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2)화 (42/218)

42화

그럼 여기서 내 포지션은?

후회남이 원래 애지중지 아끼던, 그래서 악녀의 질투를 부르던 인물.

‘어머, 카밀 양이시잖아요. 그이가 어찌 지내나 궁금하신가요? 제게 너무 잘해 준답니다. 절 아낀 나머지 맨 발톱이 흙바닥에 닿게 하는 것마저 조심스러워 해요. 삐약.’

하지만 각성한 악녀는 더 이상 질투하지 않는다. 카밀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필요 없어. 너 가지렴.’

오오.

중간에 병아리가 꼈다는 치명적인 결점만 빼면 완벽한 가설이었다.

그럼 클레멘츠는 여기서 구르고 구르다가 지난날의 업보를 청산하고 사랑을 쟁취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쓰레기처럼 굴다가 새로운 남주 후보에게 카밀을 빼앗기고 말 것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로맨스가 나올 구멍은 있구나. 나는 감격하며 팝콘을 찾았다.

“삐약 뺙뺙삐.(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여기 남아서 후회남의 예비 구 여친 역할을 수행하긴 너무 자괴감 들 것 같았다.

판은 깔렸으니 둘이 오붓하게 얘기하게 놔둬야겠다. 클레멘츠의 뒤에 있는 카시스에게 다가갔다.

“삐릭.(카시스, 우린 빠져 있자.) 삐뺘뺘.(갑자기 저쪽 꽃밭 뒤에 자작나무가 모두 몇 그루인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붙잡혔다. 클레멘츠였다.

“자꾸 어딜 가는 거지? 내 옆에 있어라.”

아이고. 역시 마음을 덜 자각했나 보다. 머쓱한 기분으로 눈을 돌리자…….

선명히 이글거리는 녹안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머뭇거렸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대체 왜 갑자기 병아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신 거죠?”

사나운 음성이었다. 원하는 남자에게 제가 한갓 병아리보다도 못했단 분노가 그대로 전달돼 왔다.

내 가설이 틀렸나?

그러나 다음 순간 카밀은 또 머뭇거렸다.

“이, 이깟……! 이까짓 잡종 새가 뭐라고……. 하, 하찮은…….”

자, 잡종 새……라고 부르긴 했지만. 또다시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크게 충격 받은 모습이었다.

이쯤 되니 알 수 없어졌다. 너 왜 그러냐?

* * *

클레멘츠는 드물게 일감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했다. 옆자리가 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아침 업무를 볼 때면 옆에서 알짱거리던 노랗고 작은 존재감이 사라져 있었다.

“자, 눈이 감깁니다. 몸이 나른해집니다. 당신은 생각합니다. 오늘 점심은…… 오필리어에게 얼린 딸기를 먹게 해 주고 싶어진다고…….”

“혹시 크렘시아가 착해지는 주문은 안 걸어 줬냐?”

“음, 얼굴 하나만은 인정합니다. 얼굴의 세포들에게만큼은 잘 잤냐는 아침 인사를 건네고 싶네요.”

입만 열면 불손한 소릴 쏟아 내긴 했다. 헛소리를 못 들은 체하는 기술만 나날이 늘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그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황궁으로 데려온 걸 한시도 후회한 적 없었다.

창밖을 보니 베일리스의 딸이 있었다. 연일 시위하듯 정원에 버티고 앉아 탐색을 그치지 않았다. 사실상 쫓아낸 거나 다름없는 모욕을 주었는데도.

아예 출입 금지령을 내렸어야 하나. 찌푸린 낯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오필리어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정원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왜 저기까지 나간 건지. 관극용 쌍안경을 들고 있던 카밀이 그 아일 발견했다.

클레멘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교계의 백조가 일상적으로 벌이는 패악질에 비하면, 작은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짧은 순간 수많은 고민을 했다.

당장 뛰어 내려간다 해도 상황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 소환을 해? 여긴 황궁이었다. 하지만 여차 하면 손바닥을 그을 생각으로 책상에 놓인 편지 칼을 집어 들었다. 마족의 개입 없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주문을 몇 가지 찾으려 머릿속을 뒤지고 뒤졌다. 그런데.

창문에 못 박혔던 보라색 눈이 커졌다. 잠시 후, 그는 허- 하고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카밀을 만나자마자 오필리어가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그 뒤로도 그 애가 카밀 드 베일리스를 뜻대로 요리해 버리는 광경이 낱낱이 보였다. 안 그런 척하면서 완전히 사로잡히는 꼴에 클레멘츠는 실소를 흘렸다.

당연하지. 오필리어가 어디 보통 병아리던가? 첫눈에 그를 사로잡은 그 귀여움은 카시스 듀프레도 인정한 바 있었다. 아무리 체면을 차리고 콧대를 높여 봤자 작은 울음소리 한 번이면 다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걱정은 덜었지만 이번엔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오필리어는 그와 있을 때도 밖에 나가 베일리스의 딸을 만날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안 될 말이었다. 오필리어를 황궁으로 데려온 건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다른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다.

