뼈가 움직였다.
“전하.”
언제나 소시민으로 살아온 삶. ‘이래도 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하지만 계약서엔 분명히 ‘최선을 다해 오필리어 레오라의 안전과 명예를 보장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만 믿고 두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뭐지.”
와, 그러게요! 이거 뭐야?
너무도 탄탄한 감촉이었다. 아, 내 어깨는 쓰레기였구나!
당황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계속 노려보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대체 뭐 하냐는 어이없는 눈빛이 내 얼굴을 뚫어 버릴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지?”
“……좀, 그냥 순순히 움직여 주시면 안 될까요?”
“…….”
모양이 빠지다 못해 땅속으로 꺼지는 그림이었지만, 어쨌든 그를 붙잡고 종종걸음으로 회전했다. 마침내 클레멘츠를 방금 전 내가 기댔던 벽에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체구 탓인지 여전히 내가 한참 밀리는 느낌이지만. 클레멘츠가 이제 황당해하다 못해 헛웃음을 지으려고 하지만.
안 돼, 여기서 기세가 꺾이면 모든 게 망한다!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피했냐고 하셨죠? 다 들었어요. 베일리스 영애와 나누시는 이야기요.”
역시. 반응이 즉시 왔다.
사실 내가 다 들은 건 아니고, ‘저를 이용하고 계셨잖아요!’라는 일갈만 들은 거지만. 없는 밑천을 부풀리니 클레멘츠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베일리스 영애를 이용하셨다죠? 그 긴 시간 동안. 전하께선 제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전하에 대해 아는 게 꽤 있어요.”
나는 최대한 야멸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판단한다는 거예요. 카밀에게도 그랬고, 벨라에게도 그랬어요. 차가우신 분이에요. 아마 복잡하고 위험한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게 미덕이겠죠.”
모나한 저택에 있을 때, 숲에서 실종됐다는 시녀에 대해 그가 얼마나 무심하게 반응했는지 잊지 않았다.
그 뒤엔 화살 찾아 헤매는 날 데리러 오고, 마수에게 당할 뻔했을 때 구해 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벌인 일인 거다. 이해는 안 가지만, 병아리인 나를 데려와서 이득을 볼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힘없는 동물에게 진심으로 잘해 주실 분이 아니세요.”
내 말에 그의 짙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어둠속으로 침잠해 다시 떠오르지 못하고 이리 꿈틀, 저리 꿈틀 뒤척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선선히 인정했다. 나를 향하는 표정은 손을 대면 그대로 가루가 될 것처럼 건조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걸까?
“나답지 않은 일을 벌였다. 그 시골에서 널 데려와 버렸지.”
그가 일컫는 ‘시골’이란 말에선 모멸감이 느껴졌다.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는 건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당해야 하는데, 알아채 버려서 이용 가치를 잃은 건가?
가슴 한구석이 써늘했다.
“그럼요? 절 다시 돌려보내실 건가요?”
“벌써 돌아가고 싶어졌느냐? 아니, 그리 내버려 둘 순 없지. 계약도 남아 있고.”
이번엔 좀 성급하게까지 느껴지는 투였다. 왜 이러지? 아직 이용할 구석이 남아 있나? 아니면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걸까?
아, 이래서 악질 계략 남주 따위. 한 길 사람 속을 헤아리다가 끙끙 앓는 건 질색이었다. 참다못해 대놓고 물어봤다.
“그럼, 저를 어디다 쓰실 거죠? 말해 주세요. 이용당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뭐라고?”
“항상 용도가 있는 관계만 남기시잖아요!”
그는 이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놀라서 확 풀어진 동공이 영롱한 진 보라색에 둘러싸여 있었다. 참 예뻤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여전히 어깨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의 옷자락이 내 손아귀에서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