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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41)화 (41/218)

41화

또 하나는 건물 뒤쪽과 이어지는 후원. 편평한 정원과 달리 언덕이 많고 나무가 우거졌다. 꽃을 심어 가꾸긴 했지만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뷰티 앤 더 비스트>에서 남몰래 흑표범으로 변한 벨라가 몸을 숨기는 곳이기도 했다. 때 아닌 새벽에 침입해 그녀를 발견한 클레멘츠를, 벨라는 급한 대로 덮쳐 버린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앞발로 누른 채 뭐라 설명 못 할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먼동이 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원래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던 그 장면. 크, 정말 좋았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그 커플이 완전히 무산된 건 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후원으로 굳이 걸음했다간 내 손에 망한 주식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내가 시큰둥하게 있자 클레멘츠는 계속 설득했다.

“바깥 날씨가 아주 좋더구나. 오전 일정을 비워 두었다. 네가 좋아하는 시원한 차도 마실 수 있도록 챙기라고 하마.”

“삐움.(음…….)”

“보여 주고 싶은 곳이 많단다. 후원의 작은 연못 옆에 붉은 튤립이 탐스럽게 피었다. 오필리어 네가 보면 분명 좋아할 거다.”

“쀼움.(흐음…….)”

달콤한 목소리로 나긋나긋, 놀러 나가자고 꼬신다. 그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뭔가 따로 꿍꿍이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다정히 날 향한 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 분명 얼굴에 홀려 홀랑 따라나서게 될 것이다.

“이미 카시스에게 샌드위치를 준비해 나서라 일렀다. 돗자리와 담요도 챙겼으니 마음껏 뛰어다니다가 지치면 앉아서 쉬려무나.”

앗, 카시스 표 샌드위치?

“전하, 준비가 다 됐습니다.”

마침 문이 열리며 나의 미슐랭…… 아, 아니. 카시스가 등장했다. 커다란 체구의 냉엄한 미남의 손목에 하얀 천을 깐 피크닉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마치 첫사랑을 만난 듯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거다. 분명 저기에 나의 샌드위치가 들어 있을 것이다.

“삐헤헴…… 삑.(까짓것, 한번 가 보죠.)”

예쁜 네가 그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어쩌겠느냐-스러운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있는 대로 튕기던 나는 도착하자 부리를 좍 벌렸다.

아니, 여기가 거기라고? 잘못 찾아온 거 아녜요?

완연히 도래한 봄은 녹지가 풍부한 황태자궁 이곳저곳에서 빛과 향기를 퍼뜨렸다. 공기마저 싱그럽고 근사했다. 암만 소설 속에선 밤중의 모습만 묘사되었다 해도 차이가 심했다.

‘검은 유령처럼 팔을 벌린 가지들?’

그냥 가지가 웃자란 정원수들이었다.

‘핏빛 선명한 꽃송이?’

사랑스러운 향을 풍기는 장미였다.

차라리 잘됐다. 아예 소설 속과 다른 장소처럼 느껴지니 망한 주식을 붙잡고 울어야 할 듯한 기분도 전혀 들지 않았다.

연못 옆의 붉은 튤립은 정말 예뻤다. 내 병아리 몸뚱이만 한 꽃송이가 달린 튤립 줄기들 사이를 헤집고 달리니 클레멘츠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리석으로 네모지게 만든 연못 안에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쭉 내밀자 카시스가 손을 뻗어 날 받쳤다. 물고기 밥이 될까 봐 염려하는 것일까?

“연못을 좋아하는 것 같구나.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줄 테니 다음엔 그걸 타고 구경하는 게 어떠냐?”

클레멘츠도 아끼는 병아리와 피크닉을 나온 게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헛소리가 꽤 창의적이었다.

카시스가 고민하다 대답했다.

“……잘못하면 물고기가 튀어나와 오필리어 님을 덮치지 않을까요?”

역시 그 걱정을 하는 게 맞았군.

정말 병아리 상태의 나는 연못의 비단잉어에게도 잡아먹힐 체급인 걸까?

사람들이 근처에 얼쩡거리니 잉어들은 밥을 주지 않을까 해서 모여들었다. 그중 뻐끔거리며 고개를 든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뭐 인마. 까불래?

최대한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자 잉어는 다시 가라앉았다. 흠, 좋아. 기세로는 지지 않아.

“……그렇다면 저 물고기를 전부 없애는 게 좋겠군.”

클레멘츠가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확실히 그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소형 조각배의 설계는…….”

카시스 이 인간은 또 진지하게 응수하고 들었다.

싹 다른 연못으로 옮긴다는 건지, 구워 먹겠단 건진 모르겠지만. 원한 적도 없는 뱃놀이 한 번에 저 잉어 떼를 전부 실직시킬 순 없는 노릇이다.

“뺙삐삐 삐약.(에혀. 됐으니 식사나 합시다.)”

더 이상 연못에 관심이 없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카시스의 손에서 뛰어내려 연못에서 멀어졌다. 나무 아래 그늘에 둔 피크닉 바구니를 향하는 내 발걸음은 성지를 향하는 순례자처럼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삐에엑!(샌드위치!!)”

돗자리 위에서 파닥거리며 패악을 부리자 금세 포장을 벗기고 알맞게 잘라 낸 샌드위치가 대령되었다. 클레멘츠와 카시스가 양측에서 부지런히 시중을 들었다.

햄 에그, 생선 살, 바비큐. 세 가지 맛을 골고루 맛보고, 얼음으로 식힌 캐모마일 티로 입가심을 했다.