‘원하는 곳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게 해 준다.’라니. 가끔 보면 신기할 만큼 현명했다. 그래서 클레멘츠는 궁 안을 돌아다니는 방문자나 사용인들이 병아리의 귀여움을 찬양할 때마다 뿌듯함과 함께 올라오는 거슬림을 내리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카밀 드 베일리스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든 취해야만 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일정을 취소하고 오필리어를 가로챘다.

후원으로 피크닉이라니.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 스스로에 대해 조소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베일리스는 부득불 거기까지 기어들어 왔다.

오필리어가 자신의 앞에서까지 카밀에게 친근하게 군 순간, 그는 결정했다. 카밀 드 베일리스가 황태자궁에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하자고.

병아리를 가둘 수 없다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면 된다.

근거는 충분했다. 베일리스 후작 영애는 무서운 이였다. 말로만 해를 입히겠다, 무너뜨리겠다 염불을 외던 모나한 영애보다도 훨씬 더.

지금은 애교에 마음을 녹이고 있어도 언제 마음을 바꿔 그의 작은 병아리에게 흉수를 들이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당초 둘이 마주치게 된 것부터가 사고였다.

“예……?”

“그대가 들은 것이 맞아.”

피크닉에서 돌아온 후, 오필리어는 방으로 옮겨져 자고 있을 터였다. 클레멘츠는 입을 열었다.

“앞으론 내 약혼자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부름도 없이 찾아오는 일. 내 궁의 사용인들을 겁박하는 일. 내게 접근하는 여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

“…….”

적어도 한참 전에 꺼냈어야 할 말이었다.

베일리스의 딸은 충격에 몸을 떨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무어라 항변했다. 그리고 결국엔,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황태자궁을 뛰쳐나갔다.

* * *

피크닉이다, 두뇌 풀가동이다 해서 에너지를 많이도 썼다. 그래서 곧장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애매한 시간에 깨어났다.

“삐흠.”

방 안엔 나뿐이었고 사방이 조용했다. 메이드들이 올 저녁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그동안 클레멘츠나 방해하며 놀고 있을까? 아마 바쁠 테지만, 그놈은 내가 근처에 있으면 왠지 항상 한가한 것처럼 굴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내 방문에는 마치 우유나 신문을 넣는 구멍처럼, 병아리가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설치돼 있었다. 카시스가 수정한 예산안 목록에 들어 있었고, 글로리나 부인이 직접 공사를 감독했다.

얇은 금속으로 된 병아리 문이 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석양이 드리우는 복도를 마음껏 포로롱대며 달려갔다. 그런데…….

“저를, 이용하고 계셨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지?

클레멘츠의 집무실. 살짝 열린 문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카밀의 것이었다. 아직 후작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가?

하여튼 들어가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문간에서 얼쩡대고 있으려니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문짝에 얻어맞을 뻔했다.

“…….”

뛰쳐나온 카밀이 날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뭐지? 차인 건가?

카밀이 너무 분하고 슬퍼 보였기 때문에 나는 머뭇거렸다. 어떻게 위로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병아리의 몸으로 무슨 위로를? 갈팡질팡하는데 카밀이 대뜸 날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던져 버렸다……?

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다행히도 속도 조절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못 던지는 건지 복도 바닥에 처박히는 신세는 면했다. 가까스로 날갯짓을 해 무사히 착지했다.

다칠 뻔했잖아!

하지만 항의하려고 돌아서니 카밀은 이미 이곳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아이보리 색 드레스 뒷자락만 살랑거리다가 사라졌다.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로 사라졌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집무실로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병아리 문을 통해 방으로 돌아와서도, 메이드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글로리나 부인이 잠자리를 정돈해 준 다음에도 계속 생각했다.

“저를, 이용하고 계셨잖아요!”

원작 소설에서 클레멘츠는 카밀에게 항상 철벽을 쳤다. 그 모습에 독자들은 남주가 조신하다며 흡족해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는 강경하게 제지하는 의사표현 역시 한 적이 없다. 그 결과가 카밀에게 주어진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라는 타이틀이었다.

벨라가 황궁에 온 첫날. 그가 돌아왔단 소식에 달려온 카밀은 클레멘츠와 함께 있는 벨라를 보고 확실한 적으로 인식한다.

그 탓에 벨라는 카밀의 치졸하고 악랄한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클레멘츠는 얼마든지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원하면 카밀이 벨라의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있는 집무실에 카밀이 들어오지 못했던 것처럼.

전생에서 피식 웃으며 대충 넘겼던 댓글 하나가 생각났다.

[저만 남주 좀 쎄한가요? 왠지 일부러 카밀한테 벨라 약점 잡을 빌미를 준 거 같음.]

사실 그분이 캐해석 장인이었나? 원작의 클레멘츠는 카밀을, 심지어 벨라마저도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이용하는 악질 계략 남주였나?

그리고 나는 캐해석도 남주 주식도 빙의도 모조리 실패한……. 젠장, 말을 말자.

어차피 1년 후면 내 인생과는 상관없어질 사람이었다. 그 성격 그대로 살든, 개과천선하든. 목숨 제대로 붙어서 잘생긴 얼굴 건사하고 살기만 하면 될 일. 나는 다달이 계약금이나 타 먹으며 로열 병아리 생활이나 즐기다 가면 되는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