신선한 피톤치드 향. 적절한 온습도와 햇볕. 포만감에 스르르 졸음이 왔다. 중간중간 깨어날 때마다 클레멘츠의 작은 숨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워커홀릭인 그의 특성상 늘 쉴 틈 없이 달려왔을 게 뻔했다. 한 번쯤은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너무 일만 하고 사니까 사람이 삭막해지고, 급기야는 지금처럼 미친놈이 된 거 아닐까?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녀석에게 휴식할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나도 훌륭한 계약 병아리겠지. 나름대로 도움이 되고 있는 거라고.

뿌듯함을 느끼며 몸을 뒤척거렸다.

순간, 커다란 그늘이 내리쬐던 햇빛을 가로막았다. 나른해진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카밀이었다!

고고한 백조 같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쁘게 땋은 머리는 잔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왔고, 치맛단엔 마른 나뭇잎 조각이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상상도 못 할 흐트러진 모습. 형형한 눈이 녹색 불처럼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클레멘츠를.

“여기까지 찾아온 건 칭찬해 주지.”

어디선가 산전수전 다 치르고 온 듯 피곤한 낯의 카밀. 그리고 저 대사.

꼭……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나, 붉은 문신의 클레멘츠가 상대해 주지.’ 같은 분위기인데.

하지만 그럴 린 없고. 카밀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잠이 덜 깬 눈으로 클레멘츠와 카밀을 번갈아 보다가 깨달았다. 이 살벌한 분위기. 이것은 제2의 위기였다.

애당초 카밀이 며칠간 정원을 샅샅이 뒤진 이유는 클레멘츠가 데려왔다는 여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건 나였지만, 아무튼…….

첫날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다가 허탕 치고 돌아간 이후, 클레멘츠는 아예 카밀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요 며칠간 끼어들어 주의를 흐리던 병아리가 보이지 않으니, 카밀은 본 목적을 깨닫고 각성한 것이다. 기세를 몰아 드디어 짝사랑 상대인 클레멘츠를 찾아냈다. 그런데, 조금 귀여워서 특별히 살려 뒀던 병아리가 그의 옆을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

요컨대 클레멘츠를 향한 저 매서운 눈빛은 ‘나는 만나 주지도 않았으면서, 이따위 하찮은 병아리는 소중히도 대하시는군요.’라는 원망인 거다.

얼마나 내가 밉겠는가? 그간 애써 가며 애교 부리고 뇌물 바친 보람이 없어졌다. 흐흑.

하지만 일단 살아야겠기에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뺘삐!(오늘도 눈부시신 카밀 님!) 삐유욱!(여기 앉으십쇼!)”

내가 앉았던 자리를 날개로 툭툭 턴 다음 비켜 서며 공손히 가리켜 보였다.

보셨습니까, 카밀 님? 저는 당신을 알아보는 동물입니다! 알아 모신다고요!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

또한 상당히 어처구니 없어 하는 클레멘츠의 눈길도 내게 머물렀다. 야, 네가 살기 위해 아양을 떨어야 하는 미물의 입장을 이해하긴 해?

카밀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만나 주지도 않으시면서, 흐흠. 이, 이따위 하찮은 병아리는 소중히도 대하시는군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소름이 돋아서 솜털이 바짝 서는 게 느껴졌다.

클레멘츠, 아니라고 해라. 병아리 같은 거 소중하지 않다고 대답해. 아니, 그냥 마침 산책 나왔는데 여기서 만났다고 대답해! 내 안전을 위해서. 알겠지?

그런데 이상했다. 클레멘츠가 카밀을 굉장히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유감이 한가득 있는 사람처럼. 반면 카밀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말해 놓고도 자기 발언에 확신이 없는 사람 같았다.

왜들 저러지?

역시 황궁은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갈수록 눈치로 때려 맞혀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다시 한번 병아리 두뇌를 풀가동해 본다.

……그렇군. 감이 잡힌다.

말하자면 저 둘은 ‘새사람 된 악녀와 후회 남주’ 유형이었다.

카밀이 워낙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요 며칠간은 그녀가 나쁜 짓 따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내가 옆에서 지켜봤으니.

기껏해야 넓은 정원이나 산책하고. 좋은 봄날에 시녀들과 수다 떨며 야외 다과회 같은 거나 하고. 필사적으로 애교 부리는 병아리와 놀아 주고.

그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 보니 클레멘츠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 잊어버린 거 아닐까?

관성을 따라 찾아오긴 했지만, 이제 그의 얼굴을 봐도 예전처럼 독점욕에 불타오르지 않는 거다. 그럼 저 당황스러운 표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 클레멘츠는 어떠한가?

단순하다. 평소 아무리 귀찮게 여겼어도, 계속 자기가 좋다며 치대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서면 신경 쓰이는 법. 나의 로판 빅 데이터에 따르면 이 경우 돌아선 사람에게 역으로 집착하며 관계가 반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까 보니 클레멘츠의 집무실 책상에선 나와 카밀이 곧잘 만나던 지점이 잘 내려다보였다. 하라는 집착은 안 하고 즐겁게 노닥거리는 카밀을 봤을 수밖에 없다.

그 꼴을 보다 보니 문득, ‘쟤가 왜 저러지?’라는 의문이 들었을 터. 곱씹다 보니 평소대로 움직이지 않고 신경 쓰이게 구는 카밀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었을 거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마음을 자각하기 전의 후회남이 전형적으로 겪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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